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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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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상공연맹 사무총장
한문 沙千里
한국식 독음 사천리
영문 Sha Qianli
본명 사중원(沙重远)
출생 1901년 청나라 장쑤성 상하이시
사망 1982년 4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상하이 법과대학 졸업
직업 변호사,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구국회의 7군자2.3. 중일전쟁 시기2.4. 국공내전 시기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작품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변호사, 정치가. 선쥔루, 쩌우타오펀, 왕자오스, 장나이치, 리궁푸, 스량과 함께 '구국회의 7군자'로 불린 인물. 중화민국 시절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연공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국민당 특무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중일전쟁 시기 항일운동 및 민주운동에 가담했고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과 연합하여 국민당의 독재에 맞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전국 상공연맹 사무총장, 양식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샤첸리는 1901년[1] 장쑤성 상하이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곤궁했다. 7살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의 누나 역시 요절했으며, 어머니가 그와 여동생 사페진(沙佩珍)[2]을 어렵게 키웠다. 훗날 그는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그는 어릴 때 상하이 해녕로 비홍초등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집안 사정이 곤궁해 끝까지 마무리짓지 못했고 15살 때 상하이 대풍면 도매호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일하고 20살 때 회계를 맡았다.

샤첸리는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고 머리가 매우 총명해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1925년 상하이 법과대학에 입학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하고 법학을 공부했다. 또한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가담해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당 상하이 3구 당부 집행위원을 지냈다. 1927년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한 후, 상하이 법과대학에 재직 중이던 교수 12명이 초당분자로 지목되어 제명되었고 판리산(潘力山) 총장은 암살당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도, 샤첸리는 공부에 매진해 모범학생이라는 호평을 받았고 학생회 감찰위원을 지냈다. 1929년, 그는 상하이 법학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1929년 초, 샤첸리는 <청년의 벗> 출판사의 '혁신호' 잡지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이 잡지에서 "중국은 또다른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년의 벗>은 혁신호를 시작으로 청년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기관지로 평가받았고 발행부수가 계속 증가해 5000부를 돌파했다. 그러자 국민정부는 <청년의 벗> 이 청년들을 사회와 이반시키고 계급투쟁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판매를 금지했다. 샤첸리는 훗날 이 일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17년동안 몇몇 친구들과 함께 '청년의 벗'을 만들었는데 국민정부는 1년 반만에 금지했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청년의 벗>이 정간된 후, 샤첸리, 리보룽(李伯龙), 쉬더량(许德良), 렌씨엔(任先), 첸쫑준(沈仲君) 등은 '청년의 벗' 조직체계를 기반으로 삼아 '개미사'를 창설했다. 샤첸리는 창설 과정에서 국민정부 교육부에 승인을 신청해 전문 처소년 문화단체로 승인받음으로서 당국이 또다시 정간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창설식에서 " 개미는 작은 동물이고 힘이 약하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해 똘똘 뭉쳐 자신을 희생하고 적과 목숨을 건 투쟁을 할 수 있으니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대중집회에서 연설할 때 늘 개미 정신을 갖출 것을 호소하며 "살아있는 개미가 되라.", "개미처럼 단결하여 분투하라."고 외쳤다. 개미사는 곧 항일 구국운동단체 중 유명한 대중단체가 되었다.

개미사는 <개미사의 길>이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곡은 샤첸리가 작사하고 당시 중국 유명 작곡가 황쯔(黄自)가 작곡한 노래로,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개미는 무리를 사랑하는 작은 벌레이고, 개미는 집단을 조직하는 대중이다.
우리는 모두 개미이지, 책을 먹어도 쓸모가 없는 좀벌레가 아니다.
광명과 어둠이 맞서 싸우는 참호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는 모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미의 정신으로 새로운 문화의 씨를 파종하여, 신세계의 광명을 더욱 빛나고 선명하게 하자.
일어나라, 개미들이여, 모두 일어나라, 개미들이여, 자유평등의 선봉에 서라!

샤첸리는 개미사에서 집행위원회 집행위원을 맡는 한편 독서회와 시사연구회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1934년 초, 그는 중국 공산당 외곽조직인 '소련의 벗'사에 참여했으며 쉬더량, 리보룽, 장수범(杨修范), 장나이치 등과 함께 '소련의 벗' 소조를 조직했다.

1935년 일제가 화북분리공작을 벌이자, 중국 각지에서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 때 중국 공산당은 항일 구국을 위해 항일민족 통일전선을 수립하자고 외치고 전국 인민들에게 내전 종식을 호소했다. 상하이에서 공산당의 이같은 주장을 접한 샤첸리는 중국 공산당이 항일 구국의 영도세력이라고 판단하고 그해 12월에 <생활지식> 간행물을 창간해 공산당의 항일구국 주장을 적극 홍보했다.

2.2. 구국회의 7군자

1935년 12월 9일, 베이징에서 12.9 운동이 발발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항일 시위가 전개되었고 항일 구국 조직에 잇달아 창설되었다. 같은 해 12월 21일, 스량 등은 상하이 서찬로 기독교 청년회에서 대회를 열고 상하이 여성계 성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마상백(马相伯). 선쥔루, 쩌우타오펀, 타오싱즈(陶行知), 왕자오스, 장나이치, 리궁푸 등이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를 개최했다. 여기에 상하이 노동자들이 항일 파업을 벌였고 교수와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벌였고 신문계는 항일 정신을 부추겼다. 샤첸리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하고 1936년 2월 9일 상하이 직업계 구국회를 설립해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36년 1월 28일, 상하이 각계 집회가 개최한 "송후항전(淞沪抗战) 4주기 대회"에서는 선쥔루, 쩌우타오펀, 샤첸리, 리궁푸, 타오싱즈, 장나이치 등 전국 20여개 성, 시와 60여개 구국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이후 5월 31일 상하이에서 대표 대회가 열려 전국 각계 구국 연합회를 결성해 쑹칭링, 마상백, 선쥔루, 왕자오스, 허샹닝(何香凝)이 대표를 맡았다. 전국각계 국국연합회의 주요 문서 작서에 참여한 샤첸리는 <구망정보>, <직업계 구국회보>, <생활지식> 등의 신문을 통해 잇달아 글을 올려 구국회의 주장을 선전했다. 또한 각종 군중 집회에서 격양된 연설을 발표해 각계 인사들이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고 내전을 종식할 것을 호소하며 일치단결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적극 뛰어들 것을 청원했다.

1936년 7월, 샤첸리, 선쥔루, 장나이치, 스량, 펑원잉(彭文应) 등 5명은 전국 각계 구국회를 대표해 국민당 5기 2중전회에 청원서를 보내 즉시 대일 항전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이들은 난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구국회의 항전 주장을 널리 알리고 난징에 있는 각지의 인사과 접촉하여 그들을 항일 투쟁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 전국 각계 구국회는 7월 15일 선쥔루, 장나이치, 타오싱즈, 쩌우타오펀 등 4인이 작성한 <단결하여 모멸을 막는 몇 가지 기본 조건과 최소한 요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샤첸리는 <생활지식>에서 이 성명서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아직 일제에 대항할 때가 아니며 공산당 토벌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국민정부는 구국회의 연공항일 주장은 공산당에게 속았거나 공산당과 야합한 자들의 책동이라고 판단해 강경 대응에 나섰다. 1936년 11월 22일 밤, 국민당 특무는 전국 각계 구국회의 선쥔루, 장나이치, 쩌우타오펀, 왕자오스, 리궁푸, 샤첸리, 스량 등 7명을 체포했다. 11월 24일, 전국 각계 구국회는 <선쥔루 등 지도자의 무고한 체포를 구원하기 위한 긴급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긴급 전보를 보냈다. 또한 11월 27일에는 '일곱 당수의 무고한 체포, 고발에 대해 당국 및 전국 인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해 구국회에 대한 국민정부의 모함을 반박하고 구국회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쑹칭링은 11월 26일 성명서를 발표해 국민정부가 애국 지도자들을 체포했다고 항의했다. 전국 각지의 구국회와 애국인사들도 잇달아 성명과 통전을 발표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7군자'를 즉각 석방할 것을 국민정부에게 요구했다. 중국 공산당도 항의했고 해외 화교들도 국민당에게 항의서를 보냈다. 심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 존 듀이 등 해외의 저명인사들도 국민당을 비판했다. 국민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했으나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발발한 후 공산당과 타협하기로 결정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진 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7월 31일 '7군자'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샤첸리는 상하이 직업계 구망협회의 상무이사 겸 비서장을 맡았고 <구망주간> 편집장, <국민> 주간지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소련 혁명 20주년 기념과 우리의 투쟁' 등 여러 글을 발표했다.

2.3. 중일전쟁 시기

1937년 말, 상하이와 난징이 연이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구국회 책임자 선쥔루, 쩌우타오펀, 샤첸리는 우한으로 철수했다. 그들은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항일 정세를 연구하고 신문지를 창간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선전했다. 또한 베이징, 천진,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우한으로 피신한 청년들을 접대하고 팔로군 사무소에 소개하거나 항일 공작에 투입시켰다. '개미사'의 많은 직원들도 우한에 도착해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현지의 직업계 청년들과 연락하여 <우한 개미사>를 조직했는데, 그 규모가 4만 500명에 달했다. 샤첸리는 우한에 머무는 동안 구국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기금위원회를 조직하여 매주 월요일마다 한 편의 문장을 작성해 항일 형세를 논했고 정세 지도를 첨부했다. 또한 그는 자주 군중대회를 열어 항일 구국정신을 선전했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10월 우한이 함락되었다. 이에 샤첸리는 리궁푸, 장나이치 등 구국회의 많은 중견 인사들과 함께 우한에서 충칭으로 피신했다. 그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항전 정신을 견지하고 항복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주운동에 참가했다. 국민당이 국민참정회를 조직했을 때, 그는 국민참정회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선쥔루 등의 업무를 도왔고 선쥔루가 참정회에 보낼 제안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또한 선쥔루, 쩌우타오펀이 주도한 헌정운동에 참여했으며 국민당이 제시한 헌법 초안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총통의 권한 남용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니 위안스카이 독재의 재연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41년 3월, 중국 민주정단 동맹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4년 9월, 민주정단동맹은 충칭에서 전국대표대회를 열고 '중국민주연맹'으로 개칭하였고, 샤첸리는 구국회의 많은 회원들과 함께 민주연맹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중국 민주연맹은 '항일 마지막 단계의 정추주장'을 발표해 국민당 일당 독재를 즉각 종식시키고 각 당파의 연정을 수립하여 민주정치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발표에 대해 "우리는 연맹 내부에서 중국 공산당의 주장을 관철하고 연맹을 중국 공산당에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샤첸리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민주연맹 인사로 활동했다. 그는 국제 우호기업인 루이-엘리자베스에서 중국 공업협력협회원으로 일하면서 구국회 동지들과 함께 기계 공장을 설립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중국경제사업 협회를 설립했고 선쥔루 등과 함께 일했다.

2.4. 국공내전 시기

중일전쟁이 끝난 후, 샤첸리는 1945년 12월 충칭에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1945년 겨울에 열린 구국회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구국회 회의에서 단체 명칭을 중국 인민구국회롤 바꾸고 새로운 정치강령을 채택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상해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그는 변호사로서 상하이 법상 수전노조와 백화점 노조 등 여러 노조와 회사들의 법률 고문직을 맡았다. 또한 중국 인민구국회의 강령과 규약에 근거해 인민구국회 상하이 조직을 창설했으며, 먀서륜(马叙伦), 린한다(林汉达) 등과 함께 각 당, 각 노동조합, 각 교육단체가 참여하는 '상하이 인민단체 연합회'를 발족했다.

1946년 5월,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난징에 주재하면서 상하이에 사무소를 설치하여 당의 통일전선사업과 대 화둥지역 내 공산당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해 6월 말, 국민당과 공산당의내전이 발발했다. 1946년 11월, 국민당은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민주연맹은 선쥔루, 샤첸리, 스량 등이 공동으로 작성한 성명서를 신문에 게재해 국민당의 내전 행위를 비판하고 국민당이 개최한 국민대표대회는 결의에 위배된다고 규탄했다. 1947년 5월, 중국 인민구국회 제1기 2중전회가 상하이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통과한 '중국인민구국회 제1차 제2차 중앙전회 선언'은 "앞으로도 국내 민주정단과 독립, 평화, 민주의 조기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샤첸리는 이 회의에서 이 선언에 적극 찬성했다.

1947년 10월 27일, 국민정부는 민주연맹을 불법단체로 선포하고 해산을 강요하고 민주연맹 인사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각 민주당 지도부는 잇달아 국민당 통치지역을 떠나 홍콩으로 향했다. 선쥔루와 샤첸리는 11월 상하이를 극비리에 떠낫고 중국 인민구국회 본부는 홍콩으로 옮겨졌다. 1948년 9월, 중국 공산당의 초청을 받은 선쥔루, 궈모뤄, 장보쥔 등이 옌안으로 향했고, 샤첸리가 뒤를 이어 공산당 해방구로 향했다. 그들은 하얼빈에 도착한 후 민주연맹과 중국인민 구국회의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옹호하고, 신민주주의가 곧 인민민주혁명의 길을 걷는 것임을 표명했다. 11월 16일에는 샤첸리 등이 시국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해 민주주의는 독재 통치집단을 완전히 파괴한 후에야 보장을 받을 수 있으며 내전의 근원을 단호히 제거하지 않으면 평화의 장벽을 제거할 수 없다며 국민당을 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선언했다.

1949년 2월 25일, 샤첸리 등 민주인사들은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6월에 구국회의 다른 책임자들과 함께 신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8월에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본회의 연설에서 14년간의 구국회 투쟁 과정을 되돌아보며 신정치협상회의 결의를 강력히 옹호하고 공동강령 실현을 다짐했고 진심으로 신중국의 탄생을 환호한다고 밝혔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샤첸리는 중앙재경위원회 제6사무청 부주임, 중앙인민정부무역부 부부장, 지방공업부 부장, 경공업부장, 식량부장, 중화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비서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그동안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 문화대혁명 등 여러 정치적 격변이 있었지만, 그는 조용히 자신의 직무에 전념해 이를 별 탈없이 넘겼다. 문화대혁명 종식 후, 그는 1980년 8월부터 1982년까지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82년 4월 26일, 샤첸리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81세.

3. 작품

  • <7인의 옥>
  • <결혼, 자녀, 계승>
  • <항전과 민중운동>

4. 참고 문헌


[1] 태어난 날짜는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다. [2] 후에 사결(沙洁)로 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