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2654> 총재정부 의장 (1795~1799)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장프랑수아 뢰벨 | 루이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 폴 바라스 |
제4대 | 제5대 | 제6대 |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장프랑수아 뢰벨 | 폴 바라스 |
제7대 | 제8대 | 제9대 |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 루이제롬 고이에 |
통령 (1799~1804) | ||
제1통령 | 제2통령 | 제3통령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 | 샤를프랑수아 르브룅 |
프랑크 ·
서프랑크 ·
왕국 제1공화국 · 제국 · 7월 왕정 · 제2·3·4·5공화국 |
<colbgcolor=#002654><colcolor=#fff> 프랑스 제38대 국민공회 의장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Louis Antoine de Saint-Ju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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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 앙투안 레옹 플로렐 드 생쥐스트 Louis Antoine Léon Florelle de Saint-Just[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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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7년 8월 25일 | ||
프랑스 왕국 니에브르주 데시즈 | |||
사망 | 1794년 7월 28일 (향년 26세) | ||
프랑스 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 |||
국적 |
프랑스 왕국 (1758~1792) 프랑스 제1공화국 (1792~1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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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38대 국민공회 의장 | ||
1794년 2월 19일 ~ 1794년 3월 6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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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2654><colcolor=#fff> 묘소 | 에란시스 묘지 | |
부모 |
아버지 루이 장 드 생쥐스트 드 리슈부르 어머니 마리 안 로비노 |
||
형제자매 | 1남2녀 중 장남 | ||
학력 |
오라토리오파 학원 (
졸업) 랭스 대학교 ( 법학 / 학사) |
||
직업 | 정치인 | ||
종교 | 이신론 | ||
최종 당적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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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시기의 혁명가, 정치인.2. 생애
1767년 프랑스 니에브르주 데시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장 드 생쥐스트 드 리슈부르는 농민 출신으로 기사 칭호를 받은 경기병대 대위였으며, 어머니 마리 안 로비노는 데시즈의 공증인인 레오나르 로비노의 딸이었다. 총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으며, 1768년과 1769년에 각각 태어난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어린 시절을 베르누이유 지방의 성직자였던 큰아버지 앙투안 로비노와 함께 보냈고, 1776년에 부모와 함께 피카르디엔주 브레란크르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주 1년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1785년 수아송의 오라토리오파 학원 교육과정을 마쳤고, 졸업 직후 왕실공증인의 따님과 사랑에 빠졌으나 상대 집안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남성과의 정략 결혼을 강행하는 모습들을 봐오며 크고 작은 실랑이를 한 끝에 파리로 도망치듯 떠나게됐다. 그 이후 행적을 보면 감화원에 1786년부터 1787년 3월까지 수감이 된적도 있었고, 동년 10월 랭스의 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년도 채 안 되어 법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수아송에서 검사 서기로 취직해 일하던 중 22세의 젊은 나이에 ' 바티칸의 오르간(Organt au Vatican)'이라는, 다소 외설적인 내용의 사회 풍자 서적을 비공식적인 경로로 출판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책은 당시 왕정 프랑스의 전통과 국왕의 권위, 가톨릭 교회의 종교 체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목적으로 쓰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불온서적 출간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반체제 분자로 몰렸고, 졸지에 당국 관계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국민위병에 참여했으며, 내부 선거를 통해 지휘관으로 선출됐다. 이후 혁명 정파의 주도로 구성된 프랑스 국민공회의 의원으로도 선출되어 국민의 대표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왕정 타파를 외치며 급진적인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 자코뱅파에 합류하였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손잡고 자코뱅파의 지도부에서 서슬퍼런 활약을 펼쳤다. 혁명정부 산하에서 공안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한편 파견의원 직책을 맡아 각 지방을 순시하기도 했다. 이때의 나이가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대표적인 급진파 공화주의자로 국왕 루이 16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벌인 투표에서도 그를 처형해야만 한다는 논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펼쳤으며, 이와 관련한 연설도 했다. 그러나 점차 혁명정부 체제를 하루빨리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그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반대파 제거에 동참하기 시작했는데, 과격하고 급진적인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왕당파 인사들은 물론이고 온건 혁명론자들인 지롱드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적극 관여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와 절친한 사이이자 그의 정치적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공포정치의 일선에 나서며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단두대와 공포정치를 내세운 혁명 독재에 점점 피로감을 느낀 반대파와 시민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을 계기로 실각하여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체포된 뒤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될 당시의 나이는 26세. 그야말로 한순간에 타오르다 꺼져버린 삶을 산 셈이다.
3. 평가
프랑스 혁명 시기의 가장 급진적이었던 공화파 혁명가들 중 한 명이다. 실제로 공화국 건설을 위한 혁명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혁명을 함께 성공시킨 동지들 중 일부를 "이견을 보인다."는 이유로 반혁명 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하지만 " 혁명이라는 과격한 사회 변화를 이루어놓고, 그것을 빠르게 뿌리내려야 한다."는 조바심 탓에 영락없는 독재 정치인으로 변질되었으며, 그로 인해 발목 잡혀 쓰러진 인물이다. 절대왕정을 타도한 혁명이 또 다른 절대권력 체제를 불러온다는 역설을 몸소 증명한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흔히 프랑스 혁명기의 냉혹한 혁명가로 로베스피에르만 알고 있지, 더 무섭고 더 차가운 인물이 그 뒤에 있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20대 초반에 루이 16세 처형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실각해 27세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혁명이론가 생쥐스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젊음과 천재성에 대한 인류 보편의 동경심과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잔인함이 합쳐져 그의 인생은 완전히 전설로 물들어 있다. 미소년이라느니, 처형장에 끌려갈 때도 냉정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24세에 이미 ‘프랑스의 헌법 정신과 혁명 정신’(1791년)이라는 책을 썼고, 법정 연령이 되기를 1년 기다려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의회 연단에서 행한 연설이 그 유명한 루이 16세 논고장이다. “누구도 무죄로 군림할 수 없다(No one can reign innocently.).”라는 마지막 문장이 역사에 길이 남아 있을 정도다. ‘군림한다’는 것이 벌써 유죄라는 것, 그러니까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죄라는, 도저히 논박 불가능한 무서운 구절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던 이 젊은 의원의 발언이 자코뱅의 공식 입장이 되어 결국 석 달 뒤(1793년 1월 21일) 왕은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생쥐스트는 왕의 처형 근거를 ‘사회계약론’에서 찾았다.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법이란 사회계약의 결과다. 따라서 법은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사회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이, 법의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법의 밖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계약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효력이 발생하는 법 조항을 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왕에게는 그 어떤 사회체제의 법도 적용할 수 없고, 다만 사회 전체가 적으로 간주해야 할 절대적 적일 뿐이다.
생쥐스트는 왕이 사회 전체와 같은 무게의 대칭 관계가 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권리는 개인적인 권리다”라는 말로 왕에 대한 개인적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왕에 대한 처리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 동의가 없더라도 아무나 루이 16세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왕의 처형 후 공포정치는 극에 달하여 밀고(密告)가 시민의 의무이고, 단두대는 덕의 제단이 되었다. 혁명에 열의를 표시하지 않은 사람, 혁명에 반대하는 언사를 한 사람, 혁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하다못해 ‘베르됭의 처녀들’(1792년 베르됭에 진주한 프러시아군을 환대한 처녀들)까지 희생되었다. 단두대도 총알도 모자라 나중에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익사형(구멍 뚫은 배에 사형수들을 실어 강물에 띄우는 방법)이 권장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목이 ‘기왓장 날듯 난’ 시기였다.
차츰 국민 전체가 단두대의 처형에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의회 승인 없이 의원을 기소할 권리를 요구한 후부터 의원들은 전전긍긍했다. 불안감을 느낀 반대파 의원들이 테르미도르(지금 달력으로는 7월) 8일,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체포 동의안을 가결했다. 즉각 체포된 두 사람은 바로 다음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소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불리는 이날로 2년간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 (중략)
'레미제라블’의 시가전은 대혁명 이후 40여 년이 지난 1830년대 사건으로 ‘혁명’이라는 명칭도 얻지 못한 일개 소요 사태였다. 그 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공포정치 이후 4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민중의 삶은 비참하고, 정치는 민주적 공화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 소설(영화)의 교훈일 것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두 번의 제정(帝政), 두 번의 왕정, 그리고 가혹한 학살 사건을 곁들인 세 번의 혁명을 80여 년간 겪고 난 뒤 1870년에 와서야 현재 체제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24세에 이미 ‘프랑스의 헌법 정신과 혁명 정신’(1791년)이라는 책을 썼고, 법정 연령이 되기를 1년 기다려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의회 연단에서 행한 연설이 그 유명한 루이 16세 논고장이다. “누구도 무죄로 군림할 수 없다(No one can reign innocently.).”라는 마지막 문장이 역사에 길이 남아 있을 정도다. ‘군림한다’는 것이 벌써 유죄라는 것, 그러니까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죄라는, 도저히 논박 불가능한 무서운 구절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던 이 젊은 의원의 발언이 자코뱅의 공식 입장이 되어 결국 석 달 뒤(1793년 1월 21일) 왕은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생쥐스트는 왕의 처형 근거를 ‘사회계약론’에서 찾았다.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법이란 사회계약의 결과다. 따라서 법은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사회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이, 법의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법의 밖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계약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효력이 발생하는 법 조항을 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왕에게는 그 어떤 사회체제의 법도 적용할 수 없고, 다만 사회 전체가 적으로 간주해야 할 절대적 적일 뿐이다.
생쥐스트는 왕이 사회 전체와 같은 무게의 대칭 관계가 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권리는 개인적인 권리다”라는 말로 왕에 대한 개인적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왕에 대한 처리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 동의가 없더라도 아무나 루이 16세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왕의 처형 후 공포정치는 극에 달하여 밀고(密告)가 시민의 의무이고, 단두대는 덕의 제단이 되었다. 혁명에 열의를 표시하지 않은 사람, 혁명에 반대하는 언사를 한 사람, 혁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하다못해 ‘베르됭의 처녀들’(1792년 베르됭에 진주한 프러시아군을 환대한 처녀들)까지 희생되었다. 단두대도 총알도 모자라 나중에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익사형(구멍 뚫은 배에 사형수들을 실어 강물에 띄우는 방법)이 권장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목이 ‘기왓장 날듯 난’ 시기였다.
차츰 국민 전체가 단두대의 처형에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의회 승인 없이 의원을 기소할 권리를 요구한 후부터 의원들은 전전긍긍했다. 불안감을 느낀 반대파 의원들이 테르미도르(지금 달력으로는 7월) 8일,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체포 동의안을 가결했다. 즉각 체포된 두 사람은 바로 다음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소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불리는 이날로 2년간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 (중략)
'레미제라블’의 시가전은 대혁명 이후 40여 년이 지난 1830년대 사건으로 ‘혁명’이라는 명칭도 얻지 못한 일개 소요 사태였다. 그 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공포정치 이후 4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민중의 삶은 비참하고, 정치는 민주적 공화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 소설(영화)의 교훈일 것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두 번의 제정(帝政), 두 번의 왕정, 그리고 가혹한 학살 사건을 곁들인 세 번의 혁명을 80여 년간 겪고 난 뒤 1870년에 와서야 현재 체제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실제로 제법 잘생긴 외모였지만 그의 입에서는 주로 반대파에 대한 처벌이 나왔기 때문에 별명이 공포의 대천사(l’archange de la terreur)였다. 죽을 때까지 결혼을 안 해서 총각이었는데, 훗날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를 숙청한 이들이 "저딴 금욕주의 총각들의 히스테리 때문에 혁명이 과격해진다."고 국민공회 의원의 자격을 나이 많은 유부남으로 제한해버렸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생쥐스트는 의외로 어렸을 때, 성의 해방을 주장한 책을 쓴 적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금욕주의자로 돌아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첫사랑과 큰 이별을 겪었던게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사건으로 꽤 방황했으며, 26세에 처형될때까지 미혼으로 살았다.
4. 어록
빵은 인민의 권리이다.
모든 군주는 반역자요 찬탈자다.
국가를 재수립하는 것은 오로지 산더미처럼 수북히 쌓인 시체들 위에서만 가능하다.
국민공회의 시민 여러분, 대체 누가 우리들더러 잔혹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혁명재판소는 올해 300명의 반동분자 쓰레기들을 처단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더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재판소는 그동안 한명도 사형시킨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유럽의 군주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놈들의 폭정에 지금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동지들,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됩니다!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다.
혁명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
공포정치 시기.
공포정치 시기.
5. 여담
- 그의 나이 19세 때 사귀던 여성이 집안의 강요로 정략결혼하자 이에 크게 낙담해 집에서 패물을 훔쳐 가출했다가 돈을 금방 다 쓰고 어머니의 신고로 소년원에 들어간 전적이 있다. 상대 여성도 정략결혼한 남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생쥐스트에게 계속 미련을 가졌는데, 두 사람은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다 결국 주변의 비난과 현실적인 문제로 생쥐스트가 그녀를 단념하면서 완전히 헤어졌다.
6. 각종 매체에서
일반 오덕들 사이에서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의 화려한 등장으로 인해 잘 알려지게 되었다.[5] 만화에서는 예뻤지만 앞에서 언급한 연설 외의 큰 활약은 없었던 데에 비해서 애니메이션에서는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여기저기서 테러를 저지르고 다닌다. 같은 공화주의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였던 베르나르는 생쥐스트와 안면이 있지만, 극단적인 생쥐스트의 성향으로 인해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한번은 혁명 전 시위를 지켜보던 오스칼을 기습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군중들 한가운데서 말 위에 있던 오스칼을 끌어내 끌고 갈 정도로 대담한 편이다. 혁명 후 루이 16세의 사형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퇴장한다.[6]
다르지만 위 애니메이션의 원작자의 또다른 작품인 디어 브라더에서 인물 중의 별명이 생쥐스트가 있다. 물론 남장여자이지만.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는 서브 미션을 하면 사람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팔던 것이 아르노에 의해 발견된다. 후에는 아르노에게 그 옷을 샀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그 의뢰인에 의하여 의원 자격을 박탈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인 아너 해링턴 시리즈에서 18세기 프랑스를 모티브로 한 헤이븐 인민공화국의 인물로 등장한다. 순양전함 나이키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헤이븐의 비밀경찰인 국가안전부 차관으로 로버트 피에르의 측근이기도 하다. 피에르를 견제하는 해리스 대통령을 돕는 상관인 국가안전부 장관 콘스탄스 파머 레비를 암살했으며, 해리스 대통령이 암살되고 피에르가 권력을 잡자 코델리아 랜섬과 함께 실질적인 삼두정 체제를 구축한다. 그러나 맨티코어 왕국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전을 거두어 전쟁영웅이 된 에스더 맥퀸 국방장관을 끊임없이 경계했으며, 이는 결국 맥퀸의 정치적 야심을 자극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에스더 맥퀸의 쿠데타가 벌어져 피에르와 그의 측근 대다수가 사망하자 혼자 살아남아 대통령직을 승계받는다. 생쥐스트는 맥퀸이 장악한 수도에 핵폭탄을 쏴 맥퀸과 그녀의 반란군을 몽땅 날려버리면서 반란을 진압하고, 맨티코어와도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불신해 비밀경찰을 이용해서 군부 인사들을 숙청했고 결국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주동자 장군에 의해 머리에 총을 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한국 만화 파라다이스에서는 이 사람에게서[7] 외모와 이름을 따온듯한 생쥐스트라는 프랑스 출신 초능력자(에스퍼)가 등장하나 모티브가 된 생쥐스트처럼 극단적인 인물은 아니며 꽤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아군이다. 아군 소속 에스퍼들 중에서도 강한 에스퍼이기에 큰 활약을 했으나 최종보스 쥴리어스를 당해내는데는 실패해 결국 패배하고 사망한다. 허나 사후에도 쥴리어스가 패배해 엿먹는데 일조한다.
대체역사물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에서는 역사대로 대표적 극단파 공화주의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사냥개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여기선 바뀐 역사로 인해 마라가 상퀼로트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로베스피에르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고 오귀스트 로베스피에르에게 구명을 청하지만 형이 죽도록 방치해버린 그를 오귀스트가 구해줄리가 없었고 결국 혁명재판소로 끌려가는것으로 등장을 마친다.[8]
대체역사물 단두대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로베스피에르를 숭배한다. 로마 공화국을 부활시키며 생쥐스트가 주장한 이상적인 독재관의 역할[9]을 완벽히 수행하고, 완벽한 독재관은 자신조차 혐오해 자멸한다는 이상론을 그대로 실행해낸 데다가, 그렇게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해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 심지어 적이자 가장 강력한 반동 세력인 합스부르크 제국마저 진보[10]시키는 모습을 보며 아예 장장 2천 년 가까이 유럽을 지배해온 구시대의 윤리였던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신시대의 기준이라고 믿게 된다. 사실상 생쥐스트의 혁명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독재관으로서 대체 불가능한 마스터피스[11]라 앞으로도 그를 숭배할 듯하다. 생쥐스트에게 독재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그 자체이자 신앙의 대상으로, 군주 숭배에 익숙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보기에도 기괴하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머리 위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주어 바로 납득시켜버린다. 사실 마리 폐왕비 입장에선 생쥐스트나, 주인공의 정부가 되기 위해 표면상 생쥐스트랑 혼약을 허락받으러 온[12] 친딸이나 똑같아 보일 것이다. 당수 바뵈프의 의뢰로 로베스피에르의 대필가가 되어 "계급투쟁"을 저술하게 된다. 누가 봐도 로베스피에르 추종자인 생쥐스트가 선택된 이유는 로베스피에르의 저서임을 은연중에 암시하여 책이 무시되지 않기 위함이다. 즉, 눈가리고 아웅. 한때 바뵈프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견해차로 싸우지만, 로베스피에르를 인정한 바뵈프의 항복으로 도로 돈독해진다.
1989년작 프랑스 영화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려진 생 쥐스트의 처형.
이노센트(만화) 2부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게이 연인으로 등장.
[1]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이다.
[2]
현대 독일, 대한민국의 방어적 민주주의는 생쥐스트의 급진 사상에 비하면 매우 순한 맛이다.
[3]
이것만 보면 루이 16세 죽이겠다고 혈안이 된 인간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당시 상황은 루이가 유죄든가, 혁명이 유죄든가 둘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처형 계기가 된
바렌 사건 자체가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도망가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혁명 세력을 반역자들로 때려잡기 위한 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행범으로 강제 송환당한 상황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루이가 무죄라고 한다는 건,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반역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대역죄인들이라고 스스로 시인하는 거와 다를 바 없었다. 저 말대로 루이가 유죄가 아니면 혁명이 유죄가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국민회의는 적당히 무마하려 했으나 소식을 들은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사형 집행까지 가버렸다. 당시 프랑스 법 기준으로도 국내 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인 반역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일단 유죄는 확정이었고, 사형 집행 여부가 재판의 관건이었다.
[4]
실제로는 시민 루이 카페로 강등시킨뒤 반역죄로 처형했다.
[5]
작중에서의 용모가
오스칼 급의 멋쟁이라서 그 정도의 외모를 기대하고 실제 초상화를 찾아본 많은 덕후들이 배신감을 느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6]
마지막의 내레이션에서 이후에 처형되었다고 언급된다.
[7]
혹은 창작물의 생쥐스트 중 제법 잘 알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생쥐스트에게서.
[8]
생사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혁명재판소로 간다는 건 보통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죽음으로써 스토리에서 퇴장한 것으로 보인다.
[9]
왕공과 귀족, 성직자 계층까지 모든 반동들까지 전향, 반동의 모략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혁명 수호, 인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인민의 의지를 존중하며 적절한 가이드 제공 등등... 신생 로마 공화국의 국체에 대한 의견이 갈리자 의회 대표들이 나란히 자문받으러 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사회계약론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10]
제한적이지만, 무려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가 일반 백성으로 확대된다. 본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는
선거후로 대표되는 귀족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계급에만 허락되는 정치 행위였다는 걸 생각하면 못 해도
보나파르트주의 수준까진 되었다 할 정도로 급진적인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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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는 물론 인류 역사를 전부 통틀어서도 찾기 힘들다. 단순히 능력이나 업적의 문제가 아니라, 독재관은 위임된 절대권력을 오직 혁명과 인민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는데, 작중 주인공만큼 안심하고 독재관을 맡길만한 인물은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조지 워싱턴 정도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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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권에서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을 텐데 이건
당대 프랑스 궁중문화를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재미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묘사되니 소설을 읽자. 다만
마리 폐공주의 결단은
백척간두에 처한 가문의 연명을 위한 안배도 있다. 앙투아네트도 이 점 때문에 결국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