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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colbgcolor=#E1D8CD><colcolor=#000000> 파르마 공작부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ipessa Maria Teresa di Savoia
파일:Maria Teresa of Savoy.Duchess of Parma.jpg
이름 마리아 테레사 페르디난다 펠리치타 가에타나 피아
(Maria Teresa Ferdinanda Felicita Gaetana Pia)
출생 1803년 9월 19일
교황령 로마 콜론나 궁전
사망 1879년 7월 16일 (향년 75세)
이탈리아 왕국 비냘리 산 마르티노
배우자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 (1820년 결혼)
자녀 루이사, 카를로 3세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공작
형제 마리아 베아트리체, 마리아 안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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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차녀이자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황후 마리아 아나의 쌍둥이 언니이다.

2. 생애

1803년 9월 19일 로마의 콜론나 궁전[1]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와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차녀로 태어났다. 쌍둥이 동생 마리아 안나와 함께 비오 7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1819년에 루카의 카를로 루도비코 공자와 약혼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1820년 8월에 토리노에서 대리 결혼식을 진행하고 루카 공국으로 넘어가 궁정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선남선녀로 유명했으나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사는 내향적이고 종교적인 반면 카를로 루도비코는 활발하고 쾌락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노는 걸 좋아하고 계속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을 경멸했다.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딸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1824년에 시어머니인 루카 여공작 마리아 루이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카를로 루도비코는 루카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통치에 관심이 없었기에 관료들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여행에 동참해야 했던 마리아 테레사는 맞지 않는 여행에 매우 힘들어했다. 결국 1833년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다. 마리아 테레사는 루카에 별장을 짓고 종교에 몰두하며 은둔자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1847년 12월 17일, 파르마 여공작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면서 빈 회의에 따라 카를로 루도비코는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로 즉위했다.[2] 마리아 테레사는 파르마 공작부인이 되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1848년 혁명으로 인해 카를로 2세는 1849년에 아들에게 공작위를 양위했다. 불행히도 공작위를 이어받은 카를로 3세는 즉위 5년만에 암살당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사는 아들이 매장된 비아레조로 이주했다.

손자 로베르토 1세가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이후 파르마 대공국은 친정[3]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합병되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 모든 걸 지켜본 마리아 테레사는 독실한 삶을 이어나가다 1879년 뇌동맥경화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of Savoy)
<colbgcolor=#fff3e4,#331c00>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Victor Emmanuel I)
<colbgcolor=#ffffe4,#323300>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Victor Amadeus III)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Charles Emmanuel III)
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릭세나
(Polyxena of Hesse-Rotenburg)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Maria Antonia Ferdinanda of Spain)
펠리페 5세
(Philip V)
엘리자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of Austria-Este)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Ferdinand Karl, Archduke of Austria-Este)
프란츠 1세
(Francis I)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마사 여공작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Maria Beatrice d'Este, Duchess of Massa)
모데나 공작 에르콜레 3세 데스테
(Ercole III d'Este, Duke of Modena)
마사 여공작 마리아 테레사 치보말라스피나
(Maria Teresa Cybo-Malaspina, Duchess of Massa)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루이사 공녀
(Princess Luisa)
1821년 10월 29일 1823년 9월 8일
1남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Carlo III, Duke of Parma)
1823년 1월 14일 1854년 3월 27일 루이즈 다르투아 공주[4]
슬하 2남 2녀[5]

[1] 토리노가 아닌 로마에서 태어난 이유는 당시 사르데냐 왕국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본토인 피에몬테 프랑스에게 빼앗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부부가 로마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동생 카를로 펠리체 사르데냐로 보내고 본인은 이탈리아 반도 본토에 남아서 대 프랑스 전쟁을 이어나갔다. [2] 본래 카를로 2세의 아버지 루도비코 1세는 파르마의 공세자였다. 그러나 1802년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파르마 공국은 무너졌고, 루도비코 1세는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대공국에 세운 괴뢰국 에트루리아 왕국을 보상으로 받았다. 루도비코 1세 사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파르마 공국은 마땅히 카를로 2세에게 주어져야 했으나, 빈 회의의 결과 나폴레옹의 부인 마리 루이즈의 차지가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항의했으나 마리 루이즈 사후 파르마 공작위가 카를로 2세에게 간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대신 루카 공국을 받았다. [3] 다만 사보이아 가문은 당시 엄격한 살리카법을 적용해서 작은아버지 카를로 펠리체 사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위는 먼 친척인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물려받았다. [4]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딸로 샤를 10세의 친손녀. [5] 로베르토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