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폴란드 침공의 일부인 전투에 대한 내용은 바르샤바 전투(1939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바르샤바 전투 Bitwa Warszawska[폴]비스와 강의 기적(Cud nad Wisłą)이라고도 한다.] Варшавская битва[러] Варшавська битв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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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일부 | |
1920년 8월 12일 ~ 1920년 8월 25일[4] | |
장소 | |
폴란드 바르샤바 교외 | |
교전국 | |
폴란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
러시아 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SSR |
지휘관 |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타데우시 요르단로즈바도프스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유제프 할레르 폰 할렌부르크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볼레스와프 로야 프란치셰크 라트니크 레오나르트 스키에르스키 지그문트 지엘린스키 시몬 페틀류라 스타니슬라우 불라크발라호비치 |
레프 트로츠키 세르게이 카메네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하이크 브지시캰 니콜라이 솔로구프 아우구스트 코르크 알렉산드르 슈바예프 블라디미르 라자레비치 |
병력 | |
113,000-123,000명[5] | 104,000-140,000명 |
피해규모 | |
4,500명 전사 22,000명 부상 10,000명 실종 |
15,000-25,000명 전사 30,000명 부상 65,000-85,000명 포로 30,000-45,000명 억류[6] |
결과 | |
폴란드의 결정적인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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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교외에서 벌어진 폴란드[7]와 볼셰비키[8] 간의 전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최대의 전투였으며, 폴란드 측이 완승했다. 비스와 강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이 전투 한 방으로 폴란드는 전세를 뒤집고 다시 주도권을 잡아 반격을 개시하여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1920년 키예프 공세가 실패한 후 폴란드는 이후 붉은 군대의 역공에 밀려 8월 수도 바르샤바까지 후퇴해야 했다. 붉은 군대 공세의 선봉에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서부전선군이 있었다. 바르샤바 인근으로 진출한 서부전선군은 북쪽으로 공세를 펼쳤지만, 폴란드는 서부전선군의 약한 남쪽 측면을 공격하여 서부전선군을 포위섬멸했다. 서부전선군은 전사자만 2만 5천에 포로는 6만 5천이나 되는 큰 피해를 입고 전멸했다. 폴란드는 이후로도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승전으로 종결짓고 볼셰비키의 혁명 수출을 막아냈다.
2. 배경
1920년 6월 전선 | 1920년 8월 전선 |
1920년 8월 초 볼셰비키의 서부전선군은 벨라루스를 완전히 점령하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인근까지 깊숙히 진격했다. 남부 전선을 맡은 남서전선군의 진격은 상대적으로 더뎠지만 여기도 갈리치아의 중심도시 르비우 인근까지 진격했다. 국외의 관찰자들은 폴란드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보았고, 그것은 폴란드 지도부도 다르지 않아서 볼셰비키와 어떻게든 협상해서 진격을 멈추기 위해 애를 썼다. 7월 24일 폴란드의 빈첸티 비토스(Wincenty Witos) 내각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8월 10일 영국에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레프 카메네프는 명목상 폴란드의 독립과 민족자결을 보장하긴 했지만, 요구조건의 내용은 사실상 항복 내지는 폴란드의 무장해제에 가까운 것이었다.[10] 영국으로부터 내용을 전달받은 폴란드 정부는 사절단을 파견, 14일 이들은 투하쳅스키가 있는 민스크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폴란드와 국경분쟁을 빚던 주변국은 이 기회에 아예 폴란드를 멸망시키기 위해 폴란드로 병력과 물자의 반입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독일은 단치히 자유시의 사보타주를 사주하여 폴란드의 물자반입을 방해했으며,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가 자국을 경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그나마 폴란드와 혈맹에 가깝던 헝가리가 3만의 기병군단을 파병하려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립을 선언하여 그들의 이동을 막았다.
8월 초 폴란드는 이렇게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볼셰비키와 전쟁하여 획득한 영역은 거의 전부 잃어버렸고, 주변국은 볼셰비키의 손을 빌어 폴란드를 아예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폴란드를 식물국가로 전락시킬 요구조건을 내밀었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속 전쟁을 이어가 멸망시키려고 했다. 8월 12일, 바르샤바 전투는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2.1. 각 군대의 상황
2.1.1. 폴란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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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전선으로 향하는 바르샤바의 폴란드군 |
정말로 큰 문제는 병사들에게 지급할 무기가 너무나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키이우 공세를 비롯해 8월 전까지 당한 연이은 패배로 폴란드는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상실했다. 전황이 호전되고 서방의 원조물자가 쌓인 9월 1일 당시 폴란드군의 무기 수량은 대포 2,000문, 기관총 6,500정, 소총 43만 정이었다. 그러므로 8월 초에는 병사들에게 지급 가능한 총기 수량이 총 병력의 절반을 밑돌았을 것이다. 보급난은 일선에서 다수의 총포류를 혼용하여 더욱 해결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소총만 해도 독일제 마우저 소총, 러시아제 모신나강, 오스트리아제 만리허 소총, 프랑스제 르벨 M1886을 혼용했고, 기관총과 대포도 생산국가가 다양했다. 또한 군대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험없는 신병이 군대에 쏟아졌고, 자연스레 병력의 질은 열악해졌다. 그래서 9월 1일 당시 실제로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34만 8,284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전투병은 16만 2,83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59만 5,692명은 후방에 남아있었다. 심지어 군의 절반 가까이는 군화조차 지급받지 못할 지경이었고, 아예 곤봉과 낫[12] 같은 원시적 무기로 무장한 부대도 있었다.
다음은 폴란드군의 편제이다. 폴란드군은 크게 3개 전선군(북부, 중부, 남부)으로 조직되었지만, 이 중 남부전선군(사령관 바츠와프 이바시키에비츠)은 바르샤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제외한다.
- 북부전선군(사령관 유제프 할레르): 동프로이센 국경지대에서 남동쪽 뎀블린(Dęblin)까지 이르는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 제5군(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바르샤바 북쪽의 브크라(Wkra) 강[13] 유역과 모들린(Modlin)의 방어를 담당했다.
- 제1군(사령관 프란치셰크 라트니크): 바르샤바 북동쪽의 제그제(Zegrze)와 남동쪽의 카르체프(Karczew) 사이의 교외 지역 방어를 담당했다.
- 제2군(사령관 볼레스와프 로야[14]): 바르샤바 남동쪽의 카르체프와 뎀블린 사이의 비스와 강 도하지점을 강의 서편에서 방어했다.
- 중부전선군(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뎀블린과 브로디(Brody)[15] 사이에 주둔했다. 서부전선군의 남쪽 측면을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부대의 목적이었다.
- 제4군(사령관 레오나르트 스키에르스키): 남쪽 비에프시(Wieprz) 강[16] 서편의 뎀블린과 코츠크(Kock)를 잇는 지역에 주둔했다.
- 제3군(사령관 지그문트 지엘린스키): 코츠크와 브로디를 잇는 지역에 주둔했다.
바르샤바 외곽에서 폴란드군이 방어하는 사이, 비에프시 강 유역에서는 중부전선군이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지휘하는 2개 충격집단으로 개편되었다. 충격집단은 4군 소속 2개 보병사단 및 1개 산악보병사단, 3군 소속 2개 보병사단, 1개 기병여단으로 구성되었다. 바르샤바 전투에 투입된 폴란드군은 대포 500문, 기관총 1,780정, 전차, 장갑차 및 장갑열차 몇 대를 보유하였으며 2개 비행대가 배속되었다.
2.1.2. 붉은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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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노보모스콥스크의 제1기병군. |
볼셰비키의 폴란드 전선은 크게 북쪽(벨라루스와 폴란드 북부)을 맡은 서부전선군(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과 남쪽(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남부)을 맡은 남서전선군(사령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으로 나뉘었다. 서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모두 폴란드군처럼 명목상 병력에 비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예를 들어 1920년 10월 15일 서부전선군의 병력은 후방부대와 사령부 인원까지 싹 합쳐서 총 43만 1,591명에 달했는데, 시기상 차이가 나긴 하지만 8월 1일 서부전선군의 전투병은 13만 6,292명에 불과했다.
폴란드 영내로 깊숙히 진군하면서 서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간의 조율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는 거대한 폴레시에 습지와 폴란드 동부의 형편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필요할 때 서로 병력을 지원하기 대단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볼셰비키의 패인 중 하나가 된다.
다음은 서부전선군의 편제이다. 남서전선군은 바르샤바 공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 서부전선군(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 참모장 니콜라이 슈바르츠(Н. Н. Шварц), 정치장교 이바르 스밀가(И. Т. Смилга))
- 제3군(사령관 블라디미르 라자레비치)
- 제4군(사령관 알렉산드르 슈바예프)
- 제15군(사령관 아우구스트 코르크)
- 제16군(사령관 니콜라이 솔로구프)
- 모지르 집단(Мозырская группа)(사령관 티혼 흐베신(Т. С. Хвесин))
서부전선군은 대포 600문, 기관총 2,450정을 보유했다.
3. 작전 계획: 두 도박사의 오른손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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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전투 중 지도를 읽고 있는 피우수트스키 |
피우수트스키는 8월 5-6일 밤 사이 바르샤바의 벨베데르(Belweder) 궁에서 대담한 반격작전 계획안을 구상했다.[18] 작전의 첫 번째 단계는 비스와 강 서편으로 철수하여 바르샤바와 비에프시 강의 교두보를 방어하고, 그 동안 전략적 공세 이전을 위해 가용 사단의 1/4을 남쪽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유제프 할레르의 중부전선군 예하 3개 야전군 중 2개 야전군(1군과 2군)이 붉은 군대의 주공을 막는 사이, 나머지 1개 야전군(5군)은 모들린 요새 인근의 방어를 담당하다가 반격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서부전선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부대는 피우수트스키 자신이 직접 지휘할 2만 명 규모의 충격집단(Grupa Uderzeniowa)이었다. 남쪽 전선의 최정예 부대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바르샤바 남쪽의 비스와 강과 비에프시 강 사이의 삼각지대에 주둔했다가, 북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며 모지르 집단을 산산조각내어 서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접촉을 끊어버리고, 서부전선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예비대와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작전에 따르면 5군과 충격집단은 동프로이센 국경지대 근처에서 합류하여 서부전선군을 포위하기로 했다. 요약하자면, 바르샤바 북쪽에서 1군과 2군이 서부전선군의 주공을 받아내는 사이 5군과 충격집단이 "송곳니"가 되어 서부전선군을 고립시키고 포위섬멸하는 것이 피우수트스키의 작전안이었다.
투하쳅스키처럼 피우수트스키가 세운 작전 계획도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제안한 각 부대의 집결 지점은 원 위치에서 150km에서 250km나 떨어진 곳인데다, 부대 대부분은 이미 전선에 투입된 상태였다. 그리고 예정된 폴란드군의 재집결 지점은 모두 적군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거리 이내로 계획되었는데, 따라서 만일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참모진이 붉은 군대의 공세가 시작될 시점을 잘못 파악할 경우 반격 작전은 물론이고 각 전선이 모두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피우수트스키 자신도 회고록에서 스스로 '도박'이었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폴란드 측에게 붉은 군대를 30km 정도 후퇴시키는 전술적인 반격작전만 벌여 휴전협상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설 것을 제안했고, 폴란드군 참모총장 타데우시 요르단로즈바도프스키는 비에프시 강에서 붉은 군대의 전선을 깊이 돌파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피우수트스키는 단순히 적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용병력을 총동원하여 전황을 일거에 뒤집기를 원했다.
4. 전투
4.1. 1단계(붉은 군대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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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전투 1단계. 붉은 색이 붉은 군대, 초록색이 폴란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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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진과 회의 중인 5군 사령관 시코르스키 |
5군과 1군이 혈전을 벌이는 사이, 피우수트스키는 군직을 제외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것은 전황에 전념할 뿐만 아니라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2일부터 15일까지 그는 바르샤바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푸와비(Puławy)에 집결한 4군의 군부대를 방문하여 사기를 올렸다.
4.2. 2단계(북쪽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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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전투 2단계와 3단계 |
투하쳅스키는 상황을 너무나도 낙관한 나머지 실제로 전황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투하쳅스키가 주력을 투입한 바르샤바 북쪽에서 서부전선군은 이렇다할 저항없이 서진했다. 그동안 바르샤바 남쪽의 측면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와 다른 폴란드군 지휘관이 가장 두려워했던 세묜 부됸니의 제1기병군은 바르샤바로 이동하라는 총사령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대신 르비우로 진격했다.
라지민이 격전에 휩싸이자 북부전선군 사령관 할레르는 예정보다 일찍 반격을 개시하였다. 14일 5군은 장갑열차 2대에 얼마 안 되는 기갑전력까지 긁어모아 브크라 강을 도하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5군은 일일 30km 진격하면서 이미 전투로 탈진한 붉은 군대를 바르샤바에서 멀리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을 깊숙히 돌파하여 붉은 군대를 두 쪽으로 쪼개버렸다. 그 때문에 북쪽에서 기동하여 바르샤바를 포위하려는 서부전선군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서부전선군의 바르샤바 및 모들린 방면 진격은 15일 멈췄고, 1군은 기갑부대와 항공기까지 동원해 같은 날 라지민을 수복하여 사기를 드높였다.
4.3. 3단계(충격집단의 공세와 서부전선군의 포위섬멸)
1919-20년 전선 변화[21] | 1920년 8월 16일-26일 전투 진행도[22] |
18일 투하쳅스키는 퇴각 후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일선 부대에 명령이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심지어 아예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4군 예하 3기병군단(사령관 하이크 브지시캰)은 포모제(Pomorze) 방면으로 계속 서진하다가 폴란드군의 반격을 받고 26일 동프로이센으로 월경하여 그곳에 억류되었다. 서부전선군 부대 대부분은 민스크의 사령부와 연락이 끊기고 혼란에 휩싸였다. 일부 부대는 폴란드군에 맞서 싸우다가 괴멸되었고, 다른 부대는 계속 서진하다가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폴란드 충격집단은 붉은 군대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3군 소속으로 충격집단 최우익을 맡은 제1군단보병사단은 당대 폴란드의 최정예부대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이들은 원 주둔지인 루바르투프(Lubartów)[25]에서부터 하루에 21시간이나 걷는 강행군을 하고 두 번의 전투를 치르며 엿새만에 262km를 주파, 22일에 북동부 비아위스토크를 수복하여 소련 16군을 그들의 증원부대로부터 분리시키고 16군 패잔병 대부분을 포획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4군도 20일 동프로이센 국경 인근의 오스트로웽카까지 진격하여 포위망을 닫았다.
서부전선의 야전군 중 마지막까지 조직력을 유지한 것은 15군이었다. 15군은 서쪽으로 지나치게 진격한 4군의 퇴로를 보호했지만, 19일과 20일에 격파되어 다른 부대들처럼 패주했다. 21일을 끝으로 서부전선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일단락되었지만 이후로도 패잔병과의 전투는 벌어졌다.[26] 서부전선군을 완전히 전멸시킨 것은 31일이 되어서였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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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근방에서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붉은 군대 군기 |
폴란드군의 피해는 전사 4,500명, 부상 2만 2천명, 실종 1만명으로 역시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볼셰비키로부터 전쟁의 주도권을 뺏어올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의 서부전선에 거대한 공백을 만들어내었다. 볼셰비키는 이후로도 군대를 재건하여 수차례 폴란드군과 맞붙었지만 이전처럼 주도권을 되찾아오기는커녕 연달아 패배를 겪으며 일패도지했다. 게다가 8월 이후로는 폴란드군이 숫적으로도 오히려 우위를 누리면서 붉은 군대를 압박했다. 폴란드는 9월 네만 강 전투에서 붉은 군대를 한번 더 크게 쳐부쉈다. 양측은 1921년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의 우세로 전쟁을 종식했다.[28]
6. 기타
2017년 유네스코는 1920년 바르샤바 전투 기간에 작성된 폴란드의 무선 정보 문서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 문서는 "무선 감시의 사용 및 적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새로운 방법에 관한 최초의 증거"라는 가치가 있다.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바르샤바 전투는 오늘날 폴란드인의 국뽕을 MAX로 충족시키는 대사건이다. 예지 호프만(Jerzy Hoffman) 감독이 찍은 2011년작 1920년 바르샤바 전투(1920 Bitwa warszawska)는 그때까지 만들어진 폴란드 영화 중 가장 거액인 2,700만 즈워티(약 900만 달러)을 들여 찍은 영화인 동시에 폴란드 최초로 3D 기술을 사용하여 찍은 영화이다. 9월 26일 폴란드 국립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당시 폴란드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29] 그리고 2020년에는 바르샤바 전투 100주년을 맞아 20즈워티 기념주화를 찍어내고 바르샤바의 도심 도로와 비스와 강에서 기념 주행 쇼를 벌였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 크리를 맞았다.
바르샤바 전투에 참여한 붉은 군대의 모든 사령관은 딱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대숙청 당시 처형되는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30] 폴란드 4군 사령관 레오나르트 스키에르스키는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이미 예편한 상태였지만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고, 카틴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피우수트스키와 갈등을 빚던 민족민주주의파(Narodowa Demokracja)는 바르샤바 전투의 작전안이 프랑스 군사고문사절단장 막심 베이강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고, 피우수트스키를 무려 전투 중 탈영했다고 비난했다(...). 당연하지만 참전자들의 증언과 다수의 문서에 따르면 피우수트스키는 작전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 직접 참여했으니, 민족민주주의파의 발언은 그냥 어깃장 놓기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폴]
폴란드어. "바르샤바 전투".
[러]
러시아어. "바르샤바 전투"
[우]
우크라이나어. "바르샤바 전투"
[4]
서부전선군의 잔존 병력은 31일까지 저항했다.
[5]
이 중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군대인 우크라이나 인민군의 병력은 1만 4천여 명.
[6]
당시 독일령이었던
동프로이센으로 탈출한 서부전선군 병력이다.
[7]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병력 포함
[8]
러시아 SFSR,
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SSR
[9]
중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는데, 이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정교도인 현지 농노들을 학대하고 가톨릭을 강요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래서 폴란드가 동맹자라고 손을 내밀어도 우크라이나인은 폴란드를 기본적으로 불신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현지는 이미 기나긴 전쟁에 지쳐서 폴란드를 도울 힘도 없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키이우의 주인은 16번이나 바뀌었다.
[10]
폴란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제한하고, 군수산업을 해체하며, 이 병력을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볼셰비키에게 양도하도록 했다. 또한 폴란드에 새로운 병력이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비아위스토크와
발트 해를 잇는
철도를 러시아가 교역 목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은 당연히 커즌 라인에 맞게 조정되며, 폴란드군은 동부 국경으로부터 최소 50베르스타(약 53km) 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도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했는데, 이는 폴란드 노동자들을 무장시켜서 붉은 군대에 호응하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11]
장교 2만 6,478명과 사병 91만 7,498명 포함.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및 기타 외국인 자원병은 제외한 수치이다.
[12]
이 낫은 '워 사이드'라고 하여 날을 수직으로 세운 낫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말기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지휘한 폴란드 봉기군 중에는 워 사이드로 무장한 농민부대도 있었을 정도였다.
[13]
폴란드 북부를 흐르는 나레프(Narew) 강의 지류이며, 나레프 강은 비스와 강의 지류이다.
[14]
이 양반은 대소전쟁에서 패배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데다가 결정적으로 비토스 총리에게 피우수트스키를 모가지 해달라고 청한 사실이 발각되어 8월 18일 리츠시미그위로 교체되었다.
[15]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 폴란드 국경지대의 도시 브로디(Броди)로, 당시에는 폴란드령이었다.
[16]
비스와 강의 지류이다.
[17]
폴란드어로
그단스크.
[18]
원래 계획안은 붉은 군대를 부크 강에서 저지하는 것이었지만 붉은 군대가 일찍 부크 강을 도하하여 소용없게 되었다.
[19]
당시 폴란드로 파견된 프랑스 군사고문사절단장. 바르샤바 전투의 대승은 한동안 그의 공로로 돌려진 적이 있었다.
[20]
파괴되지 않은 통신국의 주파수는 이미 폴란드 측이 알고 있었다.
[21]
붉은색 선은 1920년 여름 붉은 군대의 최대 진출선이다.
[22]
붉은색 화살표는 붉은 군대의 진로, 파란색 화살표는 폴란드군의 진로이다.
[23]
3군 예하: 제1군단보병사단, 제3군단보병사단, 의용기병여단. 4군 예하: 제14보병사단, 제16보병사단, 제21산악보병사단.
[24]
5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 중 적군의 저항을 보고한 부대는 1개 보병사단(제21산악보병사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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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폴란드 남동부 헤움(Chełm) 인근의 소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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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22일 비아위스토크 전투가 있다. 제1군단보병사단 예하 제1군단보병연대(병력 2,000명)는 22일 새벽에 비아위스토크에 주둔하던 적군 붉은 군대 제55소총사단 예하 제164소총여단을 공격하여 5시간만에 전멸시키고 도시를 수복했다. 그리고 제1군단보병연대는 숨돌릴새도 없이 곧바로 서쪽에서 퇴각하던 16군 패잔병과 격전을 치러야 했다. 도심과 철도역까지 뺏고 빼앗기는 격전 끝에 제1군단보병연대는 포로만 8,200명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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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은 폴란드와 국경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반대로 소비에트와 붉은 군대에 호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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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리가 조약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폴란드는 리가 조약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왜냐하면 폴란드는 기대했던
우크라이나의 독립은커녕 오히려 점령지 일부를 볼셰비키에게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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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평은 좋지 않다. 다니엘 올브리흐스키(Daniel Olbrychski) 같은 대배우를 기용해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점이 대개 10점 만점에서 4점대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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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4군 사령관 슈바예프도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죽기 직전에 폐인이 되어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