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33:12

파울 브라이트너

브라이트너에서 넘어옴
파울 브라이트너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1979~1980)
파울 브라이트너
(1980~1983)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1983~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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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브라이트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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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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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4 · 1975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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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72 · 1972-73 · 1978-79 · 1979-80 · 1980-81 · 1981-82 · 19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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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Ballond'or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
파울 브라이트너
3위
베른트 슈스터
1981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울 브라이트너 얀 쾰레만스

1981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FC 바이에른 뮌헨)
파울 브라이트너
( FC 바이에른 뮌헨)
카를하인츠 푀르스터
( VfB 슈투트가르트)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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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브라이트너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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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인
파일:Paul Breitner.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파울 브라이트너
Paul Breitner
출생 1951년 9월 5일 ([age(1951-09-05)]세)
독일 바이에른주 콜버모어[1]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2], 미드필더[3]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SV-DJK 콜버모어 (1957~1961 / 유스)
ESV 프라이라싱 (1961~1970 / 유스)
FC 바이에른 뮌헨 (1970~1974)
레알 마드리드 CF (1974~1977)
E. 브라운슈바이크 (1977~1978)
FC 바이에른 뮌헨 (1978~1983)
경영 바이에른 뮌헨 (2007~2011 / 수석 스카우트)
바이에른 뮌헨 (2011~2017 / 클럽 대표)
국가대표 48경기 10골 ( 서독 / 1971~1982)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5. 은퇴 후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6.3. 수훈6.4. 출전 기록
7.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백[4] 중앙 미드필더였다.

1970년대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에서 레프트백으로 분데스리가 3연패 및 라리가 2연패, 그리고 유러피언컵 우승[5]을, 1978년 바이에른으로 복귀해 중앙 미드필더로 분데스리가 2연패를 이끌었고, 특히 1981년엔 팀 동료 루메니게에 이어 발롱도르 2위에 올랐다.[6] 서독 대표팀에선 초기엔 레프트백으로 유로 1972, 1974 월드컵 우승을, 말년엔 중앙 미드필더로 1982 월드컵 준우승을 주도했다.[7]

현역 은퇴 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수석 스카우터와 클럽 대표를 역임하였다.

2. 클럽 경력

2.1. FC 바이에른 뮌헨 1기

만 20살이 안된 나이에 FC 바이에른 뮌헨에 데뷔하였고, 순식간에 주전을 차지한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했고, 1973-74 유러피언컵에서 브라이트너의 맹활약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4:0으로 대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고, 그 해 더블을 달성했다.

2.2.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레프트백으로 맹활약하며 요한 크루이프 바르셀로나를 격파하고, 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달성했다. 3년 동안 브라이트너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라리가 우승 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를 이끌었다.

2.3.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그러나 당시 서독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를 거의 선발하지 않았고, 브라이트너는 이 때문에 독일로 돌아왔다.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리그 30경기 10골을 득점하며 브라운슈바이크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시즌 후에 다시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온다.

2.4. FC 바이에른 뮌헨 2기

바이에른 뮌헨에서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한 브라이트너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내리막을 걷던 바이에른 뮌헨을 다시 일으켰다.

복귀 후 첫 시즌부터 12골을 기록했고, 대부분 10골을 넘기는 중앙 미드필더로서 경이적인 득점력을 보유한 브라이트너는 중원을 지배하며 1979-80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안겨주었으며, 1980-81 시즌에 리그 17골을 득점하며 분데스리가 2연패에 공헌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81년에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8]와 서독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고 발롱도르 2위에 오른다. 1981-82 시즌에는 리그 18골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으며, DFB-포칼에서 우승컵을 차지한다. 유러피언컵에서도 맹활약, 브라이트너는 4강 CASK 소피아와의 대결에서 1차전에는 1골, 2차전에는 2골을 넣으며 총합 7:4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이 후에는 계속되는 부진한 성적과 또 부상이 계속 재발하며 본인도 더 뛸수 있었지만 1983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3. 국가대표 경력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바로 헬무트 쇤 감독의 콜업을 받았고 최초의 메이저 대회 데뷔였던 유로 1972에 출전했는데, 레프트백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굳건히 해냈던 브라이트너는 물론이고 특히 골잡이 게르트 뮐러의 득점력과 프란츠 베켄바워의 경기 조율로 벨기에 소련을 꺾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본인은 토너먼트의 팀에 이름을 올린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역시 주전자리를 차지했다. 1차 조별 리그(16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동독, 칠레가 한 조가 되었는데, 동독에게 패배를 당하며 2승 1패 조 1위로 2차 조별 리그(8강)에 올라가게 된다. 브라이트너는 칠레전에서 전반 18분에 30m가 넘는 거리에서 중거리 슛으로 결승골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것이 이 경기에서 서독이 기록한 단 두 개의 유효슛 중 하나였다. 희대의 수비수 엘리아스 피게로아가 버티고 있는 칠레 수비진은 이 날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만약 브라이트너가 골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서독은 약체 칠레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할 뻔했다. 서독이 각성하며 3전 전승을 해내고 브라이트너도 유고슬라비아 전에서 다시 한번 멋있는 중거리슛으로 골을 만들어낸다. 결승은 당시 돌풍이었던 네덜란드와의 경기였다. 서로 둘다 토탈 풋볼과 리베로 시스템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 싸웠고 명경기를 만들어낸다. 휘슬이 불리고 1분 만에 크루이프 페널티킥을 유도해내고, 요한 네스켄스가 성공하며 한 점을 뒤지고 시작한다.
그래도 서독은 힘을 내었고 페널티킥 찬스가 왔다. 브라이트너는 침착하게 성공시켜 동점을 만든다. 베르티 포크츠 요한 크루이프에게 초반 페널티킥을 내준 것 이외에는 크루이프를 마크하는 역할을 똑똑히 해냈고 크루이프는 그에게 고전한다. 또 전반 43분에는 게르트 뮐러가 터닝슛으로 마무리했고 이는 결승골이 되었고,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어 우승을 차지한다. 참고로 브라이트너는 레프트백으로 무려 7경기 3골을 넣었는데, 유로 1972보다 빛나는 활약을 한 브라이트너는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이후 브라이트너는 오랫동안 대표팀 소집을 받지 못하다가[9], 당시 서독 대표팀 감독이었던 유프 데어발 감독은 브라이트너의 대표팀 복귀를 유도하였고 브라이트너는 1975년 10월 그리스와의 유로 1976 예선 경기 이후 거의 6년 만인 1981년 4월 오스트리아와의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 경기 국가대표팀에 복귀한다.

이미 포지션을 중앙 미드필더로 바뀐 뒤였고 서독은 베른트 푀르스터,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울리 슈틸리케, 호르스트 흐루베슈, 또 역시 공격에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듀오를 형성한다.[10] 서독은 알제리, 오스트리아, 칠레를 상대로 2승 1패 조 1위로 1차 조별 리그(24강)를 통과한다.[11] 이때 서독의 몇몇 선수들은 부상에 시달리며 고생했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2차 조별 리그(12강)에서 잉글랜드와는 비기고 스페인에게 2:1로 승리하며 4강에 오른다.
파일:external/file2.instiz.net/6e5fa935a4650e005eaf1606400e5bd2.jpg
1982 스페인 월드컵 서독 vs 프랑스의 서독팀 선발멤버
4강에서는 미셸 플라티니 프랑스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고 하랄트 슈마허의 선방으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결승에 오른다. 결승 상대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파올로 로시가 이변을 일으키며 기세가 상당히 좋았고 서독은 그에 비해 안정적이였으나, 후반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모습을 잃어갔다. 때문에 사람들의 예상은 이탈리아였다. 그리고 그에 맞게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가 선제골, 뒤이어 마르코 타르델리,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연속골을 넣었다. 브라이트너는 후반에 만회골을 넣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이미 굳게 걸어잠군 골문은 열리지 않는다. 결국 3-1로 패배. 아쉬운 준우승이지만 브라이트너는 두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넣은 몇 안되는 선수가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브라이트너는 루드 굴리트, 요한 네스켄스 등과 함께 축구사에서 가장 완벽했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뽑힌다. 사실 그의 주포지션은 레프트백과 중앙 미드필더. 선수 시절 초창기에는 레프트백으로 활약했다. 완고한 수비력에 그보다 더 빛났던 오버래핑. 기본기가 정말 뛰어났기 때문에 스피드와 드리블로 그가 돌파하면 막기 쉽지 않았다. 더 무서웠던것은 그의 킥 능력인데 정확한 킥을 구사하던 레프트백이니 세트피스 상황이나 페널티킥도 직접 찼고 중거리 슛 능력이 어마무시했다. 뚝 떨어지는 중거리 슛으로는 수도 없이 득점해냈다. 이런 완벽한 선수는 역시 수비에 쳐박아두기 아까운게 보였는지 중미로 포지션을 바꾸고 나서는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 미친 활동량으로 존재감을 뽐내며 중원을 장악하고 직접 볼을 뿌리며 경기조율에도 힘쓰며 레프트백 시절보다 필드골을 더 많이 넣을 기회가 찾아오니 3경기당 1골이라는 무서운 스코어링도 보여줬다.

브라이트너의 영향력은 루메니게에게도 미쳤다. 브라이트너가 없었을 때의 루메니게는 경기력부터가 차이가 났고 스탯역시 차이가 심했다. 또 이를 증명하는 것은 키커 랑리스테인데 루메니게가 WK[12]를 받을 때마다 그도 역시 계속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은퇴 역시 부상때문에 한 것인데 사실 본인도 충분히 회복하면 폼 유지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즌 후반을 다 날려먹고도 WK 다음 등급인 IK를 받을 정도니 말이다.

5. 은퇴 후

1998년 베르티 포크츠에 이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물망이 올랐고 실제로 발표가 이뤄졌으나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은퇴 후에는 신문에서 축구 칼럼리스트와 TV해설가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7년 바이에른 뮌헨의 기술고문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7년까지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에서 매니저로 활약했다.

2018년 그는 울리 회네스의 지난 긴급 기자회견을 맹비난 하며 VIP 명예회원권 2장을 반납해버렸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동안 바이에른과 48년간 함께 했는데 이 구단이 밑바닥과 약점을 한 번에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라며 매우 강도높게 비판했다. 사실 회네스와 브라이트너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이번 일로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나게 된 것. 이에 프란츠 베켄바워는 그 둘이 화해하길 바라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기꺼이 둘의 화해를 돕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수훈

  • München leuchtet in Gold: 2022

6.4.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경기 득점
1970/7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1 2
1971/7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0 4
1972/7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2 4
1973/74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6 7
1974/75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29 3
1975/76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25 6
1976/77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30 1
1977/78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분데스리가 30 10
1978/7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12
1979/80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2 10
1980/8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0 17
1981/8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9 18
1981/8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2 9

7. 여담

1970년대 초중반에 활약한 서독 레전드들 그 중에서도 바이에른 뮌헨 레전드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괴수급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바이에른에서는 5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포칼 우승, 그리고 1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2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기록했다. 거기다 국가대표로서도 1번의 유로 우승과 1번 씩의 월드컵 우승과 준우승을 경험한 완벽에 가까운 커리어를 가진 선수.

그가 메이저 대회에 대뷔한 유로 1972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 도무지 한국 나이로 22살, 24살의 얼굴이 아니다. 강렬한 아프로 머리와 호쾌한 수염. 이런 범상치 않은 외모에 맞게 성격도 상당히 화끈했는데, 기득권 층에 엄청난 반감을 보였고 좋아하는 책이 뭐내고 물어보면 '마오쩌둥 어록!' 이라고 조건반사적으로 말했고, 체 게바라의 엄청난 팬이었으며, 레닌과 마르크스의 책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마오쩌뚱 포스터 앞에서 북경주보를 읽는 엄청난 패기까지... 이것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가 영입을 매우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상기 시키지만 이 사람 1970년대 선수고, 1970년대의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이며 브라이트너는 냉전의 가장 치열한 경계선이었던 서독인이다(...).[14]

이런 직설적인 성격은 대표팀 생활에서도 어디 안가서 대표팀 핵심선수들과도 상당히 껄끄러웠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이긴 하지만 베켄바워에게 '독재자'라고 비난을 했다고 할 정도이니... 지금도 지금이지만 베켄바워의 영향력은 현역 시절에도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센티미터 단위로 패스를 조절한다고 하는 당대 최고의 패스 마스터이자 플레이메이커로 꼽히던 귄터 네처가 베켄바워와의 파워게임에서 져서 1974년 월드컵에서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베켄바워에게 독재자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으니 성깔이 대단한 건 맞다. 물론 베켄바워는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가 살생부의 첩경이긴 하다.

차범근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 중 하나다. 차범근은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조금만 더 올라갈 수 있었으면, 같은 시대를 보낸 루메니게나 브라이트너의 경지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라고 평가했다.

파일:attachment/파울 브라이트너/Paul_Breitner_Lars_Ricken_Wembley_2013.jpg

2012-13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앰버서더에 선정되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결승전 오프닝 세레머니때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라르스 리켄과 갑옷을 입고 빅이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표정은 마치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짓을 해야 하나?" 같다.[15]

독특한 성격과 더불어 사고도 꽤 많이 쳤는데, 현 바이에른 뮌헨 울리 회네스 회장과 군복무를 피하려 도망 다니다가 걸려서 데뷔도 못하고 주말에 청소를 하기도 했다. 또 우승이후 수영장에서 나체로 환호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76년에는 감자튀김(Potato Fritz)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뮌헨과 DFB, 자본주의 위주의 서독에 불만이 많았는지 위의 나체논란이 일자 뮌헨을 환호도 못하는 똥같은 클럽이라고 하거나 DFB가 변화해야 한다는 등 공격적인 언행을 자주 하기도 했다.

울리 회네스와는 레알 마드리드 이적 시에도 유일한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한 사이고 젊은 시절 같은 층에서 살았다고 한다. 귄터 네처와도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친구가 되었다.

뮌헨으로 돌아온 후에는 반성도 많이하고 철이 들었는지 DFB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기도 했다.[16] 그러나 1982년 월드컵 결승에서 팀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당하며 이후로는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데뷔 직전까지는 풀백에서 뛰어본 경험도 없었다고 한다. 우도 라테크 감독이 풀백에서 뛰라고 하자 뛰었더니 그대로 풀백에서 뛰게 되었다고 한다. ESPN 기사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981년에 브라질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 페널티킥 2연속 실축이라는 흑역사를 생성했다.
[1] 전 독일 대표팀 주장이자 전 바이에른 뮌헨의 미드필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출신지역이 같다. [2] 레프트백 [3] 중앙 미드필더 [4] 경우에 따라 라이트백도 소화했다. [5] 1973-74 시즌, 바이에른 뮌헨 소속. [6] 보통 멀티 포지션을 뛰는 선수라도 메인 포지션이 있고 타 포지션은 보조적인 역할인데 반하여, 포지션을 오가며 해당 위치에서 모두 팀의 핵심으로 우승가도를 달리며 맹활약한 케이스는 흔치 않다. [7] 정리하면 레프트백으로는 월드컵과 유로, 라리가와 분데스리가 우승을, 중앙 미드필더로는 월드컵 준우승과 발롱도르 2위, 분데스리가 우승, 키커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까지 석권한 말 그대로 완벽한 멀티 플레이어라 할 수 있다. 특히 1981 발롱도르 1,2위를 나란히 차지한 루메니게와는 뮌헨과 대표팀을 넘나들며 ' 브라이트니게'라고 알려진 특유의 케미스트리로 서로의 경기력을 엄청나게 배가시킨 콤비로도 유명하다. [8]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UEFA 올해의 선수의 전신. [9] 당시 유럽 축구 강국들의 국가대표팀 운영 방침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자국 리그 선수가 아니면 뽑질 않았는데, 브라이트너의 레알 이적으로 인해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대표와의 연을 끊게 된다. 브라이트너는 이후에도 이때의 이적과 국가대표 은퇴를 개인적인 결정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0] 브라이트너와 루메니게의 조합을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렀다. [11] 여담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는 히혼의 수치로 불리는 승부조작을 했는데, 서독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골을 넣으며 오스트리아와 서독이 알제리와 승점은 같지만 골득실이 앞서는 상황이 되어 그 둘은 서로 공격을 안하고 볼을 돌리다 게임이 끝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로 1984부터는 조별 예선의 마지막 경기는 동시에 진행 되었다. [12] 월드클래스: 키커에서 직접 뽑은 선수 개인별 최고 등급. [13] LB 3위. [14]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을 숭배하다니 황당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당시 대나무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문화대혁명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아 마오쩌둥의 위상은 현대의 체 게바라와 비슷했다. 아니 체 게바라는 실패한 혁명가이고 그의 과오나 결함이 당시에도 많이 알려졌기에 성공한 혁명가였고 과오가 가려져 있던 마오쩌둥의 위상이 더 높았다. [15] 물론 영상으로 보면 굉장히 멋있다. 노년간지의 정석. [16] 그런데 뮌헨으로 이적 전 브라운슈바이크에서는 동료들을 아마추어 같다고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