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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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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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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660 ~ 663년
백제부흥운동 ( 도침 / 귀실복신 / 부여풍 / 흑치상지 & 사타상여 / 지수신 )
6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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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936년
후백제 ( 견훤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
*백제부흥을 표방하진 않았으나 백제 유민들의 분리주의를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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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상잠장군 귀실복신
관등 한솔(扞率) / 은솔(恩率)
자칭 상잠장군(霜岑將軍)
성씨 부여(扶餘)(?) > 귀실(鬼室)[1]
이름 복신(福信) / 신복(信福)(?)[2]
아들 혹은 친족 귀실집사, 귀실집신[3]
생몰연도 ? ~ 663년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관련된 의문2.2. 백제부흥운동에서의 활약2.3. 부여풍과의 충돌2.4. 죽음
3. 기타4. 관련 문서

1. 개요

백제 말기의 부흥운동 지도자. 성씨 '귀실'은 일본측 기록(鬼室福信, きしつ ふくしん)과 당나라 측이 663년경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 당 유인원 기공비"에 나오고, 삼국사기 한국 사서에는 이름만인 '복신'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4]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승려 도침 등과 함께 거병하여 에서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데려다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에 함께 거병한 도침과 불화가 발생해 도침을 죽이고 백제 부흥군의 전권을 독차지하는 등 내부에서 마찰을 일으켰다가 풍왕과의 관계도 나빠졌고 풍왕까지 시해하려다가[5] 오히려 본인이 풍왕에 의해 역관광당해 그대로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출생과 관련된 의문

백제 멸망 이후 벌어진 백제 부흥 운동을 이해하려면 그 중추적 인물 중 한 명인 귀실복신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귀실복신의 단편적인 기록들은 또 차이가 있다.
8월에 왕이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삼국사기》 권 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복신이란 인물로는 무왕(백제)조의 왕의 조카라는 인물과 의자왕조의 본 항목의 귀실복신이 등장하는데 앞의 무왕조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백제 사신에게 준 당태종의 새서에 근거한 것이다. 정작 구당서에서는 당사자의 이름이 복신이 아니라 신복(信福)으로 되어 있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행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 및 고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소.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 제149

신당서 백제전의 기록 또한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구당서 백제전 기사와 동일하다. 그래서 의자왕조의 삼국사기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이 전하는 무왕의 조카 부여신복의 기록과 의자왕대의 부흥운동에 관한 기사가 섞여 둘을 동일인으로 간주하여 후자의 귀실복신을 무왕의 조카로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6]

660년 8월 거병하였을때 귀실복신(鬼室福信)의 관등에 대해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에서는 5위인 한솔이라고 하였고 일본서기는 3위인 은솔이라고 하였다. 귀실복신이 이미 무왕 28년인 627년부터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이른 시기부터 활약하며 장수로 재직했던 데다 무왕의 조카이기도 하다면 만년에 해당하는 660년에 여전히 한솔 혹은 은솔이었음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활동연대가 너무 차이 나기 때문에 위에 반론이 소개되어 있다. 귀실복신은 부흥운동 직후 왕족인 부여자신과 더불어 백제인들에게 좌평이라 불렸는데 물론 이는 정식관등이 아니라 유능한 지도자였기에 높여 불려졌던 것이다.

만약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었다면 되려 귀실복신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가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귀실복신이 부흥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출신이나 가계보다는 그의 군사· 정치적 역량에서 비롯된 면이 더 컸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2.2. 백제부흥운동에서의 활약

귀실복신은 사비성 함락 직후 거병하여 임존성[7]을 중심으로 점령군에 저항하였고, 명성이 자자한 명장 소정방 휘하 당나라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크게 세웠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권26에 남아있을 정도. 또한 귀실복신은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여 왜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귀국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이 산발적으로 각지에서 일어나던 상황에서 정통성을 지닌 의자왕의 적자인 부여풍을 영입하여 옹립하고 왜의 지원까지 확보함으로서 백제 부흥 운동의 구심력을 만들어내었다. 그에 따라 각지의 백제 부흥군이 귀실복신과 연계하게 되었는데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거병하여 귀실복신과 호응한 것이 증거이다.

특히 그는 군사적으로 나당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군사적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고 뒤이어서 백제 부흥군 동료 장수인 승려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귀실복신의 지나친 영향력은 결국 국왕이 된 부여풍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2.3. 부여풍과의 충돌

부여풍은 부여풍장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631년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갔으며,[8] 의자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장남은 아니었는데 의자왕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부여융 혹은 부여효 태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웅진성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고, 이 전쟁과 관계없이 왜국에서 십수 년을 보내던 부여풍은 이제 부흥군의 입장에서는 마치 보험과 같이 얼마 안 남은 옹립 가능한 왕자가 되었다.[9] 660년 10월 귀실복신이 왜국 조정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 부여풍은 왜국의 협조로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되돌아왔는데 귀환 시기도 661년 9월과 662년 5월로 기록이 제각각이다.[10]

일본서기의 기록으로는 "부여풍이 입국하자, 복신이 영접하여 맞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고 한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부흥군의 모든 국정이 의자왕 직계혈통 왕족인[11] 부여풍의 휘하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부여풍이 실권자였을 가능성은 낮다. 부여풍은 일본에서 최소 20년 이상을 보냈고, 백제 땅은 최근에야 발을 디뎠으며, 원래는 태자도 아니라서 만약 백제에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왕위에서 거리가 멀었을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부 세력 기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귀실복신은 반대로 소정방 등을 물리치며 자신의 능력으로 초기 부흥군을 이끌었다. 또한 귀실복신도 이설이 있지만 기록상 백제 왕족의 분파고, 이게 맞다면 혈통적으로도 부여풍에는 딸리지만 최소한의 정당성은 존재한다.

부여풍이 귀환한 직후인 662년 정월, 왜국은 귀실복신에게 화살 10만 개, 실 500근, 포 1000단, 쌀 종자 3000곡을 보냈으며, 3월에 부여풍에게 포 300단을 주었다. 이것이 단순히 부흥군에 대한 지원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귀실복신'과 '부여풍'으로 구분을 짓고 귀실복신에게 주요 군수 물자를 직접적으로 하사한 것은, 귀실복신이 부흥군의 중심임을 현실적으로 왜국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부여풍의 기반도 무시할 수 없다. 부여풍의 기반은 왜군으로, 그를 호송한 세력이기도 하다. 백제 부흥군에게 백제 주둔 왜군은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었다.

한편, 662년 12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는 주류성에서 피성(避城)[12][13]으로 이동하였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4],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15]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16]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17]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산물이 풍부한 피성으로 천도하자는 말이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방어의 문제점을 말한 것이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었는데, 천도 후 663년 2월, 신라군이 쳐들어와 백제 남부의 4개 주를 불태우고 안덕(安德)(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 등을 점령하였고, 이곳이 신라군 수중에 들어가자 인접한 피성 지역은 바로 위협을 받게 되어 결국 2달만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 사태 자체만 보면 해프닝에 가까우나, 해석에 따라 백제 부흥군 내부의 권력 다툼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인용문에서는 피성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부여풍이다. 그런데 도침이 제거된 이후로 귀실복신의 권한은 대단히 막강하여, 부여풍은 심지어 단지 제사를 주재할 뿐 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적어도 귀실복신이 동의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밭대 심정보 교수는 피성 천도를 주도한 게 복신이라고 보았는데, 위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피성의 지리적 조건을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귀국한 지 5개월도 안 된 부여풍보다는 복신이 원해서 추진했을 거란 것이다. 아무튼 귀실복신이 동의한 일에 대해서 왜군의 장수가 반대하게 된 셈이다.

타쿠츠 등은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여풍을 호송했고, 주류성에 주둔하였다. 왜군은 지원군의 본진이 도착할 때까지 나당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버티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테고,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전쟁의 차원에서 끝나는 단기적인 일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 판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토착 기반을 지닌 귀실복신 등은 장기적 측면에서 백성을 결집할 정책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그에 따라 귀실복신과 왜군 장수들 사이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부여풍은 자신의 기반인 왜군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비록 모든 근거가 추정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번 해봄직한 가정이다.

혹은 진짜로 이 일은 부여풍이 주도하였을 수도 있다. 주류성 인근 지역은 부흥운동 초기부터 이를 주도하던 귀실복신의 세력 근거지였으므로, 왜국에서 온 부여풍은 아무래도 거북하여 금강 남쪽의 평원인 김제 지역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려고 했을 수 있는 것이다[18]. 그리고 귀실복신으로서도 한 방책이라고 여겨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느정도 확실해 보이는 건 피성 천도가 실패한 뒤 귀실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좀 더 노골화 되었다는 정도다.

신라군의 압박이 한층 강화되자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달솔 금수(金受)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국은 663년 3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에게 2만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해 5월에는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19]라는 인물이 고구려로 가서 군사관계 일을 고하였다. 아마도 3월에 있었던 왜 지원군 본진 출병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 왜국와 고구려가 남북으로 협동하여 나당연합군에 대응할 전략적 문제를 상의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는 660년 11월 신라 칠중성을 공격했던 것과 달리 이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당군의 침공을 막 저지한 후였기 때문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여력이 없었다.

2.4. 죽음

여하간에 그는 이후 돌아와서 석성으로 가 규해(糺解)를 만났는데, 규해는 귀실복신의 죄를 거듭해서 말하였다. 규해는 부여풍의 자(이름)로 여겨진다.[20] 부여풍이 왜군에게 귀실복신의 죄를 계속해서 말하였다, 라는 것은 그가 귀실복신 처리 문제에서 왜군의 지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왜군 입장에서도 백제 토착 기반세력을 지닌 귀실복신보다는 부여풍 쪽이 좀 더 기호에 맞았을 것이다.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양자 간의 불신이 심해지자 귀실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일부러 병을 칭하였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음모를 눈치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 이로 인해 귀실복신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일본서기에서는 귀실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결하여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21]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22]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풍운아 귀실복신은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에 있어 귀실복신의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귀실복신의 목을 소금에 절이는 매우 강경한 처벌은 귀실복신에 대한 증오가 그만큼 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아가 그의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차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백제부흥군의 상호 신뢰와 헌신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내분의 틈을 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부여풍이 믿을 것이라곤 왜국과 고구려의 지원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실복신이 죽고 두 달만에 백제 부흥군은 백강 전투로 궤멸당했고,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동맹국인 고구려로 도주했다. 9월에 주류성 나당연합군에 함락되고, 이어 지수신이 11월까지 버티며 지킨 임존성도 결국 함락당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23]
鶴唳風聲奔北日 학 울음 바람 소리에 북으로 달아나던 날
任存城主抗唐兵 임존성 성주는 당나라 군사에 항쟁했다네
曹蜍李志生猶死 조여(曹蜍)나 이지(李志) 같은 이는 살아서도 죽은 목숨[24]
福信雖亡擅美名 복신은 비록 망했지만 미명을 독차지했네.
남효온 <추강집>권3 부여회고(扶餘懷古) 10수 중 아홉 번째

3. 기타

귀실복신의 아들 혹은 가까운 친족으로 보이는 귀실집사 귀실집신은 왜국으로 망명했는데, 일본 시가현에 귀실집사를 모시는 키시츠(귀실)신사(鬼室神社)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한국사와 직접 관계된 장소기 때문에 한국어 안내현판이 있다.

음력 3월에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은산별신굿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 9호) 에서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은산별신제의 유래 자체가 귀실복신과 관련이 있는데, 은산면 일대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 마을 어른의 꿈에 나타나 "나는 백제를 지키다 죽은 장군이다. 지금의 역병을 내가 없애줄테니 나와 내 군사들의 뼈를 거두어 묻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말대로 오래 전에 죽은 장군과 병사들의 뼈를 수습해 묻어주자 역병이 그쳤고 이것이 은산별신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문화유산채널 영상, 은산별신제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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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사서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씨라는 성씨귀신의 감화를 받아서 사용하게 된 거라고 한다. 원래 왕족인 부여씨였지만 바꾼 거란 내용이 신찬성씨록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도는데 정작 신찬성씨록에 그런 기록은 없고 다만 신복이라는 인물이 무왕의 조카였다는 다른 사서들의 기록 및 신복과 귀실복신을 동일인물로 간주한 것 때문에 그렇게 추정된 것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증된 바는 없다. 또한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귀실씨는 이후 쿠다라노키미(百済公)씨를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이렇게 성씨에 쿠다라(백제)가 직접 들어가는 경우는 주요 왕족 출신임을 나타내고자 함이었기에 방계 왕족 출신이 아닌가 추정되는 것이다. 참고로 가장 직계인 의자왕의 후손들은 쿠다라노 코니키시(百済王)씨를 받았다. 덤으로 문주왕의 후손 또한 쿠다라노키미씨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서 귀실씨가 문주왕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지만 딱히 조상이 같아서가 아닌 그냥 방계왕족이라 준 것일 수도 있고 왕족이 아니라도 부흥운동 당시의 공로 때문에 받은 것일 수도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다. 신찬성씨록에서 왕족인지 아닌지 확실히 기재해줬으면 아주 확실해졌을 텐데, 다른 성씨들의 경우 오래된 왕족의 후손이라도 일일이 적어놓은 반면, 귀실씨의 출자에 대해서는 왕족과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 또 왕족들만 받았던 '쿠다라'가 들어가는 성씨를 사성받았기에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어진 것. [2] 무왕의 조카인 신복과 동일인물일 시. [3] 확실히 아들이라 기록된 건 아니지만 성씨가 같고 귀실복신의 공에 의해 관위를 받았으므로 적어도 가까운 친족이었던 건 확실해 보인다. 또한 두 명이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으므로 아예 형제였거나 적어도 같은 항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당대 한반도는 성씨의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있더라도 이름만 따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반도에서 성씨사용이 본격화되는 건 고려시대부터이다. [5] 기록에 의하면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풍왕이 병문안을 오면 살해하려 했지만 되려 풍왕이 눈치를 채고 그 방으로 들어가 귀실복신을 체포해 처형하였다고 전한다. [6] 이에 대해 귀실씨는 왕가인 부여씨에서 분기한 방계왕족 가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백제사 연구 권위자인 노중국 교수는 무왕도 정통 왕족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무왕도 본래 귀실씨였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7]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일대. [8] 다만 631년은 백제 무왕 32년으로 의자왕 즉위 전이다. 그 때문에 실제로 건너간 시점에 대해 631년 설과 641년 설이 있다. [9] 사실 의자왕에겐 자식이 무척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기록에 제대로 등장한 왕자들을 제외하면 외가가 한미하거나 무언가 하자가 있거나 나이가 어려 구심점으로 쓰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풍의 경우 특히 왜국에서 지내며 지원을 받아낼 인맥을 쌓았기에 더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10] 노태돈의 말로는 전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11]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12] 피성은 이케우치 히로시의 주장에 의해 김제로 보는 시각이 주류다. 서북으로 강물, 동남으로 커다란 제방의 방벽, 주위에 논, 삼한에서 가장 비옥하다, 방어하기는 불리한 낮은 땅이라는 설명은 벽골제와 호남평야를 낀 김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13] 다만 이에 대한 반박으로 김제 성산을 피성으로 비정한 근거가 너무 빈약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이전을 논하는 과정에서 주류성과 피성의 지리적 특별함이 설명되어 있는데 김제(피성)와 부안(주류성)은 고서의 어떠한 내용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로 비정 받지 못하고 단지 추정할 뿐이다. ⓐ 피성은 처음부터 적군과 하룻밤 사이의 거리였다. 백제남부 4성이 함락되고 득안성(논산)이 함락되어 피성이 적군과 너무 가까워(논산/김제) 주류성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주장은 틀린 해석이다. 부흥군은 백제 남부가 평정되고 득안성이 점령당하는등 나당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위협을 감지하고 방어에 유리한 주류성으로 회군한 것이 옳은 해석이다. ⓑ 주류성은 부흥군과 백제 유민이 함께 머무른 상상하기힘든 넓은 공간의 새로운 수도였다. 흑지상지가 부흥의 깃발을 들자 10일 만에 3만의 군사가 모였다는 기록, 토질이 척박하여 백성이 굶주리게 된다는 기록은 주류성에 백제 유민들이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주류성은 어떤 특정한 산성이 아니라 험준한 산악지역의 넓은 공간이 있는 산악지형을 이용한 목책으로 급조된 산성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김정호는 충주 홍성군을 주류성으로 기록했다. [14]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15]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16]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 [17]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을 가리킨다고 본다. [18] 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19] 이름은 누락됐다. [20] 부여풍과 동일인물이 아니라 일본에서 지내다 부여풍과 같이 귀국한 또 다른 왕자라는 설도 있다. [21] 덕(德)씨로 보이는데 같은 성씨로 추정되는 다른 인물로 덕자진(德自珍)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기 때문. [22] 원문은 '腐狗癡奴'로 되어 있는데 점잖게 번역해서 그렇지, 사실은 "이런 썩을 개X끼야! X발놈아!" 수준의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23] 임존성을 함락시킨 것은 과거 백제 부흥군을 지휘했던 흑치상지였다. 해당 문서 참조. [24] 조여와 이지는 모두 진(晉)나라 때 사람들로, 후한 때 사람 조윤이 조여의 할아버지이다. 두 사람 모두 왕희지에 견줄 명필로 이름 높았지만 인품이 워낙 엉망이라 왕희지와는 달리 그들이 쓴 서예 작품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 모두 소인배의 상징으로 쓰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사람들은 비록 목숨은 부지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로 가만 보면 당에 항복한 자들을 조여나 이지에 빗대어 에둘러 까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