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45deg, #d7141a 40px, transparent 40px)"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colbgcolor=#015197> 고대 | 켈트족 | |
게르만족 | |||
훈족 | |||
서슬라브족 | |||
아바르칸국 | |||
사모제국 | |||
중세 | 모라바 공국 | ||
대모라비아 왕국 | |||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피아스트 왕조 |
|||
보헤미아 왕국 룩셈부르크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 |
|||
근현대 |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뮌헨 협정 |
|||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 |||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
나치 독일 점령기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 |||
체코슬로바키아 제4공화국 |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 |
|||
체코슬로바키아 제5공화국 | |||
체코 제1공화국 | }}}}}}}}}}}} |
나치 독일의 보호령 | |||||
덴마크 보호령 |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Protektorát Čechy a Morava Protektorat Böhmen und Mähren |
|
나치 독일의 보호령 | |
국기 | 국장 |
파일:Protectorate_of_Bohemia_and_Moravia_(1942).svg | |
1939년 3월 16일 ~ 1945년 5월 11일 | |
수도 | 프라하 |
언어 | 독일어, 체코어 |
종교 | 가톨릭 |
면적 | 48,925 km2 |
인구 | 7,380,000명 (1939년) |
정치체제 | 보호령 |
국가원수 | 대통령 |
정부수반 | 총독 |
통화 | 보호령 코루나 |
국가 | 나의 조국은 어디에 |
성립 이전 |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
멸망 이후 |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1939년 3월 16일에 만들어진 나치 독일의 자치 보호령이다. 이 3월 16일에 독일 국방군이 뮌헨 협정과 제1차 빈 중재로 합의금을 받은 뒤, 남은 영토를 침공하면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부분을 묶어 독립시켰다. 이는 3월 14일에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세워진 지 2일 만에 일어났다.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에밀 하하가 연임했으나, 나치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고, 사실상 나치 독일에게 속령으로 취급받았다. 이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악독하게 착취하는 등 체코인과 유대인에게 악명을 떨쳤다. 이로 인해 체코인들로 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가 저항을 이어갔다.
1945년 5월 9일 프라하 봉기가 일어났으며, 직후 소련군의 프라하 공세가 일어나면서 체코 지역에 주둔하던 독일 국방군이 일소되었다. 1945년 5월 11일 프라하가 함락되고, 대통령 에밀 하하와 보호령의 고위 관료들이 체포되면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해체되었다.
2. 나치의 잔학 행위
1940년 인구 조사시에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는 738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 3.3%(225,000명)만이 순수 독일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지역을 차후 " 대게르만국"에 편입할 계획이었던 드랑 나흐 오스텐 정책을 실시해서 체코의 독일화를 꾀했고, 카를 헤르만 프랑크는 체코인 말살을 시도하여 1945년까지 5년간 체코인 전체의 절반을 독일인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1] 이처럼 나치 독일은 이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체코인에 대한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한 전적이 있다.또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는 레티 절멸 수용소라는, 로마족( 집시) 임시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곳에 집시들을 모아놓았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역할을 했으며,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대략 4,000명 가량의 집시가 수용되었다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서 학살당했다.
이에 비해 같은 보호령이던 덴마크에선 게르만족 국가라 그런지 자주권을 인정받는 등 대우가 훨씬 좋았다. 어떠한 외교/군사적 마찰없이 나치 독일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3. 역대 수장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지도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대통령 | |||
제1대 | ||||
에밀 하하 | ||||
총독 | ||||
제1대 | 권한대행 | 권한대행 | 제2대 |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쿠르트 달루게 | 빌헬름 프리크 | |
총리 | ||||
제1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루돌프 베란 | 알로이스 엘리아시 | 야로슬라브 크레이치 | 리하르트 비에네르트 | |
<rowcolor=#fff>
모라비아 ·
보헤미아 공국 ·
보헤미아 왕국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체코슬로바키아 ·
체코 모라비아 · 제1공화국 · 슬로바키아 |
}}}}}}}}} |
3.1. 총독(Reichsprotektor)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1939년 3월 16일~1943년 8월 20일)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1년 9월 27일~1942년 5월 30일)
- 쿠르트 달루게 (1942년 5월 31일~1943년 8월 20일)
- 빌헬름 프리크 (1943년 8월 20일~1945년 5월 5일)
정식 총독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와 빌헬름 프리크 단 2명이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쿠르트 달루게는 노이라트의 재임 기간 동안 총독 대리직을 수행했다. 다만 이 둘의 재임 기간 동안 노이라트는 허수아비로 지냈으니 사실상의 총독으로 볼 수는 있다.
3.2. 대통령(Staatspräsident)[2]
- 에밀 하하 (1938년~1945년)
3.3. 군정통치령 대표(Wehrmachtbevollmächtigter)
- 에리히 프리드리히 (1939년 4월 1일~1941년 10월 31일)
- 루돌프 토슈인트 (1941년 11월 1일~1943년 8월 31일)
- 페르디난드 샬 (1943년 9월 1일~1944년 7월 26일)
- 루돌프 토슈인트 (1944년 7월 26일~1945년 5월 7일)
[1]
온건파였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히틀러의 눈 밖에 나 실권을 잃은 지 오래였다.
[2]
단순한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으나
망명정부와도 연락을 하긴 했다. 그러나 전쟁 등 격변기에는 일종의 보험 차원으로서 공식적인 적대 세력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정치인이 드물지 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