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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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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 일생 | 생애 | |
가족 |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 ||
역대 선거 |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 ||
사건 · 사고 |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 ||
관련 전쟁 |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
평가 | 평가 | ||
보수주의 |
1. 개요
보리스 옐친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이다.2. 러시아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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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에 대한 만평[1] 참조 |
그나마 러시아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옐친을 높게 평가한다. 이는 옐친이 어찌됐든간 현대 러시아를 성립한 사람이고,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옐친이 직접 선임한 후계자로 푸틴은 옐친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통합 러시아당의 권력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91년 공산당 보수파의 8월 쿠데타를 저지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고 초대 러시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개혁가로서의 면모와 친서민적인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당선 후에 그가 독재에 가까운 전횡을 벌이고 측근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급속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게다가 1994년 체첸 사태의 대응 실패로 평화협상을 맺으면서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그의 가장 큰 실정은 경제 정책이다. 그는 충격 요법[4]이라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는 대단히 급진적인 가격 및 생산 자유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실행한 목적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최대한 빠르게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급격한 체제 전환에 따른 혼란과 민생 붕괴를 대비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실행한 충격 요법으로 인해 시장에는 엄청난 혼란과 산업 기반의 붕괴가 발생했다. 이는 그동안은 당의 명령에 의해 가격과 공급량이 정해졌었는데, 갑자기 시장 논리에 의해 생산 시설이 돌아가기 시작하며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수요 공급이 조절되기까지 과도기가 엄청나게 길어졌기 때문이다.
자유화와 소련 붕괴에 따른 산업 붕괴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5]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 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 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거다.
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 요법에 따라서 가격 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 폭등으로 예금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 범죄율도 급속히 상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90%가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 당시 5,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7년과 1998년에는 1,600~1,700달러까지 떨어졌다. 과장이 아니라 실업자만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경제성장률도 개판이라 1990년부터 1998년까지 1997년(1.4%) 한 해를 제외하면 8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는데,[6][7] 그나마 1999년 6.4%, 2000년 10.0%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환율 역시 1998년 7월 기준 1달러에 6.28루블이던 루블 환율[8]은 모라토리움 선언 1개월 후인 동년 9월에는 15.9루블, 1999년 1월에는 23.05루블, 퇴임 직후인 2000년 2월에는 28.7루블을 기록하는 식으로 폭등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소련 붕괴 이후 조국의 모습은 상상도 못한 몰락이었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미국과 대결하던 양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은 체제를 개혁하면 더욱 부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미국과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 파탄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1990년대 러시아의 쇠퇴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분석해도 충격적이다. 소련의 인구는 2억 9,000만 명이라서 당시 2억 5,000만 명이던 미국을 능가했고, GDP는 미국의 40%에 육박했다.[9]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의 일개 지방에 불과했던 러시아 SFSR을 승계받은 러시아의 인구는 소련에 비해 반토막인 1억 4,000만 명에 불과했고, GDP는 소련의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2022년 기준, 러시아는 미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는 미국의 40% 남짓이고 GDP는 미국의 10% 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1995년 기준으로 러시아는 경제 면에서 한국에 열세였다. 1995년 GDP 기준으로, 러시아는 3,955억 달러, 한국은 5,700억 달러였고, 1인당 GDP는 러시아가 2,600 달러, 한국은 12,500 달러로 약 5배의 차이를 보였다. 또한 국가신용등급, 수출액과 수입액 순위, 경제성장률 등도 거의 열세였다. 상세히 따지자면, 1994년 한국에 총 GDP를 추월당했고, 2006년까지 러시아의 GDP는 한국을 추월하지 못했다. 또 하술할 것처럼 러시아의 최암흑기이던 1999년 러시아의 GDP 규모는 한국의 40%도 되지 않았으며[10]2% 수준이었다. 참고로 러시아의 1인당 GDP는 한국의 약 8분의 1이었다.], 2000년까지 한국의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11] 한때 미국이랑 패권을 거룬 양대 초강대국이 10년도 안 되어 과거에 자신들의 사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갔던 나라[12]에게 경제력을, 그것도 총체적인 모든 분야에서 추월당한 셈이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치욕도 저런 치욕이 없었던 셈이다.[13]
또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진행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졌으며 경제를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이 정치계와 언론계까지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가 소련 시대보다 더 심해진데다가 쓸 수 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 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었다. 결국 재빠르게 부를 독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처참해졌다. 1999년 옐친 말기에 와서야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 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어 급기야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14][15]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 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 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최암흑기인 1999년 러시아의 1인당 GDP는 1331달러[16]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러시아는 태국의 절반을 겨우 넘기고 코트디부아르, 필리핀에 버금가는 후진국이었다. 더 정확히는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중하위권 수준이었다.[17][18]
경제 수치도 처참하여 1991년 5,180억 달러였던 러시아의 총 GDP는 1997년 4,049억 달러에서 1999년에는 1,959억 달러로 폭락했고, 1인당 GDP도 3,490달러(1991)에서 2,738달러(1997)였다가 1,331달러(1999)로 추락했다. 둘 다 2년 만에 절반 미만 수준으로 폭락한 셈이다.[19] 경제성장률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인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러시아는 계속 마이너스 성장이었고,[20] 1992년에는 무려 -14.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9년, 2000년의 러시아는 기저효과로 각각 6.4%, 10%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당시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 하면 1990년대 러시아 대학생들의 최고 아르바이트가 바로 외국 남자 관광객 상대의 성매매(인터걸)였다는 웃지 못할 사실도 있었을 정도였다.[21] 북유럽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자"란 단어가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서유럽/북유럽 국가 및 영미권에서는 러시아 여성 매매혼이 벌어졌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이 바로 그 러시아 여성 매매혼을 주제로 한 영화다. 이에 더해, 당시 러시아군의 고위급 장교들도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투잡을 뛰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옐친 집권 시기의 러시아는 사실상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을 겪은 셈이다. 대한민국에서도 1999년에 방영된 러시아발 인신매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소련에서 검사로 일하던 여성이 생계난 때문에 한국에서 성매매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믿기 힘든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러시아는 오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외에 군사력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비셰그라드 그룹과 발트 3국을 비롯한 중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반소 감정이 심했던 중앙유럽 국가들은 재빨리 서구권에 편입되기 위해 급진적인 경제 개혁과 탈공산-탈소련화를 진행하면서 냉전 시절의 유산을 청산하였다. 그 결과 벨라루스, 몰도바,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권 국가들과 내전을 겪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중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이 현재 NATO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옐친의 집권기에 러시아는 강대한 군사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러시아에 소련군 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할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 때문에 극단적인 군축을 거듭해야 했다.
당연히 임기 말 지지율은 2~3%로 아주 바닥을 뚫었다.[22] 모라토리움 선언(1998년 8월 17일)으로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가 시작된 때로부터 약 2개월 후인 1998년 10월 기준 옐친의 지지율은 무려 긍정평가 2%, 부정평가 89%였다.[23] # 이것이 집권 직후 90%의 지지율을 누렸다는 대통령이 맞이한 참혹한 결말이다. 이 링크에 따르면 사임 당시 옐친의 지지율은 무려(?) 8%였다고 한다. # 그리고 이 보고서(3쪽 참고)에 따르면 최고 지지율은 1991년 초반 기록한 80% 초반이었고 1998년 중순 이후 거의 항상 10% 미만 지지율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권 1년도 안 된 1992년 3월 지지율이 10%로 떨어졌다는 자료도 있다![24] # 또 대선 1년 전인 1995년 8월 기준 옐친에 투표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의 결과가 10% 찬성, 72% 반대였다. #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옐친은 자신이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한때 푸틴이 지방선거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주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버리자[25] 옐친은 퇴임 이후 푸틴과 우호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결정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한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보리스 옐친 본인은 정작 대통령 임기 동안 반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헌법에도 없는 최고회의 해산을 벌이려다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같은 내란을 불렀고, 임기 동안 솔제니친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솔제니친과의 만남)이 폐지된다거나, 주요 방송사와 통신사에 낙하산을 내보낸다거나 주요 언론사들을 매수해서 선거 운동을 하고 막장인 러시아 상황을 알린 외국 언론들에게 압력을 가하곤 했다. 1996년 선거에서 당선되기는 했는데, 당연히 미국과 올리가르히의 공작이 판을 친 부정선거였다.[26]
그 영향이 남아서 러시아는 제도적으로만 민주화되었을 뿐 실질적 민주주의는 취약하며, 경제는 그리 좋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옐친이 민주 제도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가령 러시아는 헌법상으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반정부적인 언론은 여전히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9위(2020)로 세계적으로 하위권을 달리고 있는 상태. 이미 옐친 시기가 지난지 얼마 안된 2002년에도 121위를 마크해서 독재국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비슷한 순위를 보여주었다. 기자들은 중국이나 소련 시절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지만 유무형의 협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암살된다고 한다. 정적의 사생활을 찍어 폭로해 매장하는 몰래카메라[27]를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암살 의혹 사건은 옐친-푸틴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 자체는 높이 평가받기는 한다. 사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 보수파에 맞서는 일도 정세를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통령 재임시의 경제난에도 기어이 대통령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은 물론 서방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은 것을 보면 정세 판단이나 회유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알 수 있다. 대통령직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했고, 두 차례 총선 참패와 지속적인 경제난에도 기어이 대통령직 재선에 성공을 해버린데다가 거기에 야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가졌음에도 탄핵안이 부결되어 살아남았다. 이렇듯 정치적인 승부수 하나는 매우 잘 던졌고, 그걸 회수하는 것 하나만큼은 유능했던 사람이 바로 옐친이었다. 더군다나 모라토리엄까지 겹쳤음에도 대통령직에서 곱게 물러나고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고단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능력이 국민들의 삶에 도움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28]
아무튼 정치적으로 고단수였던 것과는 별개로 대통령 재임 당시의 실정 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놈 정도의 취급을 받고,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푸틴에게 권좌를 넘겨준 것이 그나마 잘한 정도로 평가하는 수준이 대다수이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옐친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또한 옐친의 이름이 거리명으로 사용되는 등 공식적으로 러시아 개국의 아버지라며 좋게 평가해주고 있다. 옐친의 통치 하에서 러시아는 기초과학도 무너졌고 복지도 파괴되었고 국가 경쟁력과 각종 경제 및 사회 지표 역시 폭락했다. 또한 러시아는 옐친 시절 소련 해체와 기본 경제 붕괴로 인해 러시아는 옛날의 제정 러시아 때나 소련처럼 서방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울 영토적 기반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이를 인지한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서구권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구권과 나름대로 협력을 추진하면서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조지아 등이 서구권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옛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가 심하게 틀어져 서방에게서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이 경제제재를 당장 해제하라고 요구하지만 서방은 서방대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계속 위협하는 이상 경제제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한, 정치 개혁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전쟁, 학살, 강제 이주 등 수십년간 소련 시절 만든 적폐가 워낙 거대했기에 옐친은 매일마다 사과와 개혁적인 약속을 하며 외교적인 면으로 냉전 시대 긴장 완화와 주변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워낙 그 양이 거대했기에 그래도 계속 반성해야 할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러시아 국내 농간을 등에 업고 집권했다고 인식되며 옐친의 엄청난 실정들로 러시아의 사회가 파괴되고 경제는 무능 그 자체로 러시를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옐친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후원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을 가지고 반미 감정을 키운 러시아인들이 크게 늘었다. 실제 서방에서 옐친을 좋아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유는 옐친이 서방 국가들의 입맛에 딱 맞고 이용해먹기 아주 편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냉전시기 무시못할 국력을 가진 소련 때문에 골치를 썩힌 서방으로서는 자신들이 잠재적 위험으로 경계하는 러시아를 옐친이 무능한 실정으로 알아서 몰락시켜주고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로 자기 관리도 매우 소홀해 기행을 벌여대며 중대한 정상회담까지도 날려먹는 등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심각하게 결여된[29] 보리스 옐친을 당연히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옐친은 미국과 유럽에게 있어 상대하기 쉬운 호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옐친이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지원하고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대가로 미국은 러시아인들의 압도적인 반미 여론을 형성시켜, 더욱더 기형적인 독재자인데다 서방에 극도로 적대적이기까지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을 간접적으로 야기한 꼴이 되었다. 당장 고르바초프조차 본인의 자서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이든 아니든 개혁한 소련이나 민주주의 러시아보다는 옐친이 이끄는 망한 러시아가 더 다루기 쉽다고 판단하고 보리스 옐친에게 모든 지원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유럽에서 벌이는 푸틴의 각종 무리수가 계속 먹혀드는 것도 이 때의 부정선거가 절반은 해먹었다.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옐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꽤나 자주 입담에 올랐다. 다음은 공산주의 유머에도 나와있는 예시다.
A: 소련이 70년 동안 그토록 강조했지만 인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과업을, 옐친은 단지 자신의 재임 시절 몇 년 만에 다 이루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B: 인민들에게 사회주의가 좋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
다만 부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인 부분에 있어선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평도 존재한다. “옐친은 러시아 구한 지도자” 모스크바학술대회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시민들 중에는 옐친을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옹호하거나 공산당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푸틴과 통합러시아당도 그런 논조로 옐친을 옹호한다. 물론 전반적인 의견은 아닌지라 러시아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옐친 재임 시절의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IMF 당시의 한국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강도도 심했고[30] 기간도 길었다는 점 덕분에 부정적 평가는 많아도 긍정적 평가는 매우 나오기 힘들다.
다만 2020년대 들어 현재 러시아인들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옐친의 시대도 어느덧 최소 2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중장년 세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젊은 시절에 옐친의 통치기를 직접 겪었던 만큼 여론이 좋을 수 없지만, 일생 대부분을 푸틴 밑에서 보내고 있는 젊은 세대 중에서는 역사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러시아에 푸틴 말고 대통령이 있었어요?라고 질문할 만큼 점차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푸틴의 독재가 장기화되면서 일어난 씁쓸한 한 면이다.
소련 시절 같은 구성원이자 러시아의 이웃 국가였던 우크라이나, 몰도바, 타지키스탄 등의 나라들이 소련 붕괴 이후 30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내전과 경제 붕괴의 수렁 속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는 국토가 그렇게 큰 데도 체첸 전쟁 빼면 내전이 없었지 않았냐?라는 재평가가 학계에서 나오기도 한다. 다만 이런 평가는 좀 걸러들어야 하는 것이 체첸 전쟁이 규모가 좀 커서 잘 알려진 것이지 다른 지역도 자치 공화국끼리 분쟁을 하거나 분리주의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종합적인 평가는 러시아인 기준으로는 고르바초프보다도 못한 놈이다.[31][32] 현 러시아 정부와 올리가르히, 실로비키들 입장에선 '우리 배불려주고 권력을 쥐어 준 나름대로 고마운 분'이다.
옐친의 실책들을 정리한 글 옐친 시기 러시아의 모습
3. 서방의 평가
옐친은 막나가는 통치를 펼쳤지만 서방에서는 그래도 그를 지원했다. 물론 서방에서도 전부 옐친의 통치를 좋게 본 것은 아니다. 저러다가 나라 말아먹으면 서방에도 위협이 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원한 건 옐친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옐친 다음으로 지지를 많이 받았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로서 "소련 부활"을 부르짖었다. 그 다음으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러시아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아예 소련 영토 재합병, 인종차별 등을 모토로 삼았었다. 서방의 패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공산당은 안 될 말이었고, 당연히 극우 정부를 지원했다간 명분도 상실하고 후폭풍도 알 수 없기에 적당히 순종적이고 무능한 옐친을 밀어준 것. 선거 조작 의혹이나 부정부패, 군대를 통한 의회 해산 등 독재적인 정치를 선보였으나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지원은 유지되었다.이렇듯 옐친의 무능과 독주가 지속되니 그 경쟁자들은 정말로 집권할 가능성까지 높았다. 실제로 주가노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1999년에는 아예 공산당의 재집권이 가시적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인 알렉산드르 레베드, 반정부 활동을 하다 훗날 암살된 보리스 넴초프, 야블로코당 당수였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개혁파 정치인들이 공산당에 맞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거대 양당인 공산당과 자유민주당을 이길 수 없었다. 만일 이들이 집권한다면 서방의 냉전 승리가 도루묵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잖아도 공산권 붕괴 이후 동유럽의 혼란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신소련의 성립과 냉전의 재개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막장이 된 러시아였지만, 옐친의 삽질로 당장 보이는 GDP가 낮았을 뿐 구소련을 지탱하던 국력의 기반 자체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서방은 차라리 옐친을 지원하기를 택했다. 일부 서방의 언론들은 옐친의 무리한 경제 개혁과 부패에 대해 보도하면서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경제 학자들이 러시아의 경제 정책과 방향성을 제시하며 밀어붙였고 정부 차원에서 미국은 옐친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공산당 당수인 주가노프가 옐친보다 지지율에서 앞서자, 미국 측이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했다 기사.
더하여, 옐친이 이긴 진짜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언론을 대부분 소유했던 러시아 재벌 올리가르히들의 지원 덕택이었다. 러시아 국영 방송에서는 소련 시절의 부정적인 모습과 1993년 10월 사태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이에 반해 공산당 쥬가노프의 선거 전략은 기껏해야 공산주의 시절의 구시대적인 대중 집회와 연설뿐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의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소련 시절에 대한 반감이 컸던 당시 이런 선거운동의 결과는 옐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1차 투표에서 옐친:주가노프는 35%:32%, 결선투표에서 옐친은 레베드와 지리놉스키의 지지를 얻어 54:40으로 이긴다. 선거 승리의 주역이었던 알렉산드르 레베드는 그 공로로 러시아 국가안전보장회의 서기가 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 토사구팽당했다. 주가노프 다음 가는 유력 경쟁자였던 지리놉스키는 일개 코미디언급의 인식이 박힌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일부 서방 언론들에서도 개탄하면서 언론들의 건망증이 심한건 알지만 어떻게 옐친이 민주주의냐며 그건 옐친이 아니라 고르바초프이며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한 조치들의 수혜자였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서방의 이러한 대러 정책은 변함이 없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서방이 러시아를 제제만 조금 가하고 묵인하다시피 이유는 푸틴 정권 자체는 옐친보다도 서방 세력에 더 적대적이나 적어도 서방의 우위를 인정하고 러시아의 세력권을 현실적으로 구소련권 주변 지역 중 비 나토 구역인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 반도 등지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1]
만평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다친 곰(
러시아)이 그저 치료를 받으려 병원(옐친)에 갔는데 죽어서 관에 실려 나온다는 내용이다. 즉 살아들어가서 옐친을 만나 죽어나왔다는 풍자.
[2]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 후 성장세가 꺾였다고는 해도 이미 쌓아온 것들이 있어가지고 GDP 지표로만 따지면 오히려 버블경제 시기보다도 화려했고(1995년에는 미국 GDP의 70%를 넘겼다), 1인당 GDP 역시 2000년까지는
미국보다도 높은 세계 3~4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2차 대전 일으킨 업보 때문에 정치적, 외교적 영향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3]
둘 다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력했던 집단을 고의적으로 붕괴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4]
기업에 대한 국가 보조금제와 모든 가격 통제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것을 말한다.
[5]
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
[6]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에는 -14.5%, 한국에 GDP를 추월당한 1994년에는 -12.6%였다. 다만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1998년에는 생각보다 높은 -5.3%다.
[7]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거냐면, 전란 없이
소말리아 버금가는
취약국가지수를 기록한 2000년대
짐바브웨가 2001년(1.4%) 한 해를 제외하면 9년 연속(1999~2008년) 마이너스 성장했다.
[8]
당시까지는 고정환율 수준이었다.
[9]
소련은 사유 재산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소득이나 삶의 질은 확실히 미국의 40%에도 못 미쳤지만, 소련의 모든 재산은 국유 재산이었으므로, 국부 자체는 미국의 40% 정도가 될 정도였던 게 맞다. 국가 경제는 기업 + 가계 + 정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정부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쪽은 매우 부실했다.
[10]
한국 4,975억 달러, 러시아 1,959억 달러. 미국 GDP(9조 6,310억 달러)와 비교하면 무려
[11]
심지어 당시 한국은
IMF 외환위기로 '6.25 전쟁 이래 가장 큰 국난'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불황기였다. 그랬던 한국조차 러시아보다는 압도적으로 사정이 좋았다는 말이다.
[12]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허가를 요청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가를 얻어냈다.
[13]
사실 한국은 이미 (소련이 붕괴한) 1991년부터 '중진국의 최대'이자 GDP 규모 15위 안에 들어왔고, 1993년에는 GDP 규모 12위, 1995년에는 11위 안에 들어온 경제대국이었다. 덤으로 (러시아의 GDP를 추월한) 1994년에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다만
IMF 외환위기 같은 내실의 취약함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2002년에야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여겨진다) 참고로 러시아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명색이 미국 버금가는 군사대국인 주제에
한국보다도
국방비가 낮았다.
[14]
재밌는 점은 자기들이 발권력을 가진 루블화 표시 채권도 모라토리엄 선언을 해버렸다. 모라토리엄만 선언해도 사실상 국가경제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외화 표시 채권이라도 IMF에 간이고 쓸개를 다 내줘도 돈을 빌려와 갚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는데 돈이 없으면 극단적으로 윤전기 돌려 찍어내도 상관없는 자국통화 표시 채권 또한 다같이 모라토리엄 선언을 해버렸다.
[15]
덤으로 이 모라토리엄 때문에 구소련 출신이던
동유럽 국가
몰도바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당시 몰도바는
소련 해체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의 후유증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경제를 의존해오던 러시아가 파산하니 러시아와의 경제적 교류도 거의 다 끊겨 과장 안 보태고 아프리카 최빈국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경제가 작살났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 후유증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유럽 최빈국 신세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6]
2024년 환율로는 2489달러
[17]
세계 평균이 5408달러, 태국이 2029달러,
엘살바도르가 1904달러,
이집트가 1297달러, 코트디부아르가 1154달러, 필리핀이 1123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굴욕 중의 굴욕인 셈이다. 덤으로 당시 최빈국을 막 벗어난
중국의 1인당 GDP는 873달러로 러시아와 500달러도 차이나지 않았다.
[18]
사실 유럽 내 체제전환국들 상당수는 러시아와 거의 동급이거나 그보다 못한 나라들도 있었다.
불가리아는 1660달러,
루마니아는 1600달러 미만으로 러시아보다는 약간 나았고,
알바니아는 1033달러,
우크라이나는 636달러, 심지어
몰도바는 399.5달러였다.
[19]
소련 붕괴 이전 수치는 2004년에 회복했다.
[20]
1998년에도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21]
이는 당시
이원복의 '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
[22]
프랑수아 올랑드와
박근혜의 최저 지지율이 4%로 옐친보다 높았고,
디나 볼루아르테의 최저 지지율이 3%,
빅토르 유셴코의 최저 지지율이 2,5%였다. 하지만 옐친보다 더한 바닥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도 있는데,
미셰우 테메르는 최저 지지율이 무려 1%(...)로 당시 브라질 경제성장률(1.3%)보다도 낮았다. 물론 1999년 시점 옐친도 테메르와 똑같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대통령 지지율'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3]
물론 그 이후 러시아의 상황으로 보면 부정평가가 90%대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정평가 90%대는 전술한 유셴코와 테메르조차 기록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24]
물가 상승을 허용한 후
초인플레이션이 닥쳐오며 지지율이 폭락했지만, 공산당으로부터 갓 해방된 러시아 주민들은 옐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을 떠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25]
몇년 후 직선제로 원상복귀되었다.
[26]
그럼에도 1차 투표에서 옐친의 지지율은 36% 미만으로 나왔다! 온갖 부정을 써댔는데도 2위인
러시아 공산당 소속
겐나디 주가노프가 32.5%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옐친이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27]
기사.
[28]
이 점은 고르바초프와 대비된다.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정치력과 권위가 뒷받침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 고르바초프의 약점이었다.
[29]
술독에 빠져서 대통령실 집무실에 출근조차 하지 않았고, 예술공연중 뜬금없이 난입해 연주자와 춤을 추는 기행을 일삼았다
[30]
물론 한국 국민들의 경제난에 대한 체감은 IMF 이후 거의 똑같은 수준이지만, 실질적인 지표가 아닌 체감적인 부분 한정이다.
[31]
고르바초프는 정치력이 부족하면서 조급하게 개혁을 추진하는 등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주권 선언을 하며 소련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한 옐친에 맞서
주권국가연맹이라는 체제로 소련 자체는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시절 개입한 소련-아프간 전쟁의 여파는 고르바초프 재임 기간 내내 소련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이 된 데다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
아르메니아 대지진같은 대재난까지 겪는 등 악재가 많이 겹쳐지다보니 약간은 면피할 구석은 있다.
[32]
여담으로 체르노빌 참사와 아르메니아 대지진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장관회의 부의장이자 연료동력부 장관이었던 보리스 예브도키모비치 셰르비나(Борис Евдоки́мович Щербина)는 옐친이 당선되면 나라를 암흑기로 몰아넣을 거라며 결사반대했으나, 셰르비나는 소련이 해체되기 전인 1990년에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