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4:17

벨기에/지역갈등

1. 개요2. 오해
2.1. 벨기에 건국 이전에 왈롱과 플란데런이라는 국가가 있었다?2.2. 언어 사용에 대한 오해2.3. 플란데런이 악이다 혹은 왈롱이 악이다?
3. 원인
3.1. 언어 차별3.2.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상황3.3. 언어사용 인구와 정치성향
4. 전개
4.1. 플람스 운동4.2. 왈롱 운동4.3. 플람스 운동의 급진화4.4. 양차대전4.5.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4.6. 언어경계 설정과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 사태4.7. 두 지역의 경제상황 역전
5. 지역갈등에 대한 언어권의 견해
5.1. 네덜란드어권5.2. 프랑스어권
6. 기타7. 관련 문서8. 참고 자료

1. 개요

La Wallonie aux Wallons, la Flandre aux Flamands et Bruxelles aux Belges.
왈롱을 왈롱인에게, 플란데런을 플란데런인에게, 브뤼셀을 벨기에인에게.
알베르 모켈이 1897년 Mercure de France에 기고한 짧은 문구
Laissez-moi Vous dire la vérité, la grande et horrifiante vérité : il n’y a pas de Belges.
J’entends par là que la Belgique est un État politique, assez artificiellement composé, mais qu’elle n’est pas une nationalité.
(…) Vous régnez sur deux peuples. Il y a, en Belgique, des Wallons et des Flamands ; il n’y a pas de Belges.
폐하께 중대하며 공포감을 주는 진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벨기에인은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벨기에는 정치적으로 충분히 인위적으로 구성된 국가이지만 민족이 하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중략) 폐하께서는 두 민중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벨기에에는 왈롱인과 플란데런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벨기에인은 없습니다.[1]
왈롱과 플란데런의 분리에 대해 국왕께 올리는 편지 중에서 - 쥘 데스트레, 1912[2]
언어가 다르기도 하고 지역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하다. 경제적으로 쇠락된 왈롱 지방과 현 주도권을 잡고 있는 플란데런 지방의 갈등은 정부(정확히는 내각) 성립까지 후퇴시켰다. 왈롱에 지원 정책이 세워지면 플란데런 지역은 또 여기에 반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 단순히 지역을 구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던 플란데런과 왈롱이 별도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면서, 이미 연방 국가긴 하지만 양쪽 모두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는 세력이 심각하게 커져서 스위스같은 연방제 국가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어쩌면 연방(federation)을 넘어서 국가 연합(confederation)같은 여러 국가들의 연합체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고, 그보다 더 나가서 아예 별개의 국가들로 완전히 분리될 수도 있다.[3]

거의 매년 여러 일로 지방들이 서로 분리하려고 난리다. 2009년 여름에도 총리가 최후 수단인 의회해산권을 발동하였는데 새로 당선된 총리가 모든(7개)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해서 무효가 되었고, 거의 반 년 간 정부 수반이 없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왕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벨기에 국왕은 국가 원수지 정부 수반이 아니다. 물론 벨기에가 아예 쪼개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왕가의 존재라는 점도 어느정도 있다.

2011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왈롱에서는 국가 분열 시 39%가 프랑스에 합병되는 것을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가 나왔다. 반대로 플란데런 역시 분리되면 바로 네덜란드와 합치자는 여론이 있다. 이쪽을 강하게 내세우는 쪽이 극우파들이라 일단 호응은 크지 않다. 하지만 극우파에 대한 지지와는 별도로 네덜란드와 통합하려는 생각 자체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대체로 플란데런은 우파 성향, 왈롱은 좌파 성향이 강한 편이다. 다만 왕실 지지도는 프랑스어권이 네덜란드어권보다 2배 이상 높다.

국가 수장인 왕은 매번 두 지방들 간의 대화를 이끌어내려고 고생하지만, 영향력은 없다. 덕분에 왕을 향한 국민들의 시선은 좀 많이 불쌍한 사람일 정도다.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던 200여일 간 왕이 지명한 조정관이 플란데런 다수당인 N-VA와 왈롱 다수당인 PS의 협상을 주도했지만 조정관만 9번 바뀌고 해낸 것은 없었다.

2006년 12월 13일, 왈롱 지역의 공영 방송인 RTBF에서 갑자기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플란데런이 일방적으로 독자적인 국가로 분리되기로 선언했다는 뉴스 속보를 방송한다. 평소 저녁 뉴스를 진행하던 간판 앵커, 프랑수아 드브리고드(François de Brigode)[4]가 진행했으며 벨기에의 유명인들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 등이 방송되었기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당시 해외에 있던 왕자 필리프(현 국왕)는 측근에게 소식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건 사실 페이크 다큐였고, 페이크 다큐였다는 사실을 방송을 시작한지 30분이나 지나서, 방송 위원회의 경고를 받고서야 자막으로 표시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RTBF 문서를 참고.

이러한 벨기에의 갈등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적인 대립으로 인해 무정부상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극단적인 정치 대립이 왈롱 주민과 플란데런 주민 간의 대립이 극단적이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RTBF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왈롱인은 취업 문제를, 플란데런인은 이민자 문제를 걱정한다는 차이점을 제외하고 정치성향의 차이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벌어져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사에 있는 그래프와 같이 프랑스어권 정당과 네덜란드어권 정당들이 각자가 속한 두 지역의 이익을 위해 유권자들의 평균적인 정치 성향보다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벨기에 지역갈등의 시작은 프랑스어 단일 언어정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성향, 사회문화, 경제 갈등 등의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렇기에 지역갈등의 원인도 다양하다.

2. 오해

2.1. 벨기에 건국 이전에 왈롱과 플란데런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벨기에 건국 이전에 플란데런 백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다. 이는 (벨기에 영토가 아닌 부분을 제외하면) 현재의 베스트플란데런과 오스트플란데런과 비슷하지만 벨기에 북부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었다. 벨기에 북부가 플란데런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은 플람스 운동 이후이다.[5] 왈롱은 벨기에 건국 이전에 로망스어군을 쓰는 저지대 국가 지역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왈롱이 벨기에 남부만을 의미하게 된 것은 왈롱 운동 이후이다. 벨기에 건국 이전에는 여러 개의 국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 국가들의 군주가 같은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언어사용 경계도 그다지 칼같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부터 확정된 언어 경계에 월경지가 존재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2.2. 언어 사용에 대한 오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방어 사용 비율이 높았다. 왈롱어 역시 그랬다. 북부 네덜란드어 남부 프랑스어가 다수가 된 시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이다.[6] 이를 처음부터 북부 네덜란드어 남부 프랑스어 식으로 이해해버리면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어를 못알아들어서 북부 지역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20세기 초반과 그 이전의 프랑스어는 주로 상류층이 구사했다.

2.3. 플란데런이 악이다 혹은 왈롱이 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갈등이 꼬이고 꼬여있기 때문에 특정 지역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것의 의미가 없다. 오늘날 플람스 운동은 극우 사상을 가진 급진파가 주류이고 이러한 성향을 가진 강성민족주의 정당인 N-VA 플람스의 이익이 연방의회와 플란데런 의회 의석을 많이 가져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작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자유주의자였고 왈롱 운동으로 인해 급진화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어권 정치인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나마 근래에는 프랑스어권 정치인들이 언어 차별에 대한 부분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이미 플람스 운동권이 우경화 된 이후였다.

3. 원인

가장 큰 원인은 프랑스어권 세력을 중심으로 한 언어 차별[7]과 소수의 프랑스어 화자가 다수의 네덜란드어 화자를 지배하는 구도이다. 나머지는 두 원인으로 인해 갈등이 격화된 뒤에 꼬이고 꼬여서 생긴 것들이다.

3.1. 언어 차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1px-Nederfrankisch.png 파일:2000px-Linguistic_map_of_Wallonia-fr.svg.png
네덜란드어 방언 지도 왈롱의 방언 지도
Art. 23
L'emploi des langues usitées en Belgique est facultatif ; il ne peut être réglé que par la loi, et seulement pour les actes de l'autorité publique et pour les affaires judiciaires.
제23조(현재 제30조), 벨기에의 언어 사용은 선택적이다. 이것은 관할 기관의 행위와 법무를 위한 법으로만 정할 수 있다. - 벨기에 헌법(1831) 중에서.[8]
« Les premiers principes d’une bonne administration sont basés sur l’emploi exclusif d’une langue, et il est évident que la seule langue des Belges doit être le français. Pour arriver à ce résultat, il est nécessaire que toutes les fonctions civiles et militaires soient confiées à des Wallons et à des Luxembourgeois ; de cette manière, les Flamands […] seront contraints d’apprendre le français, et l’on détruira ainsi peu à peu l’élément germanique en Belgique. »
"좋은 행정의 기본원칙은 단일 언어의 독점적 사용에 근거한 것이며, 벨기에인의 유일한 언어는 프랑스어가 되어야 함이 명백하다. 이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민간업무와, 군무를 왈롱인과 뤽상부르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 이 방식으로 플란데런 사람들은 프랑스어 학습이 강제되며 이로써 우리들은 벨기에의 게르만적 요소를 서서히 파괴할 것이다."[9]
샤를 로지에, 1832
당시 벨기에 표준 네덜란드어가 없었다보니 북부지방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언을 썼고, 건국 초기 헌법에 플란데런 방언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벨기에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상류층들은 프랑스어 화자였고, 이로 인해 공용어는 사실상 프랑스어 하나 뿐이었다. 현재 네덜란드어권 화자와 프랑스어권 화자의 비율이 약 6:4 정도 되는데 건국 당시에도 네덜란드어권(혹은 그 방언권) 인구가 프랑스어권(혹은 그 방언권) 인구보다 조금 더 많았다.

헌법에 따라 법정에서 플란데런 방언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법조인들은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무시되는게 일상이었다. 이러한 언어 차별로 1840년부터 플람스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1845~1848년 경기불황이 벨기에를 덮쳤는데 그 중 북부지방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플란데런 방언 구사자들은 박탈감에 빠졌고 플람스 운동은 탄력을 받는다.

플란데런 방언의 허용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다가 1898년 4월 18일 언어평등법[10]에 의해 프랑스어와 대등한 지위를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왈롱 운동 진영에서 이 법을 반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방언에 불과한 플람스어가 프랑스어와 대등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방 하원 의회에서는 플란데런 정당 의원이 프랑스어권 정당 의원보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쓰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들어 프랑스어권 정당에서도 연방 하원 의회에서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쓰는 시도를 하고 있다.

3.2.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상황

현재 벨기에의 언어사용 인구는 네덜란드어:프랑스어가 6:4이다. 그런데 이 비율이 건국초기에도 거의 6:4였다. 이는 캐나다와 다른의미로 언어갈등을 불러오기 좋은 구조였는데 상대적으로 다수였던 북부지역의 네덜란드어 사용을 허가하면 북부지역이 이중언어 사용지역이 되어 단일 언어 사용지역이었던 남부지역도 이중언어 사용압박이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남부지역이 이중언어가 되면 벨기에 전체가 네덜란드어로 잠식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네덜란드어권 권리신장운동인 플람스 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왈롱 운동이 발생했다.

3.3. 언어사용 인구와 정치성향

파일:벨기에 2019년 연방 총선 1위 선거구-2000px.png
2019년 연방총선 1위 선거구 지도
역사적으로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사용인구와 프랑스어 사용인구 중 한 쪽이 압도한 적이 없었다. 또한 지역별 정치성향도 달랐는데 북부지역은 가톨릭 정당이 강세였으며 남부지역은 사회주의 정당 혹은 자유주의 정당이 강세인 경우가 많았다. 가톨릭 정당은 플람스 운동의 주요 지지 세력이었고 사회주의 정당은 왈롱 운동의 주요 지지 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평행선을 달리기 좋았다. 현재의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의 인구 비율은 약 6:4 정도 된다.

4. 전개

4.1. 플람스 운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플람스 운동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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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플람스 운동은 네덜란드어가 프랑스어와 대등한 공용어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는 언어평등법의 통과로 목적을 이뤘으나, 상대적 소수였던 프랑스어권의 반발로 벨기에 전체의 이중언어화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실망한 네덜란드어권 정치인들은 북부지역의 네덜란드어화를 추진했다.

4.2. 왈롱 운동

파일:왈롱 깃발.svg
왈롱 깃발
« Les francophones ont eux-mêmes créé le problème. Si, en 1932, ils avaient accepté le régime du bilinguisme, on n’en serait pas là. »
프랑스어 화자들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만약 1932년에 왈롱이 이중언어정책을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장 뤽 드하네, « francophones, le problème vient de vous » Lesoir(2007)
플람스 운동으로 인해 북부지방이 권리를 회복해가자 북부 지방의 가톨릭 세력의 성장과 남부지방의 플람스화를 두려워한 프랑스어권 세력들이 1870년부터 왈롱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북부지방을 이중언어 지역으로 두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남부지방을 이중언어지역으로 삼는 것을 반대했는데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자 플람스 운동의 노선도 북부지방의 네덜란드어 단일 언어를 밀어붙이는 쪽으로 선회했다. 대립이 극심해가는 1912년에는 쥘 데스트레라는 사회주의 정치인이 국왕에게 플란데런과 왈롱의 행정적 분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1870년 이전에는 벨기에 정부와 북부지방 간의 싸움에 가까웠다면 1870년 이후에는 오늘까지 이어지는 벨기에의 지역갈등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차이점이라면 현재 왈롱은 독기가 많이 빠진 상태라는 것과 플란데런 민족주의 세력이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4.3. 플람스 운동의 급진화

파일:플란데런 전투 깃발.svg
플란데런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깃발
1840년부터 시작한 플람스 운동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2차 세계대전에는 나치 부역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플란데런 민족주의 세력도 이 성향을 유지하고 있으며, 네오나치, 성차별, 인종차별, 반이민 성향의 단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플람스의 이익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정치권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4.4. 양차대전

상당수의 플람스 운동 세력은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제국에 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에 협력했다. 나치 부역 자체는 독일어권 프랑스어권도 피할 수 없지만 급진화된 플람스 운동은 이를 이용한 독립을 노렸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았다.

4.5.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

나치에 항복했던 국왕 레오폴드 3세의 귀환 여부를 묻는 투표를 개시했다. 대체로 플란데런, 가톨릭, 시골 주민들의 찬성비율이 높고 반대로 프랑스어권, 사회주의 자유주의 및 공산주의자들, 산업 및 도시지역 주민들이 대체로 반대했다. 투표는 57.68% 찬성이었지만 각 지역의 찬성비율은 플란데런 72%, 브뤼셀 48%, 왈롱 42%였다. 어쨌든 찬성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국왕이 돌아오긴 했으나 격렬한 반대시위를 이기지 못하고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소수의 시위에 의해 엎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플람스 운동 진영에게 큰 앙금을 남겼다.

4.6. 언어경계 설정과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 사태

1960년대에는 남북부 지역 중 언어 사용인구가 다른 지역 몇개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했다. 브뤼셀 경계가 확장되지 않아서 프랑스어 화자가 교외에 거주하는 경우 난감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언어시설로 땜빵했다. 플란데런 측은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진 않기 때문에 이후 BHV갈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공용방송인 BRT/RTB는 RTBF BRT로 분리된다.

1967년에는 반프랑코폰 시위인 뢰번 가톨릭 대학교 소요사태(뢰번 플람스)가 일어났다. 이 시위 이후 KU 뢰번 UC 루뱅이 분리된다.

이후 1970년대에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1980년대에 지역이 만들어져 벨기에는 연방 국가로 바뀐다.

4.7. 두 지역의 경제상황 역전

파일:안트베르펜 항구(버프레이딩스도크).jpg 파일:블레니 탄광(유네스코 세계유산)1280px.jpg
안트베르펜 버프레이딩스도크(좌), 리에주의 블레니 탄광(우)
블레니 탄광은 현재 영업을 중단하고 관광지가 되었고 201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벨기에의 탄전과 철광산 대부분이 왈롱 지방에 집중되어서 벨기에의 성장을 이끈 중공업 또한 왈롱에서 발달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막대한 부가 왈롱인들에게 쏠리게 된다.

반면 한때 서유럽 무역의 거점으로 번영하던 플란데런 지방[11]은 전통 산업이 축소되고 왈롱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을 겪었다. 본래 플란데런인들의 도시였던 브뤼셀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빠져나가는 플란데런인들과 수도로 진출하려는 왈롱인들의 이주로 인해 인구비가 역전되어 왈롱인들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이런 취급이 150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벨기에의 중공업이 축소되고, 관광과 금융으로 플란데런의 산업이 살아나면서 주도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브뤼셀은 과거 지배층은 라틴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민중의 언어는 거의 항상 네덜란드어였다. 이후 나폴레옹 점령 시기부터 프랑스어를 사용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독립 직후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사람들을 브뤼셀 밖으로 쫓아내 버리게 된다. 현재는 네덜란드어권인 헨트도 과거 지배층은 카를 5세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라틴어를 상용하던 곳이다. 그러나 민중의 언어는 헨트나 브뤼셀이나 벨기에 네덜란드어의 뿌리가 되는 브라반트어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 역전은 그동안 지역차별과 전혀 다른 언어권 출신의 지배층에게 당해왔던 피지배층이었던 플란데런이 2차 세계대전과 68혁명을 거치면서 경제상황이 좋지 못한 왈롱을 지원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왈롱에서는 조금이라도 지원을 더 받기 위해 큰 목소리를 내는 형태의 대립을 하게 되었다.

5. 지역갈등에 대한 언어권의 견해

합의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보통 문제가 있을 때 땜질하거나 개헌으로 해결하는 식이긴 하지만 대립 자체가 팽팽해서 그나마 절충 가능한 부분만 적용하는 식이라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고 있다.

5.1. 네덜란드어권

  • 플란데런의 독립: 플람스 자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발을 맞추지 않는다(자유주의 정책 등)면 독립하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플람스 운동은 자치 및 권리 신장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 나치 부역자의 사면: 나치 부역자의 사면을 주장한다. 당연히 프랑스어권 정치인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 벨기에 혁명을 부정: 벨기에의 건국은 프랑스어권 세력 혹은 친불파 세력의 주도로 된 것이므로 벨기에 혁명을 부정하고 있다.
  • 브뤼셀 수복: 플란데런 독립 시 브뤼셀은 수복 되어야 하며 현재의 브뤼셀은 기름 때(프랑스어)가 묻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BHV문제에서도 부정적인 입장이다.

5.2. 프랑스어권

  • 벨기에 혁명을 긍정: 시위대의 다수는 브라반트어 구사자였기 때문에 모두가 협력해서 이룬 것이라는 입장이다.
  • 군주제에 긍정적: 군주제를 부정하는 플란데런과 달리 프랑스어권 정치인들은 군주제를 긍정한다. 또한 이들은 연합주의(unionism)를 긍정한다.
  • 플람스 운동에 부정적: 현재의 프랑스어권 정치인들은 과거 언어 차별이 있었음은 인정하고 있지만 급진화된 부분에 대해서는 변질되었다는 입장이다.

6. 기타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영국의 자치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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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영국의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다우닝가 10번지로부터 벨기에식 연방제는 "비용이 많이들어서 비효율적"이라며 피해야 할 정치체제라는 조언을 들었다.[12] 그런데 그가 추진했던 자치권 이양 정책은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구성국간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 이후의 지방분권 체제의 뼈대는 토니 블레어의 자치권 이양 정책을 기반으로 조금씩 바꾼 것인데 자치권 이양 자체의 장단점을 떠나서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토니 블레어 본인조차 미숙함이 있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7. 관련 문서

8. 참고 자료


[1] [age(1912-08-15)]년이 지난 지금은 연방 국가로서의 벨기에로 유지 중이지만, 근본적인 문제인 지역갈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인용문에 브뤼셀이 없는 이유는 지역으로서의 브뤼셀은 1989년이 돼서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왈롱과 플란데런도 행정구역이라는 개념보다는 (언어)공동체 운동 진영 혹은 정체성에 가까웠고 브뤼셀 사람도 자신의 모국어에 따라 왈롱 혹은 플란데런에 속했다. [2] 이 편지는 벨기에 프랑스어권 정치인이었던 쥘 데스트레가 1912년에 알베르 1세에게 보낸 편지로 A4용지 16페이지 정도 된다. 내용이 엄청 길지만 중요한 부분을 추리면 인용문과 같다. 쥘 데스트레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왈롱과 플란데런의 행정적 분리를 주장했고 이 내용이 편지 끝부분에 쓰여져 있다. 편지는 전달되었지만 국왕이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행정적 분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이는 N-VA에서 주장하는 개혁이다. 오래전부터 주장해오고 있으나, 이것이 국회에 통과되려면 개헌이 되어야하고 당연히 왈롱 측에서 반대를 외치고 있다. N-VA가 왈롱을 상대로 논란이 되는 언행을 많이 보여와서 정당 홈페이지의 자주 묻는 질문에 관련 내용이 전부 쓰여져 있다. 하도 말이 많아서 그런지 표면적으로는 "N-VA는 급진적인 독립을 원하지 않으며 국가 연합으로의 전환은 정치 대립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최종목표는 EU 회원국에 플란데런이라는 이름으로 오르는 것이나 그 절차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계획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서는 브뤼셀 주민의 표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된 영상을 올려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곤 한다. [4] 57세인 2019년까지도 RTBF 저녁 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5] 다만 플람스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플라망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했다. [6] C’est au xxe siècle que la situation linguistique va changer radicalement: la société qui était majoritairement unilingue dialectophone va devenir unilingue francophone. Cette évolution s’est opérée en deux étapes : l’acquisition généralisée du français, suite à l’instruction obligatoire votée à la veille de la Première Guerre mondiale, et la rupture de la transmission intergénérationnelle des dialectes au sein des familles, suite aux mutations socio-économiques après la Seconde Guerre mondiale. [7] 당시에는 자유주의 세력이었다. [8] 이 조항은 현재 벨기에 헌법 제30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아래의 언어지역에 대한 부분과 공동체에 대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벨기에 헌법 30조는 큰 의미가 없지만, 당시에는 언어에 대한 헌법 조항이 이것 뿐이라 문제가 많았다. 당시 벨기에 정치인들은 프랑스어만 써야한다고 생각했던지라 겉으로는 공용어를 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어 단일언어 정책으로 굴러갔다. [9] 당시에는 지역이라는 개념 보다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의도로 Wallons(왈롱)과 Flamands(플라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프랑스어를 포함한 오일계 방언을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와 그 계열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0] 정식명칭은 "공공부문의 플람스어 사용에 관한 법률"이다. 여기서 플람스어는 벨기에 표준 네덜란드어가 아닌 벨기에 북부지역의 네덜란드어 방언을 의미한다. [11] 브뤼셀 근교의 브뤼헤 등의 도시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브뤼헤는 서유럽 무역의 거점으로 '서유럽의 베네치아'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직물 공업이 쇠락하고 도시 주변의 수로가 막혀버렸다. 그래도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벨기에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12] 벨기에의 연방제는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에 정치위기와 같이 그에 따른 비효율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도입을 피해야 한다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영국의 정치구조가 단순히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자치권만 던져준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도 바보는 아니라서 잉글랜드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을 추진하려 했지만 노스이스트 잉글랜드의 자치권 이양 투표가 압도적인 다수로 부결된 이후 그레이터 런던을 끝으로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는 자발적으로 뭉치는 방식으로 자치권을 이양하고 있지만, 웨스트 로디언 질의를 해결하기에는 잉글랜드로의 자치권 이양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 계획이 파기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즉, 영국 정부도 벨기에를 보고 뭐라할 처지가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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