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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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제91·93·100·110·119·121·123대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키리아쿠 베니젤로스 Ελευθέριος Κυριάκου Βενιζέλος Eleftherios Kyriakou Venizel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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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4년 8월 23일 | ||
오스만 제국 하니아 | |||
사망 | 1936년 3월 18일 (향년 71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재임기간 | 제91대 총리 | ||
1910년 10월 19일 ~ 1915년 3월 10일 | |||
제93대 총리 | |||
1915년 8월 23일 ~ 1915년 10월 7일 | |||
제100대 총리 | |||
1917년 6월 27일 ~ 1920년 11월 17일 | |||
제110대 총리 | |||
1924년 1월 11일 ~ 1924년 2월 6일 | |||
제119대 총리 | |||
1928년 7월 4일 ~ 1932년 5월 26일 | |||
제121대 총리 | |||
1932년 6월 5일 ~ 1932년 11월 4일 | |||
제123대 총리 | |||
1933년 1월 16일 ~ 1933년 3월 6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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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5eaf><colcolor=#fff> 배우자 |
마리아 엘레프테리우 베니젤루 (사망) 엘레나 베니젤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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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2명 | ||
학력 |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 ( 법학 / 학사) | ||
종교 | 정교회 ( 그리스 교회) | ||
최종 당적 | 자유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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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제91, 93, 100, 110, 119, 121, 123대 총리. 현대 그리스를 세운 국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2. 생애
2.1. 초기
1864년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크레타 섬 하니아 시 근방의 무르니에스(Μουρνιές)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니젤로스의 조상의 원래 성씨는 크레바타스(Κρεββατάς)로 원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살았으나 1770년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당국에 반란을 일으킨 오를로프 봉기 당시 오스만 편에 가담한 알바니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하자 가문의 일원이었던 베니젤로스 크레바타스(Μπενιζέλος Κρεββατάς)가 크레타 섬으로 탈출해 자수성가를 이룬 후 이후 그의 아들들이 성씨를 베니젤로스로 바꿨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오스만의 압제에 대항하여 그리스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혁명가 키리아코스 베니젤로스였으며 아버지의 사상 그 자체도 있으나 무엇보다 1866년의 크레타 반란에 가담한 아버지 탓에 유년기 8년 동안 크레타 인근의 시로스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경험은 어린 베니젤로스의 사고와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1881년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50년 된 그리스 왕국의 수도 아테네로 가 법학을 전공하고 1886년 고향인 크레타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이 당시 그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다양한 외국어를 공부했고, 모범적인 법관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젊은 베니젤로스의 마음 속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크레타의 독립을 쟁취하고 그리스 민족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1889년 베니젤로스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크레타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하니아 지역구의 대표 대의원 자리를 얻는다. 달변인 데다가 비상한 머리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 당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 왕국의 대립 사이에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던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와의 통합 여론을 주도하는 반 오스만 파의 선봉장으로 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당시 크레타 섬을 통치하던 오스만 제국은 대내외적으로 근대화와 열강들의 침탈 야욕이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부딪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크레타 섬에 부여했던 자치권을 회수하고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사람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다. 베니젤로스를 비롯한 친 그리스파는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날만을 기다려 왔다.
2.2. 정치 생활
50여 년 전 그리스 독립 전쟁 때부터 1890년대 당시까지 크레타 섬에서는 오스만에 대항하고 그리스와 통일하기 위한 수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대부분은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다만 1866년의 반란은 서구 열강의 개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할레파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인구수를 지닌 크레타인 무슬림들의 지지에 힘입어 1880년대부터 오스만은 다시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 1897년 크레타 섬의 자치권을 둘러싸고 큰 소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일반적 분쟁으로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은 점점 더 크게 퍼져 가기 시작한다. 베니젤로스의 고향과 가까운 크레타의 제2의 도시 하니아를 비롯, 여러 곳에서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는 무슬림 주민들이 그리스계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이에 그리스 왕국 정부는 파병을 결의한다. 함대와 함께 도착한 그리스 총사령관은 국왕의 이름으로 크레타와 그리스의 통합을 선언, 명분을 얻은 그리스계 반란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으로 번지는 크레타 사태 속에서 베니젤로스는 2,000여 명의 반란군을 소집하고 그 리더가 되어 오스만군의 군사 거점 아크로티리를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탄에 무너진 국기를 목숨을 걸고 세우고 서구 열강의 대표들에게 크레타는 그리스라고 일갈하는 등 그가 보여 준 신화적 행적은 후일까지 그의 애국심을 보여 주는 일화로 꼽히며 칭송받는다.
분쟁 조정을 위해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 왕국의 궁정에 서한을 보내 크레타 섬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 자치권이 보장되는 자치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은 이런 조정안에 동의했지만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인 크레타 섬 주민들과 그리스인들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 이런 와중 1897년 오스만 제국 북부 그리스 접경의 테살리아에서 양국 간 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독일의 지원을 받아 신식 장비와 현대화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오스만군은 그리스군보다 훨씬 강력했고 짧은 전쟁은 그리스의 대패로 끝나게 된다. 결국 열강의 조정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크레타는 1898년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보호 하에 있으나 실질적 독립국인 크레타 자치국으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신생 독립국이 된 크레타 자치국은 비록 명목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휘하에 있었지만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가 정부 수반의 역할을 하는, 실질적으로 그리스계에 의해 주도되는 그리스인들의 국가였다. 베니젤로스는 재구성된 자치 의회에서 크레타인들을 대표하는 의장이 됨과 동시에 사법부 장관의 역할을 맡게 되고 그리스와의 통합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려 노력했으나 열강의 입장을 수용하여 크레타가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지지하던 최고 행정관 요르요스 왕자와 충돌하게 된다.
요르요스 왕자는 크레타 섬에 대한 행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그리스계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베니젤로스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엔 기반이 너무도 약했던지라 결국 1906년 사임하게 된다. 당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오스만 제국에서는 청년 튀르크당 사건을 비롯해 각종 봉기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며 베니젤로스는 이를 이용하여 그리스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 크레타 섬에서 독자적이고 침범 불가한 위치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1908년 크레타 자치 의회는 결국 일방적으로 자치령의 폐지와 그리스 왕국으로의 통합을 선언한다. 당시 열강들은 이러한 베니젤로스의 독단적 행위에 우려를 표했고 심지어 아테네 정부조차도 오스만 제국과의 군사적 재충돌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움직임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환자와 다름없던 오스만은 그리스에 대해 특별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리스 왕국 정부는 이후 1913년까지 공식적으로 크레타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크레타 자치 의회의 자국 통합 의결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는다.
한편 그리스 본토에서는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에 자극받은 그리스군 장교들이 군사 연맹이라는 사조직을 결성하여 개혁 1909년 5월 개혁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디미트리오스 랄리스(Δημήτριος Ράλλης, 1844–1921) 총리 내각을 붕괴시키고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Κυριακούλης Π. Μαυρομιχάλης, 1850–1916) 총리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개혁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 연맹은 정작 그 개혁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다 쿠데타 초반에 얻었던 대중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결국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된 군사 연맹은 타개책으로 크레타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니젤로스를 아테네로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군사 연맹의 요청을 받고 아테네로 건너간 베니젤로스는 국왕 요르요스 1세에게 의회 개혁과 선거를 통해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기존 정치계는 베니젤로스의 독단에 반발하였으나 하루빨리 국내 정치를 안정시켜야했던 국왕의 결정으로 베니젤로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군사 연맹은 해산되고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Στέφανος Δραγούμης, 1842–1923) 총리의 신정부가 구성되어 1910년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기존 정치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던 무소속 의원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들 무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베니젤로스를 지지하고 있었고 베니젤로스는 이들을 규합할 정치적 구심점이 필요하여 총선 직후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2.2.1. 그리스 총리
2.2.1.1. 개혁과 발칸 전쟁
자유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베니젤로스의 개혁에 청신호가 켜졌음에도 베니젤로스에게는 개혁을 확실하게 밀고 나갈 추진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베니젤로스는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이 선거를 보이콧한 가운데 재선거에서 자유당은 362석 중 300석 넘게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베니젤로스는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베니젤로스가 이끄는 신정부는 그리스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대규모 개혁에 착수했다.베니젤로스의 개혁은 정치와 사회, 경제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기존의 헌법을 개정하여 자유주의적 성격의 1911년 헌법을 도입하였으며 일부 기간사업의 국유화와 누진세 도입, 초등교육 의무화, 아동노동과 여성의 야근 폐지, 최저임금 보장, 노동법 도입과 노동조합 결성 허용, 토지 개혁과 협동조합의 결성, 농업 교육을 통한 전문 농업인 양성, 공무원의 임기 보장과 사법부의 독립 보장, 치안 확보, 농업부와 국가경제부의 창설을 통한 산업 육성 등을 실시하였다. 개혁의 결과 그동안 계속 적자를 기록하던 정부 예산이 1911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조세포탈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스 드라크마의 가치가 안정화되면서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도입도 한결 수월해졌다. 이렇게 한결 수월해진 차관 도입으로 다시 산업 육성이 이루어지면서 경제가 발전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또한 지난 1897년의 전쟁의 패배에 일조한 군대 역시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육군의 경우 주적인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으로부터 군사고문단을 들여 독일식으로 군제 개혁을 진행하자 독일과 적대관계이자 전통의 육군 강국인 프랑스으로부터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으로 군제를 개혁했다. 또한 낙후된 무기 역시 프랑스제 무기를 대거 들여와 현대화에 착수했다. 해군의 경우 예전부터 나름 공을 들여 양성한 만큼 육군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으나 주적인 오스만 해군에 비해 열악한 전력이었던 마찬가지였기에 전력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영국 군사고문단의 도움으로 개혁을 진행했다. 이렇게 양성한 군대는 나중에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편 크레타의 일방적인 그리스 편입 결의를 보류한 이후 계속해서 묵혀두었던 크레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니젤로스는 청년 튀르크당과 여러 차례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청년 튀르크당은 전쟁 위협을 해왔고 이에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문제를 비롯해서 마케도니아 문제 등 오스만과 분쟁을 일으킬만한 사항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수단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때마침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불가리아가 전쟁을 통해 오스만 영토를 분할할 목적으로 동맹을 체결할 움직임을 보이자 그리스 역시 이피로스와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 등 오스만 영토 내의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3개국의 동맹에 가담하였고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각각 공수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서 오스만 영토 분할을 목표로 한 4개국의 발칸 동맹이 결성되었다.
1912년 10월 8일 발칸 동맹의 일원이던 몬테네그로가 먼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나머지 3개국 역시 17일에 오스만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오스만과 발칸 동맹 간의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편 전쟁 발발 직전인 10월 1일에 베니젤로스는 지난 1908년 크레타 자치국이 통과시켰던 그리스와의 통합 결의안을 승인하고 크레타와의 통합을 선언하면서 그리스는 크레타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유럽의 환자라고는 하지만 발칸 반도의 소국들과는 국력 차가 크니 제아무리 발칸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고 해도 오스만이 쉽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발칸 동맹이 대승을 거두었고 결국 1913년 5월 런던 강화조약이 체결돼 오스만 제국은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의 모든 유럽 영토를 발칸 동맹에게 양도했다.
발칸 동맹이 오스만에게 완승을 거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아드리아 해 진출을 막으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개입으로 알바니아가 독립하면서 세르비아의 계획이 어긋나자 이제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옛 오스만 영토의 배분을 놓고 발칸 동맹의 당사국끼리 갈등이 시작되었다. 삼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마케도니아를 두고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주도권을 쥐려는 욕심으로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점령한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정식으로 동맹을 체결했고 결국 1913년 6월 13일 불가리아의 선제 공격으로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공세를 저지한 후 역으로 불가리아 영토로 진격하였고 여기에 남도브루자 지역을 두고 불가리아와 갈등을 빚던 루마니아가 이를 기회로 보고 발칸 전쟁에 개입하였다. 또 지난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일부나마 수복할 기회를 포착한 오스만 역시 불가리아를 공격해오면서 불가리아는 사면초가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버티지 못한 불가리아가 강화를 요청하여 1913년 7월 13일 부쿠레슈티에서 발칸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결과 그리스는 전쟁 발발 당시 최우선목표였던 테살로니키를 비롯해서 마케도니아 남부지역과 이피로스 지역의 대부분, 그리고 크레타 섬을 공식적으로 합병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그리스는 11월에 부쿠레슈티 조약에 참가하지 않은 오스만 제국과 따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부쿠레슈티 조약의 결과를 오스만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발칸 전쟁 당시 그리스군이 점령한 레스보스와 히오스 섬, 사모스 등 북동부 에게 해 제도에 대해서는 오스만이 그리스의 영유권 인정을 거부했고 1914년 열강의 조정 결과 임브로스와 테네도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섬이 그리스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에게 해 제도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오스만은 이 조정 결과 역시 거부했고 패전의 분풀이로 아직 오스만 영토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을 박해하였다. 이 에게 해 제도 분쟁과 아나톨리아 그리스인 문제는 몇 년 후 로잔 조약으로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그리스와 오스만 사이에 또다른 불안요소로 남게 된다.
아무튼 베니젤로스의 과감한 결단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 그리스는 두 차례의 발칸 전쟁에서 당당하게 승전국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의 영토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인구 역시 270만 명에서 45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대중은 지난 1897년의 패전을 이자까지 쳐서 갚은 대승에 열광했고 베니젤로스는 일약 영웅으로 등극했다.
2.2.1.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총리 베니젤로스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 참전할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이는 나라를 두 쪽으로 분열시켰다. 국왕은 독일 출신이라 친독적 중립을 주장했고, 베니젤로스는 협상국 편을 들었는데 국왕의 총리 해임과 반발 등을 거치면서 결국 베니젤로스의 주장이 관철되어 콘스탄티노스 1세는 퇴위했고, 그리스는 협상국으로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다. 1919년에는 불가리아로부터 서부 트라키아를, 이듬해에는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여 튀르크로부터 동부 트라키아 지방을 연이어 쟁취하고, 이즈미르 주변을 점령하여 아나톨리아의 영토까지 확보하며 영토가 173,779㎢로 늘어났다.그러나 정작 베니젤로스는 1920년 총선거에서 대패했고, 마침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남이자 후임 국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급서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는 반베니젤로스파가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99%의 지지를 받아 1920년 12월 19일 복위하였으며, 베니젤로스는 망명을 떠났다.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당파는 무리하게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고 결국 로잔 조약에서 스미르나, 동트라키아 지역을 도로 튀르키예에 내줘야 했다. 지지도가 바닥을 찍게 된 콘스탄티노스 1세는 결국 책임을 지고 장남 요르요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망명한다.
2.2.1.3. 그리스 제2공화국
그 와중이었던 1923년에 국민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폐지되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요르요스 2세는 망명을 떠났고, 그리스에서는 헌법 개정을 거쳐 1924년에 공화정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화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튀르키예에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쫓겨난 그리스인들이 대거 공화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며, 이들은 공화파의 거두였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반면 인민당 등 왕당파의 세력도 건재했고 이들은 제2공화국 정치체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베니젤로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망명을 가 있었는데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베니젤로스는 다시 귀국하였고, 베니젤로스 반대파의 총선 보이콧으로 초대 제2공화국 의회는 베니젤로스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베니젤로스는 이에 따라 그리스로 귀국했으나 군주제 지지자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다시 그리스를 떠났다.1925년에는 테오도로스 팡갈로스(Θεόδωρος Πάγκαλος, 1878–1952)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 정부를 세우고는 불가리아 왕국과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국제연맹의 개입으로, 오히려 배상금을 물어주고 물러나면서 정부가 무너졌다.
이후 다시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선거가 실시되어 베니젤로스가 속한 자유당이 250석 중 178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베니젤로스는 다시 귀국하여 그리스 총리가 되었다. 베니젤로스는 이전 정부가 주변국과 마찰을 빚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음을 고려해 원수나 다름없던 튀르키예, 불가리아 왕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 외 주변국인 유고슬라비아 왕국, 알바니아 왕국과도 관계 증진에 노력했다. 또한 오랜만에 정국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은 짧은 안정을 종식시켰다. 안 그래도 가난했던 그리스는 대공황에 큰 타격을 받았고, 자유당은 1933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왕당파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에 베니젤로스를 위시한 공화파는 크게 반발했고, 결국 공화파 장교들이 베니젤로스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베니젤로스는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왕당파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베니젤로스파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베니젤로스 본인도 암살 위기를 겪었다.
2.2.2. 이후
1935년에 왕당파 내각은 다시 총선거를 치렀지만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 하에서 치러지는 선거에 뭔 의미가 있으랴... 베니젤로스파는 선거를 보이콧했고, 왕당파가 전 의석을 차지하고는 군주제를 골자로 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요르요스 2세가 그리스 국왕으로 복위했다. 이로서 제2공화국은 종말을 고했다.2.3. 사망
복위한 요르요스 2세는 국가 안정을 위해 베니젤로스를 사면했다. 그러나 왕당파는 베니젤로스 사면에 불안을 느꼈고[1] 베니젤로스는 국왕과 협력할 뜻을 밝혔지만 왕당파의 불안으로 인해 그리스 국내가 다시 혼란해질 것을 우려해 그리스로 귀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당 정권이 수립됨을 보고 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며 그리스 국내의 단결을 호소했다.그는 결국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36년 3월 18일에 망명지 파리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정치적 고향이자 실제 고향인 크레타 섬에 매장되었다.
3. 여담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아들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유당 소속으로 총리를 역임했다.
- 수도 아테네에 위치한 아테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은 본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현 그리스 50센트 주화에 새겨져 있다.
[1]
마침 총선을 다시 치르니 베니젤로스파와 왕당파가 비슷한 의석을 점해 정부 구성이 안 되던 때라 왕당파의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