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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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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FC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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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박용호 朴容昊 | Park Yo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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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81년 3월 25일 ([age(1981-03-25)]세) | |
인천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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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83cm, 76kg | |
직업 |
축구 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 코치 |
|
학력 | 인천석남서초 - 부평동중 - 부평고 | |
프로 입단 | 2000년 안양 LG 치타스 | |
소속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선수 |
안양 LG 치타스/
FC 서울 (2000~2011) → 광주 상무 불사조 (2005~2006 / 군 복무) 부산 아이파크 (2012~2013) ATM FA (2014) 강원 FC (2015~2016) |
감독 |
강원 FC (2015~2016 / 플레잉 코치) 강원 FC (2017 / 코치) FC 서울 (2018 /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9~ / 코치) |
|
국가대표 | 1경기 ( 대한민국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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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지도자. 선수 시절 중앙 수비수로 활동했으며 상당히 잘생겨서 미남 수비수로 유명했다. FC 서울 소속으로 오랜 기간 활약하면서 역사의 한 축이 되었다.2. 클럽 경력
2.1. 프로 입단 이전
박용호는 부평고 시절 동갑내기 최태욱, 이천수와 함께 1999년 부평고 트로이카로 불리던 특급 유망주였다.[1][2] 그만큼 많은 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박용호 영입 경쟁 역시 치열했다.2.2. 안양 LG 치타스 / FC 서울
박용호는 부평고 졸업 후 최태욱과 함께 2000년 지역 연고 구단이던 안양 LG 치타스에 입단했다. 초기에는 청소년 대표팀에 너무 자주 불려다니는 탓에 소속팀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도 신인 시절 팀의 K-리그 우승에 일조했고, 이후에도 안양에서 20경기 이상 출전하며 주전급 선수로 활약했다.
한편 같이 입단한 최태욱은 더 많은 출전 기회와 원하는 포지션에서의 출장을 위해 새로 창단한 고향 팀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지만, 박용호는 팀에 남아 연고복귀한 FC 서울에서도 활약했다. 하지만 서울 이전 첫 시즌에는 올림픽 대표팀 차출과 부상이 겹치며 5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5년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대해 2006년까지 2년 동안 거의 70경기를 소화하며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2007 시즌을 앞두고 서울에 복귀했으며, 새로 출범한 세뇰 귀네슈 감독 체제에서 국가대표 김치곤, 김진규 주전 센터백 라인의 백업 역할을 했다.
2010 시즌을 앞두고 주장 김치곤이 울산으로 이적하자 넬로 빙가다 체제에서 주장에 선임됐고 주전으로 주전급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K-리그, 리그컵 더블에 기여했다. 2011년에도 주장직을 연임했으며 김진규마저 떠난 팀에 수비진을 이끌었으며 황보관- 최용수로 감독이 바뀌는 혼란한 시기에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주장으로 역임한 2년 동안 김치곤, 김진규가 차례로 팀을 떠났음에도 아디에게 밀리거나 신인 김동우에게 밀리는 등 서울에서 제대로 주전으로 활약한 시즌이 한 시즌도 없다고 봐도 된다.
2.3. 부산 아이파크와 해외 이적
오랜 기간 서울에서 활약한 박용호였지만 서서히 노쇠화가 시작되었고, 때마침 서울은 2012 시즌을 앞두고 김주영을 영입하면서 박용호에 대한 대체 준비를 마쳤다. 이 때 여효진, 황재훈 등이 부상을 당하면서 수비라인이 얇아져 수비 강화를 노리던 부산 아이파크의 러브콜이 맞물려 부산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의 안익수 감독은 2년 전 박용호가 서울에서 주장을 막 달았을 때 수석코치로 몸담았던 바 있다.
2012 시즌 초반에는 출전하지 못해 우려를 샀으나 적응이 된 이후 부산에서 질식 수비의 핵심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팀은 2012 시즌 상위 스플릿 진출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2013 시즌을 앞두고 김창수가 가시와 레이솔로 떠나자 부산 입단 2년 만에 주장을 맡았다. 2013 시즌에도 박용호는 윤성효 감독의 부산 수비의 중심이었고,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부산을 상위 스플릿으로 한 번 더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연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선수라 부산에서는 박용호를 계속 잡는 데 부담을 느꼈고, 결국 2014 시즌에는 말레이시아 슈퍼리그 소속 ATM FA로 이적하였다. 당시 이적료가 발생하는 FA였던 박용호의 영입을 국내 팀들은 부담스러워했고, 이런 사정이 맞물려 해외로 진출한 것이었다.
2.4. 강원 FC
1년간의 해외생활을 마친 박용호는 2015 시즌 2부리그에 있던 강원 FC에 플레잉코치로 입단했고, 간간히 출전하면서 활약을 이어나갔다. 이후 2016 시즌이 종료된 뒤 은퇴하면서 완전히 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부평고 트로이카로 불리던 시절에는 최태욱, 이천수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대표팀에 정말 자주 불려다녔다. 이에 따라 청소년 대표팀에서의 출전 기록도 두자릿수에 이를 정도.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엔트리에 포함되면서 성인 대표팀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경기에서 기용되지 않으면서 데뷔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2002 월드컵 출전도 불발되었다. 그래도 부산 아시안게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 꾸준히 선발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결국 2004년 6월 5일, 터키와의 친선경기에서 정식으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지만 이 이후로는 대표팀에 계속 선발되지 못하면서 결국 동년배인 최태욱, 이천수에 비해 아쉽게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수비 진영의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제공권도 우수했다. 노쇠화되면서 발이 느려져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부산 이적 이후 공수 양면에 큰 기여를 했다.5. 지도자 경력
플레잉 코치로 강원에서 활동하다가 2017년에는 코치로 완전히 보직을 이동했으며, 2017 시즌이 종료된 이후 강원을 떠났다.2018년 5월 4일 슈퍼매치 하루 전날, 김성재 코치와 함께 서울의 새 코치로 선임됐다. 김성재 코치가 최용수 감독 시절 수석코치를 담당했던 만큼 박용호 코치는 막내 코치 역할을 하게 될 듯.
2019 시즌을 앞두고 자신의 고향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신임 코치로 임명되었다. 새롭게 전력강화부장으로 임명된 이천수가 박용호와 부평고 동기라는 점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2 시즌 구단 최초의 ACL 진출에 일조했다.
2022년 11월 7일, 대한축구협회 P급 지도자 강습회 수강생으로 선발되었다. #
6. 기타
- 강원 FC 시절 구단 홍보를 위해 탈의를 하고 누드포스터를 찍은 적이 있다. #
-
친정팀
FC 서울의 창단 40주년 축하 영상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