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3:24:06

윤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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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윤상철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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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시티즌 FC 감독 겸 대표이사
Pyeongtaek Citizen FC
파일:윤상철.jpg
<colbgcolor=#35c5f0> 이름 윤상철
尹相喆 | Yoon Sang-Chul
출생 1965년 6월 14일 ([age(1965-06-14)]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 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colbgcolor=#35c5f0> 선수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1988~1997)
마르코니 스텔리언스 FC (1998)
뉴캐슬 브레이커스 FC (1999)
지도자 경신고등학교 (2004~2012)
평택 시티즌 FC (2019~)
경영 평택 시티즌 FC (2017~ / 대표이사)
국가대표 1경기 ( 대한민국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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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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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5c5f0,#191919> 학력 숭곡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등번호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 8
주발 오른발
별명 얼룩 치타, 동대문의 사나이
}}}}}}}}}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평택 시티즌 FC 대표이사 & 감독
4. 논란5. 플레이 스타일6. 수상7. 윤상철에 대한 말, 말, 말8.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파일:윤상철1.jpg
대한민국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자 축구 행정가. 현재 K3리그 참가팀 평택 시티즌 FC의 대표이사직과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신태용, 김현석, 고정운과 더불어 1990년대 K리그를 풍미한 K리그와 FC 서울의 레전드. 1988년부터 1997년까지 FC 서울[2] 소속으로만 활약하며 통산 306경기 102골 32도움, K리그 최초 개인 통산 100골, 300경기 출전, 대상 3관왕[3]을 기록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지만,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자신이 헌신한 구단에 토사구팽 당하며 불운하게 커리어를 마무리하였다.

2. 선수 경력

파일:Screenshot_2019-07-05-07-14-52-1-1.png

2.1. 프로 데뷔 전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으로 뛰었는데 주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이때부터 득점감각이 빼어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2. 럭키금성 황소 시절

1988년 드래프트 1순위로 럭키금성에 입단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고재욱은 미드필더로 놓기에는 아까웠던 윤상철의 득점감각을 감안해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시켰다. 첫 시즌 18경기 4골을 넣어 프로무대에 연착륙에 성공했다. 2년차인 1989년 리그 17골을 성공시켜 스타덤에 올랐다. 3년차인 1990년 12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럭키금성의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2.3. LG 치타스 시절

준우승을 차지했던 199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위권을 맴돌던 LG 치타스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골게터였으며 특히 1994년 21골을 터뜨리면서 두번째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기근에 이어 K리그 역대 최초 두 번째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한 두 번째 선수가 됐다.

2.4. 안양 LG 치타스 시절

파일:20130215160718_0_5555.jpg
두번째 득점왕 이후 잠시 주춤하던 윤상철은 1996시즌 다시금 힘을 내면서 14골을 득점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듬해 1997년 부진했으나 윤상철의 득점 주기를 보면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LG는 리빌딩을 선언하면서 윤상철과의 재계약을 포기했고 임의탈퇴를 걸었다.

3. 지도자 경력

안양 LG 퇴단 이후 30대 초반으로 은퇴하기엔 이른 나이였던 윤상철은 선수 생활을 걸고 호주로 날아갔으며 그 곳에서 2년을 뛰고 축구화를 벗었다. 이후 차범근 축구교실 코치와 경신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다.

은퇴 후에도 자신을 내쫓다 시피한 구단임에도 애정을 보이고 있으며 2007년 FC 서울 시축행사에 피아퐁과 참여했으며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열린 FC서울 창단 30주년 맞이 기념 축구경기에 참여했으며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개막 전 인터뷰에서 FC서울의 우승을 기원했다. 관련 기사

3.1. 평택 시티즌 FC 대표이사 & 감독

2016년 기사에 따르면 경신고 감독직에서 내려온 후 K3리그 신생팀 평택 지-스마트 FC (현 평택 시티즌 FC) 감독직을 수락하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하지만 K3리그 참가팀의 임원을 지도자로 등록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벤치에는 기술고문인 조정호 감독이 대신 앉아있었다.

2019년부터 평택 시티즌 FC 감독으로도 공식적으로 등록되면서 감독으로서 벤치에도 앉기 시작했다.

창단 첫해 리그 2위를 기록하며 K3리그 베이직에서 K3리그 어드밴스로 승격하였으며, 2020년이 되어서 어드밴스는 K3로, 베이식은 K4로 재출범하면서 K3리그 무대를 누비게 되었다.

2021년에는 스페인 FC 바르셀로나 출신 장결희도 자유계약으로 영입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21년 1일 평택시청에서 ‘프로축구단 창단 등 축구 발전방향 논의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며 프로 구단이 되기 위한 첫 단추를 뀄기도 하였다.

4. 논란

평택 시티즌에 있으면서 일부 평택 선수들의 임금이 1년 가까이 체불되면서 선수단의 사기가 꺾여있으며, 특히 수당 계약을 맺은 선수들은 지난해에 10원도 받지 못했고, 그런 선수가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3리그에서 구단과 선수가 계약을 맺는 방법은‘연봉 계약’과‘수당 계약’으로 두 가지다. 평택시청으로부터 기본급을 받는 연봉제 선수들은 문제없이 급여를 받는다고 하지만 수당제 선수들은 2020년치 훈련수당·출전수당·승리수당이 모두 체불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한다. 일부 선수들은 구단 사무국을 찾아가 수당 지급 여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곧 입금해주겠다" 뿐이었다. 수개월째 반복되는 대답에 선수들 모두 지쳐있다고 한다.

또한 K3리그 구단을 운영하려면 먼저 법인화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평택 구단은 법인이 2개여서 다소 복잡한 구조라고 한다. 팀 이름대로라면 ‘시민구단’이지만 따지고 보면 시민구단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이러한 평택 임금 체불 문제 등으로 협회 내부에서 심의위원회가 예정되어 있고, 위원회 결과에 따라 리그 퇴출까지 가능한만큼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말하고 있으나, 계속 지지부진하면 결단을 내릴수 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엔 선수들이 임금을 못 받은 채로 팀이 공중분해가 될 수 있다.

이를 보아 대표 이사로서 윤상철의 구단 운영에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리고 애초에 한 사람이 대표이사와 감독이라는 두 자리를 모두 겸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평택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K3리그 소속 팀이어서 주목을 덜 받은 것 뿐이다. 당장 김호 강인덕 등을 비롯한 여러 구단 대표들이 지나치게 감독의 역할에도 간섭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문제가 제기되어 왔던 것이었고, 이런 문제가 거론됐던 팀들은 대부분 성적을 비롯해서 내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 프런트로서 구단 운영과 선수단의 운영은 엄연히 별개의 업무임으로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5. 플레이 스타일

PC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등등 거대 커뮤니티에서 K리그를 씹어먹는 윤상철을 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그는 역대 어느 대표팀 감독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는데 이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당시 한국에선 활용하기 힘든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체격이 큰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발이 느렸고 경합능력도 떨어져서 서정원처럼 스피드로 수비수를 제치거나 최용수 김도훈처럼 공중볼 척척 따내고 여차하면 피지컬로 상대 수비진을 비집고 들어가 골문을 열어젖히지 못했다. 활동폭도 좁아 황선홍처럼 페널티 박스 밖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플레이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눈이 즐거운 개인기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산 101골 넘게 집어 넣을 수 있었던 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득점감각과 슈팅센스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슈팅파워는 평범한데 골키퍼와 수비수의 허를 찌르며 툭 차 넣는 타이밍이 예술적이었고 수비진 교란과 오프사이드 트랩 무력화에도 능한 포처 스타일이었다.[4] 피지컬로 밀어붙이던 시절에 기교로 승부했다는 김현석보다도 더 유니크한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은 그 당시 한국 대표팀에선 써먹을 방법이 아예 없었고 경쟁자들은 너무 강했다. 당시 한국은 스트라이커는 무조건 피지컬 좋고, 발이 빨라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지도자들 일색인 축구 후진국 이었다. 더군더나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라는 역대급 타겟형 스트라이커 3명이 날개를 편 시점이었다. 요즘 태어났으면 보다 체계적으로 교육받아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끌어올리고, 전술적으로 맞춰서 활용이 가능했겠지만 90년대에는 어느것도 무리였다.

6. 수상

  • 개인 수상
    • K리그 득점상 (2회): 1990, 1994
    • K리그 도움상 (1회): 1993
    • K리그 베스트 11 (4회) : 1989, 1990, 1993, 1994
    • K리그 감투상 (1회) : 1993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우승 (1): 1988
  • K리그1
    • 우승 (1): 1990
    • 준우승 (2): 1989, 1993
    • 4위 (2): 1988, 1992
  • 리그컵
    • 준우승 (2): 1992, 1994
  • FA컵
    • 3위 (1): 1997

7. 윤상철에 대한 말, 말, 말

한마디로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는 꾸준한 슈터
고재욱 출처
LG의 공격축구는 윤상철의 득점과 궤를 같이한다.
조영증 출처
친했던 선수요? 아무래도 90년도에 럭키 금성에서 함께 활약하면서 득점왕을 거머쥐었던 윤상철 선수죠. 눈빛만 봐도 통했어요. 아주 영리한 선수였고, 볼을 잡으면 위치만 봐도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죠.
최대식 출처
윤주태가 신기하게 골을 잘 넣는다. 문전에서 움직임이 좋고, 골 냄새를 잘 맡는다. 윤상철 형이 생각이 난다.
최용수 출처

8. 이야깃거리

  • 위에서 언급했듯이 K리그에서는 레전드급 활약을 펼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팀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었다. 국가대표로서는 1992년 10월 21일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있었던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에 단 1경기 나온것이 전부이다.
  • FC 서울 최다 득점 기록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선수지만, 국가대표 활약상이 없고 서울연고공동화 정책으로 연고이전/복귀 과정을 거쳐야 했던 서울이라 인지도가 낮다. 라이트 팬들은 까마득한 옛날 선수에 국가대표 활약상도 전무하니 기억이 없고, 코어 팬덤은 큼직한 물갈이만 2번 해 90년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5]
  • 평택 시티즌에서 감독직과 대표이사직을 동시에 맡고 있는데 평택 구단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축구팬들이나 대중의 관심이 적은 실업팀이어서 그렇지 만일 프로팀에서 이랬으면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6]
  • 2022년 8월 20일 여주종합운동장에서, 평택의 서포터에게 오지말라는 막말을 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8][9]


[1] 중앙 공격수 [2] 럭키금성 황소,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 [3] 1993년, 베스트 일레븐 & 도움왕 & 감투상 [4] 뒷날 인터뷰에서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는 일화의 신의손이었다고 밝혔다. 페인트 동작에 속지않고 끝까지 버텨서 정말 골치아팠고, 그가 없었으면 100골 달성이 훨씬 빨라졌을거란 소감을 남겼다. [5]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쫒겨난 게 96년. 윤상철이 서울을 떠나기 바로 직전 해다. 윤상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팬들 상당수가 이 때 날아갔다. 남아있던 사람들, 단 2시즌이나마 윤상철이 뛰는 걸 본 사람들은 2004년 서울 연고복귀 때 또 대거 이탈한다. [6] 실제로 과거 대전 시티즌 김호의 경우 대표이사 신분으로 감독의 역할에 상당히 개입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7] 실제로 프로 스포츠 감독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군으로서 프로 스포츠 지도자들 중 흡연하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있다. [8] 당시상황을 설명하자면 평택은 무려 5:0으로 지고 있었고, 경기를 완전히 포기한듯이 무기력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이를 보다못한 해당 서포터가 야유를하면서 정신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같은 평택응원석에 앉아있던 윤감독의 아내가 선수들도 속상할텐데 인신공격 하지말고 그냥 응원만 하라고하자 여기에 서포터는 이건 서포터의 영역이라면서 평택 응원석내에서 시비가 붙었고, 아래 벤치에서 이를듣던 윤감독이 그럴꺼면 오지말라고 소리쳐 이번엔 서포터와 윤감독간에 시비가 붙어 경기가 끝나고나서도 말싸움을 했었다고 한다. [9] 평택 시티즌 FC 항목의 사건사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해당 서포터는 과거에도 여러구단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있었고, 그런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 다른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내와 시비가 붙었으니 남편으로써 화가 날수밖에 없는 윤감독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경기도중 감독이 관중석의 팬한테 대놓고 오지말라고 막말하는 행위가 정당화 되는건 아니다.그런데 솔직히 눈앞에서 자기마누라가 싸우고있는데 눈 알돌아갈 사람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