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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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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채
朴圭彩 | Park Gyu-chae
파일:박규채.jpg
<colbgcolor=#0431B4><colcolor=#ffffff> 출생 1938년 12월 15일
경기도 인천부
사망 2023년 7월 1일 (향년 84세)
아호 범농(凡農)
신체 172cm, 71kg
가족 배우자, 슬하 1남 1녀
학력 속초중학교 (졸업)
양정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 농학[1] / 중퇴)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 최고언론과정 수료)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 경영학 / 석사 과정 수료)
종교 불교
데뷔 연극: 1957년 국립극단 입단
탤런트: 1961년 KBS 개국특채 탤런트
수상 1996년 대한민국 국민포장
1993년 대한민국아카데미 문화대상
문교부장관 한국사회교육유공자 표창

1. 개요2. 생애3. 출연작
3.1. TV 드라마3.2. 라디오 드라마3.3. 영화
4. 여담5. 참고 자료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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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2. 생애

1938년 경기도 인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후 강원도 홍천군으로 이사갔고, 초졸 후 서울로 올라가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로 진학할 적 처음에는 정외과를 지망했으나 "농촌에 뿌리내리고 살자"는 친구의 권유로 농학과를 선택했다. 대학 재학 당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면서 점차 연기에 재미를 붙여 교내 극예술연구회에 입단하여 <햄릿>, <안티고네>, <무익초> 등에 출연하며 연기를 배웠고, 1957년 졸업 후 국립극단에 입단했다가 1961년 '드라마센터' 창단 당시 그쪽으로 옮겼다. 그해 1961년 MBC 1기 공채성우로 합격해서 라디오 성우와 영화 애니메이션 성우로도 활동하였다. 12월 KBS-TV 개국 당시 특채되어 <검은 개울 다리>로 데뷔하여 1969년 MBC-TV 개국 후에는 그쪽으로 가서 많이 활동했다.

탤런트 초기부터 외모 탓에 20여년 간 조연을 줄곧 맡다가 1980년대에 제1공화국에서 이기붕역을 시작으로 공화국 시리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에 많이 출연하였다.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당 고조 이연을 연기한 이후로는 방송에서 간간히 얼굴을 비추었다.

주로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으며, 이기붕, 김성곤 등과 같은 정치인들을 연기하였다.

배재대학교 공연영상학과 겸임교수, 한일장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화예술학과 객원교수 등을 지내면서 연기자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연기활동 외에도 사회활동을 많이 하였다. 1976년 한국TV방송연기자협회 회장, 1986년 방송문화원 원장, 1994년 서울대방종사회복지관 관장, 1997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9년 국립공원협회 부회장, 1999년 속초국제관광 엑스포조직위원회 홍보위원 등을 지냈다.

3. 출연작

애니메이션
1971년 극장 상영작 번개아텀 게르만
1976년 극장상영작 태권 브이 카프박사

3.1. TV 드라마

3.2. 라디오 드라마

  • 일요 기획드라마 이웃(MBC) - 나레이션

3.3. 영화

4. 여담

  • 거부실록에서 김갑순역으로 '민나 도로보데스'[2]라는 대사를 하였는데, 원래는 실존 인물인 김갑순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방영 당시 희대의 사기사건인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그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 상황을 풍자하는 80년대 유행어로 발전하였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지지하는 찬조 연설을 하였는데, 이는 최초로 야당 후보 찬조 연설한 연예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제5공화국 끝 무렵이었지만, 연예인들이 정치적 소신을 내기는 쉽지가 않았었던 걸 감안하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이 일로 방송계 윗분들에게 단단히 찍혀서[3] 1987년 ~ 1988년에는 방송가에서 거의 퇴출 상태로 있었다가,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퇴출이 없게 되었다. 결국 이때 고생을 했던 탓에 정치 쪽에는 깊이 관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김영삼이 개신교 신자인데 비해 박규채는 불자인데, 나중에 이에 대해 묻자 정치적 신념과 종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현답을 남기기도 했다. 위의 찬조연설 등의 인연으로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 국가장때 장례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정되었다.
  • 연예계에서 주당으로 유명했으나, 전립선암 2기를 진단받은 이후부터는 을 끊었다고 한다.
  • 월남 이상재를 기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상재를 기념하여 그의 아호를 따서 특별상을 수여하는 월남장(月南章)을 증정하는 위원회의 대표 월남장증정위원회장,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재정위원장 등을 지냈다.

5. 참고 자료

  • <TV가이드> 1982년 제52호 '탤런트 인명사전' p188.
  • <MBC 가이드> 1982년 6월호 기사( #1, #2, #3, #4)

6. 관련 문서



[1] 58학번 [2] みんな どろぼう(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들이다.'라는 뜻이다. [3] 좀 더 정확히 얘기자하면 KBS 정구호와 MBC 황선필이 아직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고, 아무리 민주화가 진행되고 노조가 결성되었고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시청료 징수율이 50% 밑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눈치를 안볼수 없게 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꼬장을 부리는 임원진이나 중간간부가 있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