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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통합 조지아 왕국 4대 군주 ვახტანგ | 바크탕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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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바크탕 4세 |
조지아어 | ვახტანგ | |
라틴어 | Vakhtang IV | |
가족 |
알렉산드레 1세(아버지) 두란두크트(어머니) 디미트리오스(동생) 기오르기 8세(이복 동생) 다비트(이복 동생) 자알(이복 동생) 바그라티오니(누이) 시티카툰 파나스카르텔리(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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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413년 ~ 1446년 | |
재위 기간 | 1442년 ~ 14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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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4대 군주.2. 생애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3대 군주 알렉산드레 1세와 오르벨 왕조의 군주 베슈켄 2세의 딸 두란두크트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디미트리오스, 여동생으로 바그라티오니가 있었으며, 이복 동생으로 기오르기 8세와 다비트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카헤티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1439년, 알렉산드레 1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개최한 로마 공의회에 사절을 보냈다. 이때 사절단은 바크탕 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왔다. 이로 볼 때 그는 아버지의 통치 말기부터 공동 왕으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442년 알렉산드레 1세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으면서 조지아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메레티와 카르틀리를 맡은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귀족들도 각자의 주군을 추종했기 때문에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 자알 파나스카르텔리-치치빌리의 딸인 시티카툰 파나스카르텔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2년 후인 1444년 자식 없이 사망했다.
1444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지한 샤가 조지아로 침공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우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조지아 남부의 아할치헤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지한 샤는 밤을 틈타 타브리즈로 철수했다. 이렇게 외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내부분열을 조정하는 데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샴츠헤 공작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3세의 아들 쿠바르쿠바레 3세를 새 공작으로 임명했지만, 쿠바르쿠바레 3세의 삼촌 아그부야가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실의 든든한 지원세력이었던 삼츠헤가 혼란에 빠지는 걸 막지 못했다.
1446년 12월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후 이메레티의 권력자 디미트리오스와 카르틀리의 권력자 기오르기 8세가 왕위를 놓고 경쟁한 끝에 기오르기 8세가 카헤티를 재빨리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