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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9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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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3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III | |
가족 |
디미트리오스 1세(아버지) 다비트 5세(형) 루수단(누이) 바그라티오니(누이) 알라니아의 부르두한(아내) 타마르(장녀) 루수단(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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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미상 ~ 1184년 3월 27일 | |
재위 기간 | 1156년 ~ 1184년 3월 27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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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9대 군주. 다비트 4세부터 시작된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이어갔다.2. 생애
조지아 왕국 6,8대 군주 디미트리오스 1세의 차남이다. 형으로 다비트 5세, 누이로 루수단, 바그라티오니가 있었다. 아버지 디미트리오스 1세는 왕위 후계자로 예정된 다비트 5세보다 그를 총애했다. 이에 다비트 5세는 이러다 자기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여 1155년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6개월만에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 1세는 복위한 뒤 그를 공통 통치자로 지명했다가 1156년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다비트 5세가 신의 저주를 받아 갑자기 죽었다는 중세 조지아 기록에 의문을 표하며, 그가 음모를 꾸며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복위시켰을 거라고 추정한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대에 조지아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침공했던 샤-아르멘을 선제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1161년 바그라투니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비트 4세 시절 조지아에 복속되었다가 디미트리오스 1세 대에 다시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아니와 드빈을 탈환하고 이바네 오르벨리 장군을 아니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에 여러 토후국 에미르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니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격파당했다. 이후 연합군에 가담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에르제룸의 알 말리크를 응징하고자 원정에 착수해 승리를 거두로 사로잡은 후 큰 몸값을 받고 석방했다. 뒤이어 1162년 8월 아르샤쿠니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드빈을 공략하고 드빈의 귀족 아나니야를 그곳의 통치자로 삼았다.
1163년 초, 아란과 아자르바이잔의 통치자 일디귀즈가 이끄는 무슬림 연합군이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조지아군은 이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고, 무슬림군은 간자 요새를 공략하고 게가르쿠니크 일대를 황페화시킨 뒤 아니로 이동했다. 하지만 1166년 초 그가 반격을 가해 간자를 탈환하고 무슬림을 상대로 막대한 제물을 확보한 뒤 귀환했다. 1167년, 그는 하자르족과 킵차크의 침입을 받은 시르반을 도와주고 그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후 엘디구즈가 휴전을 제안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니를 샤다드 가문에 돌려줬다. 그러나 그는 1174년 다시 아니를 점령하고 이븐 마흐무드를 포로로 잡고 이바네 오르벨리를 그곳의 총독으로 삼았다.
1177년, 그에 대항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다비트 5세의 아들 뎀나는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조지아 동부와 남부의 대다수 영주들이 왕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여기고 그에 가담했다. 심지어 그동안 그의 지시를 충직하게 따랐던 이바네 오르벨리 마저 반란군의 편에 들어갔다. 그들은 트빌리시 밖에 나가 있는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는 트빌리시로 귀환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다. 반란군은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그가 민중의 호응을 얻고 공세를 개시해 반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뎀나와 이바네 오르벨리는 아르메니아의 로르헤 요새에 갇혔다. 왕실 군대는 반란군 영주들의 영지를 점령하고 로르헤를 포위했다. 결국 뎀나와 오르벨리는 항복했고, 그는 뎀나를 실명형과 거세형에 처한 뒤 감옥에 집어넣고 오르벨리 가문을 멸족시킨 뒤 그들의 토지와 부를 몰수했다. 뎀나는 감옥에 수감된 후 형벌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곧 죽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그는 자신에게 헌신한 이들을 고위직에 임명했다.
그는 북캅카스의 알란 부족 지도자 쿠르단의 딸 부르두한과 결혼하여 딸 타마르와 루수단을 낳았다. 아들이 태어날 가망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장녀 타마르를 왕위에 올리기로 했다. 1178년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선정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같은 해에 그와 타마르의 주도로 회의를 소집해 강도와 도적을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마련하고 도둑을 잡는 치안관들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 법은 13세기까지 유효했지만 강도는 오랫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교회의 압력에 따라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1184년 3월 2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한 뒤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공동 통치자였던 타마르가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