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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13대 샤한샤 𐭥𐭫𐭧𐭫𐭠𐭭 |바흐람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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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바흐람 4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𐭥𐭫𐭧𐭫𐭠𐭭 | |
영어 | Bahram IV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399년 | |
재위 기간 | 388년~ 3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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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13대 샤한샤.2. 생애
중세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al-Tabari)에 따르면, 그는 샤푸르 2세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함자 알 이스파하니( Hamza al-Isfahani) 등 다른 역사가들에 따르면, 샤푸르 3세의 아들이라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후자의 기록이 더 신방성 있다고 본다. 그는 샤한샤가 되기 전에 케르만 지방의 왕을 역임했다. 이때 케르만 지방의 수도가 될 케르만샤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드넓은 농경지와 화페를 주조하는 도시로서 사산 왕조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88년 부친 샤푸르 3세가 귀족들의 음모로 살해된 뒤 새 샤한샤가 되었다. 그는 389년 부친대부터 추진된 아르메니아 분할안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함께 공식적으로 체결했다. 392년 호스로프 4세가 자신과 상의 없이 사하크를 페르시아에 귀속된 아르메니아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자, 그는 호스로프 4세를 폐위하고 브람샤푸흐(Vramshapuh)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호스로프는 성에 유페된 뒤 극비리에 로마 제국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395년 백훈족이 북부 코카서스에서 로마의 속주인 서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카파도키아, 갈라티아를 침공하여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사산 왕조를 침공하여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의 많은 시골 지역을 파괴했다. 사산 왕조군은 반격을 가해 이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가져가던 전리품과 로마인들을 획득했다. 바흐람은 로마인들이 베흐아르다시르와 크테시폰에서 살도록 허락했고, 빵, 포도주, 기름을 포함한 배급을 받았다. 이들은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99년, 그는 사냥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9세기 역사가 디나와리는 사고로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알 타바리는 "악당이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학자들은 귀족들이 바흐람을 암살했을 거라고 본다. 그가 사산 왕조군의 대부분을 이끄는 강력한 파르티아 귀족 가문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다가, 그들의 반발을 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동생인 야즈데게르드 1세가 새 샤한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