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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9대 샤한샤 فرخهرمز | 파루크 호르미즈드 |
||
제호 | 한국어 | 호르미즈드 5세 |
중기 페르시아어 | فرخهرمز | |
영어 | Hormizd V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631년 | |
재위 기간 | 630년 ~ 6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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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39대 샤한샤.2. 생애
사산 왕조의 파르티아 7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이스파부단 가문의 일원으로, 호르미즈드 4세를 실명시키고 죽인 뒤 형제 비스탐과 함께 호스로 2세를 옹립한 빈두이의 아들이다. 빈두이와 비스탐 형제는 바흐람 추빈의 반란으로 축출된 호스로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호스로 2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형제가 권세를 누리는 것에 경계심을 품고, 595년 빈두이를 유인해 처형했다. 이에 비스탐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고 샤한샤를 자칭했으나, 601년경 결국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그는 비스탐이 죽은 뒤 제국 북방의 스파베드(군사령관)가 되었다. 그는 슬하에 로스탐 파로흐자드를 두었다.630년 4월 29일 미흐란 가문의 수장이며 유력한 장군이었던 샤흐르바라즈가 아르다시르 3세 및 여러 대신을 죽이고 샤한샤에 오르자, 그는 이에 불복하여 40일만에 군대를 일으켰다. 양측은 크테시폰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샤흐르바라즈는 파루크 호르미즈드가 던진 창살에 맞아 죽었다. 이후 파루크는 630년 6월 말 푸란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푸란도흐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제국의 최고 관료로 삼아 전권을 위임했다. 푸란도흐트는 공정한 법을 시행하고,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세금을 줄이고, 주화를 주조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나, 얼마 후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인 샤푸르 샤흐르바라즈가 아버지를 따랐던 무리를 수습한 뒤 크테시폰으로 쳐들어왔고, 푸란도흐트는 폐위되었다.
파루크는 근거지로 피신한 뒤 군대를 재차 일으켜 샤푸르 샤흐르바라즈를 몰아내려 했지만, 페르시아계 귀족[1]들의 대표인 피루즈 호스로가 선수를 쳐 샤푸르 샤흐르바라즈를 폐위시키고 아자르미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그는 이에 맞서 자신을 "만백성의 지도자이자 이란의 기둥"이라고 선언하고 호르미즈도 5세라는 이름으로 에스타크르와 메디아의 나하반드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그러다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자신이 속한 이스파부단 가문과 페르시아계 귀족들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아자르미도흐트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메흐란 가의 당주 시아바흐쉬에게 도움을 받아 그를 살해했다. 당시 호라산에 주둔하고 있던 파루크 호르미즈드의 아들 로스탐 파로흐자드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 아자르미도흐트를 붙잡은 뒤, 먼저 실명시킨 후 죽였다. 그 후 631년 6월 푸란도흐트를 샤한샤에 복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