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산맥 하의 도심
시내 동북쪽 타케 보스탄의 사산 제국기 부조
1. 개요
페르시아어 کرمانشاه쿠르드어 کرماشان
영어 Kermanshah
이란 서부 케르만샤 주의 주도. 하마단에서 서남쪽으로, 호라마바드에서 서북쪽으로 각각 100km 떨어져 있다. 자그로스 산맥의 분지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105만명이다. 이란 중부에 있는 도시 케르만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도시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쿠르드인으로, 케르만샤는 이란에서 가장 큰 쿠르드어 사용 도시이다. 지명은 말그대로 이란 동부 지역인 '케르만의 왕'이란 뜻인데, 황제 즉위 이전 케르만의 왕(분봉왕)을 지낸 사산 제국의 바흐람 3세에서 유래되었다. 비록 1979년 이란 혁명 직후 '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도시는 가흐라만샤흐르로, 동명의 주는 바크타란[1]으로 개명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치솟으며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도시 자체에도 볼거리가 많고, 동쪽으로 20km 떨어진 비수툰 (베히스툰)에도 유적이 즐비하다.[2]
2. 역사
타케 보스탄, 아르다시르 2세의 대관식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다수 거주하였고, 인근 산지에서 여러 유적이 확인되었다. 인근 지역에서는 이란의 첫 네안데르탈인 유구와 기원전 9800년 경으로 비정된 주거 유적 역시 발견되었다.[3] 청동기 시대부터 현 도시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헬레니즘기 조각이 남아있다. 이란의 설화에 의하면 피쉬다드 왕조의 3대 왕 타흐무라스가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후 무렵부터 일대에는 '산악 이란인', 즉 쿠르드 인들이 거주하였고 226년 사산 제국의 첫 샤한샤 아르다시르 1세가 자그로스 산지를 토벌한 후 현지 쿠르드 왕공인 메디아의 카이우스에게 케르만샤 지배권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시작된 카이유스 왕조는 사산 제국의 제후국으로써 150여년간 유지되다가 380년 아르다시르 2세에 의해 폐지되고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아르다시르 2세는 도시의 구석 산지에 타케 보스탄 부조를 새겨 병합을 기념하였고, 이후의 황제들도 이어서 부조를 추가하였다. 서늘한 고산 기후 덕에 샤한샤들의 여름 요양지로 선정된 케르만샤는 4세기 말부터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바흐람 4세 (재위 388 ~ 399년)는 번영하는 도시에 자신이 왕자 시절에 지니던 '케르만의 샤' 군호를 하사하였다. 서부 이란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이던 케르만샤는 640년 이슬람 제국군에게 점령된 후 중소 도시로 전락하였다. 11세기 셀주크 제국기에 도시는 재차 문화, 상업의 중심으로써 재기할 수 있었고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와 셀주크 조의 하마단 사이의 거점으로써 칼리파와 술탄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 알 무스타르시드 문서 참고)
사파비 왕조기에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화되었다. 그럼에도 1723-29년과 1731-32년 오스만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성립된 카자르 왕조의 파스 알리 샤는 오스만군이 재차 케르만샤를 공격해오자 격퇴하였다. 20세기 초엽 카자르 조의 쇠퇴를 틈타 1914년 러시아 제국, 1915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오스만군은 1917년에야 영국의 압력으로 철수하였다. 카자르 조 말엽 케르만샤는 이란 입법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팔라비 조 시기에는 공화주의 운동의 중심 중 하나였다. 20세기 후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에 가까웠던 까닭에 케르만샤는 폭격에 시달려 큰 피해를 입었고, 21세기 들어서까지 상흔이 남아있다.
3. 갤러리
사파비 시대 모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