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세원(世元) / 춘산(春山)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68년 6월 3일 |
전라도
나주목 금마면 토동 (현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토동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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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1년 8월 10일[3]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품평리 | |
묘소 | 광주광역시 남구 임암동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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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치도는 1868년 6월 3일 전라도 나주목 금마면 토동(현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토동마을)에서 아버지 민신혁(閔信爀, 1841 ~ 1925. 2. 19)과 어머니 김해 김씨(1845 ~ 1912. 2. 18)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광주목 소고룡면 두동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 두동마을)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이어 능주목 인물면 품평리(현 화순군 이양면 품평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그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제와 친척들에게 군자금 백냥씩을 줘서 심남일 의병장의 부대로 보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정재면(鄭載冕)[4]·주창업(朱昌業) 등과 함께 국민당 및 결사대를 조직했고 신덕영, 최양옥, 김정련(金正連) 등 대동단(大同團)단원들과 연락하여 활동했다. 그는 전라남도 화순군수와 능주, 영광 등 각 면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천만의 천군(天軍)이 습래하면 왜노(倭奴)의 충신은 왜노와 함께 학살할 터이니,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속히 사직하라"
또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양회진(梁會津)·윤자삼(尹滋三)·민영동(閔泳東) 등 각 부호들에게는 다음의 글을 보내 군자금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지금 광주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하여 국민당을 조직하고 수십 명의 결사대를 각 지방에 파송하였으니 군자금을 제공하여 사형을 면하라."
또한 그는 광주 숭일학교 선생인 김정련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낼 방안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21년 5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협박 등의 혐의로 징역 5년(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일부 최소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해 8월 9일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내가 죽은 후 대한자손들아 국권을 회복하라!"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민치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