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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 연합사회당 중심의 정당 연합. | }}}}}}}}} |
Acción Democrática | |
한글명칭 | 민주행동당 |
상징색 |
흰색
|
창당일 | 1941년 9월 13일 ([age(1941-09-13)]주년) |
이념 |
사회민주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주소 |
Calle Los Cedros, Edificio Romulo Betancourt, La Florida, 카라카스 |
대표 | 루벤 안토니오 |
국제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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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조직 | 청년 민주행동 |
정당 연합 | 민주 동맹 |
국민의회 의석 수 |
11석 / 277석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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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사회기독당(코페이)와 양당제를 이루며 번갈아 집권했던 정당이다.2. 상세
전신은 1931년 로물로 베탕쿠르가 콜롬비아에서 창당한 좌파혁명연합(Agrupación Revolucionaria de Izquierda)이다. 당시 후안 비센테 고메스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 투쟁하였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와서 국민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쓰다가 현재 당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45년 10월 혁명으로 민주화 정치 개혁에 나섰다.1947년 대선에 승리하여 집권하지만,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불법 정당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다시 민주공화당, 사회기독당과 함께 푼토 피호 협정을 맺음에 따라 민주화를 달성한다. 이 때부터 중도좌파 성향에서 중도 정당으로 변화한다.
사회기독당과 번갈아가며 집권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이뤘지만, 경제적으로는 불안요소가 매우 컸다. 그러다 1980년대 저유가와 더불어 외채난과 물가상승으로 인한 불경기에 시달리며 빈곤율이 늘어나는 상황속에서 베네수엘라의 번영을 약속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집권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게 되었고 이는 카라카조라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져 대중들의 지지를 상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후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가 심화되자, 1992년 우고 차베스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페레스는 쿠데타 위기를 간당하게 넘겼지만 결국 1993년 비리 혐의로 탄핵되었다. 그래도 베네수엘라 노총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기 때문에 제1야당으로 남았으나, 1998년 총대선 당시 사이다스러운 공약을 내건 우고 차베스에게 지지층 상당수를 내주었고 이후 2000년대 초중반 타 정당과 연합하여 석유파업을 주동하여 우고 차베스를 위기에 빠트렸지만 우고 차베스가 빈민층을 신경쓰는 정책을 강하게 유지하면서 2004년 국민투표에서 42%의 찬성표만을 얻는데 그치며 패배했다.
이후 우고 차베스가 사망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집권 이후인 2014년부터 저유가와 정치혼란으로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기회를 얻는듯싶었지만 경제재제 도입에 대한 호불호로 인해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데 실패했고 후안 과이도의 집권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며 분열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