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4 13:53:52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세르비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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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1412년 ~ 1420년 1화 ~ 12화 펠로폰네소스 원정
1420년 ~ 1421년 13화 ~ 45화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1421년 46화 ~ 59화 정변기
1422년 ~ 1423년 60화 ~ 124화 제1차 대오스만 전쟁
1423년 ~ 1428년 125화 ~ 176화 1차 전간기
1428년 ~ 1432년 177화 ~ 225화 세르비아 십자군
1432년 226화 ~ 247화 제2차 대오스만 전쟁
1432년 ~ 1435년 248화 ~ 277화 2차 전간기
1435년 ~ 1436년 278화 ~311화 나폴리 전쟁
1436년 ~ 1438년 311화 ~ 356화 제3차 대오스만 전쟁
1438년 ~ 1445년 357화 ~ 377화 재건기
1446년 ~ 1448년 378화 ~ 407화 맘루크 전쟁
- 408화 ~ 410화 그 후
세르비아 십자군 전쟁
시기 서기 1430년 6월 ~ 1432년
장소 트라키아, 세르비아, 그리스
교전국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동로마 제국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파일:Flag_of_Sigismund_of_Hungary.svg.png 헝가리 왕국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교황령
파일:Serbian_Despotate.png 세르비아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오스만

[[왈라키아 공국|]][[틀:국기|]][[틀:국기|]]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모레아 전제군주국
지휘관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돈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할리드 무르타트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
파일:Flag_of_Sigismund_of_Hungary.svg.png 후녀디 야노시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샤를 7세
파일:잔 다르크 문장.svg 잔 다르크
파일:800px-Armoiries_des_compagnons_de_Jeanne_d'Arc_-_Gilles_de_Rais_(augmentées).svg.png 질 드 레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마르티노 5세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가브리엘레 콘둘메르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 줄리아노 체사리니
파일:Serbian_Despotate.png 스테판 라자르비치
파일:Serbian_Despotate.png 주라지 브란코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무라트 2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아흐메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찬다를르 할릴 파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이스하크 파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투라한 베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스칸데르베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ictitious_Ottoman_flag_2.svg.png 미하일 크리토불러스†
파일:왈라키아 공국 국기.svg 라두 2세
파일:왈라키아 공국 국기.svg 단 2세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병력 총원: 34,000명
세르비아군: 10,000명
헝가리군: 13,000명
프랑스군: 2,000명
제국군: 6,000명
알바니아군: 3,000명
총원: 33,000명
보스니아군: 6,000명
모레아군: 1,000명
피해 세르비아군: 4,000명 오스만군: 2,400명
보스니아군: 5,000명
모레아군: 500명
결과 세르비아 십자군의 패퇴와 드라가시스 황제의 궐기.
후녀디 야노시 십자군 합류.
영향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옹립한 알바니아 왕국의 수립.

1. 개요2. 트라키아 침공3. 제 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4. 폭풍전야의 정세5. 세르비아 침공과 십자군 선포6. 비딘 전투7. 모레아의 십자군 참전8. 크루여 전투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오스만과 모레아, 그리고 헝가리를 비롯한 주요 유럽 국가들의 행적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1428년부터 1432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담고 있다.

2. 트라키아 침공

모레아가 개혁을 하는 동안 오스만도 사드라잠 찬다를르 할릴의 주도 하에 황제가 생각해둔 대 오스만 포위망을 깨기 위해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제의와 협박를 통해 왈라키아 공국을 회유하는 한편, 그동안 삼중성벽 보수 강행 등 오스만을 자극한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니스 8세를 이번 기회에 굴복시키기 위해 모레아의 첩보망과 베네치아 상인들도 모르게 침공군을 신규 요새 건설 인부로 위장해 트라키아에 접근시켰다가 무라트의 친정하에 트라키아 침공을 개시한다.

침공하면서 전 장정에게 약탈 허가 명령을 내렸는지, 오스만군이 지나간 소도시와 마을들이 모조리 초토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이런 참혹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아흐메트 왕자는 멘붕에 빠져 주변 병사들에게 약탈 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이조차도 안되자 약탈 명령을 내렸던 아버지인 무라트에게 찾아가 자비를 배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오스만이 일찍이 내린 관용을 거부한 제국민들한테 자비를 배풀 가치가 없다면서, 이왕 왔으니, 마지막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전, 파견할 사신단에다 이스하크 파샤와 함께 끼워서 보낸다.

3. 제 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기나긴 농성을 준비 중인 콘스탄티노플로 아흐메트 왕자와 이스하크 파샤를 대표로 하는 오스만의 사신단이 찾아와 당연히 항복 및 삼중성벽 철거를 조건으로 걸게 되는데 이 요구사항을 스프란체스가 대신 읽던 중 이스하크의 모욕적인 언행이 있었으나 요안니스는 일단 참고 요구사항을 끝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믿고 있었기에 꺼져라.라는 결사항전 선언을 하게 되며, 이에 아흐메트 왕자는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냐며 절규한다. 이스하크는 아흐메트를 제지하면서 최후 통첩[1]을 한 뒤 물러난다.

그렇게 오스만 사신단이 물러나자,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이 해상 봉쇄까지 당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요양 중인 안드로니코스와 아직도 주인공만 생각 중인 황후 요안니나를 비롯한 많은 백성들을 모레아로 피신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수도원에 칩거한 마누일 2세를 찾아가 또 다른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사죄하였다. 하지만 마누일은 그런 요안니스에게 남아있는 형제들을 잘 이끌어 나가고 스스로 의심하지 말라는 부탁이자 유언을 남기고 요안니스와 황태후 앞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마누일이 사망한 이후 공성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났지만 오스만군이 봉쇄를 제대로 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 금각만 앞바다에 있던 오스만 함대도 살짝 풀어져 있어 베네치아나 제노바 소속 상선 일부가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다가 빠르게 나와 모레아로 서신을 전하는 일도 많았고,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의 전 병력, 3만 3천여 명에 달하는 대군이 삼중 성벽 앞에 도열해서 무력시위를 펼친다. 오스만군에 모레아의 드라가시스 황제가 볼모로 종군하고 있었기에 무언의 협박이 먹힌 상황에서, 다시 한번 오스만이 사신을 보내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요구[2] 를 전하면서 압박하자 요안니스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직접 걸어나와 무라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동생이 보는 앞에서 술탄의 발에 입을 맞추게 되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은 다시 술탄의 봉신이 되어버렸고, 그 댓가로 콘스탄티노플의 지배권과 삼중성벽의 유지, 그리고 얼마 갈지도 모를 존속을 허락받는다.[3]

4. 폭풍전야의 정세

트라키아가 불타오르는 동안 모레아는 오스만 1차전 당시 8년간의 휴전조약이 있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 수도에서 온 난민들이 전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대해 중신들이 주인공만 바라보는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주인공 또한 딱히 취할 만한 대응이 없으므로 일단 무슬림들의 대표격인 할리드와 기존 관료들간의 관계가 조정되고, 모레아의 치안 유지와 알바니아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정도만 이뤄진 채 모레아 정부는 현상유지를 택한다. 도중에 이바니아가 회임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1430년까진 별다른 문제 없이 정국이 흘러간다.

하지만 수도에서 피난을 와있던 안드로니코스는 경험상 느낌이 좋지 않다고 경고를 하고, 아니나 다를까 스칸데르베그가 알바니아에서 한참 하고 있던 정복활동을 갑자기 중단하고[4], 베네치아도 오스만과 5년간의 불가침조약[5]을 맺어 모레아를 전처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주재상인의 보고, 그리고 오스만 군세 중 상당수가 뜬금없이 불가리아로 이동하는 등의 첩보가 거의 동시에 들어온다. 심지어 뜬금없이 왈라키아가 갑자기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는 소식까지 터지고, 결국 주인공에게도 오스만의 사신이 찾아와 소집령을 내리고, 미리 니케포로스 주교를 비밀리에 알바니아로 파견해 반란을 획책해놓은 주인공은 자신이 볼모가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서방의 지원이 없는 지금 당장은 오스만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1430년 4월 약 8천 정도의 모레아군 보병 중 1천을 이끌고 3만 이상의 대병력을 이끄는 무라트에게로 향한다.

한편 왈라키아의 통수로 초토화가 되어버린 트란실바니아에 뒤늦게 도착한 헝가리 의용병을 이끌던 한 무명 귀족이 전장을 지나다니며, 이미 전멸당한 수비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분노한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기에 시체 수습은 하지 않고, 대신 갑옷을 비롯한 군장은 벗겨내어서 챙기라는 냉철한 모습도 보여주는 그 귀족은 "내 평생을 걸고 너희(오스만)를 방해해 주마."라고 스스로에게 오스만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렇게 헝가리의 백색기사인 후녀디 야노시가 등장한다.

1천 명의 병력을 통솔해 1달 반만에 에디르네에 도착한 주인공은 에디르네에서 무라트뿐만이 아니라 오스만에게 굴복해 소집령에 응한 아나톨리아의 토후들과 발칸 각지의 기독교 봉신들을 목격하고, 에디르네 궁정에서 찬다를르 할릴의 3만 3천에 달하는 군세가 집결했다는 보고를 듣는다. 봉신들의 대열에 낀 주인공을 본 무라트는 웃으면서 조롱이 담긴 인사를 보내며 봉신들에 대한 본보기로 주인공을 모욕하지만, 그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지막 자존심도 버려놓곤 무라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7년 전의 휴전 조약 당시 주인공이 무라트에게 남기고 떠난 맹세의 검을 그의 바로 앞에다 집어 던지며 어떻게든 주인공을 동요하게 만들어보려 한 무라트였지만, 끝내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에 무라트를 포함한 궁정 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질렸다는 반응을 보인다.

주인공에게 완전한 굴욕을 맛보게 하는 데에 실패한 무라트는 타깃을 바꿨고, 마침 세르비아의 스테판 공이 병환 때문에 오스만의 소집령에 미처 응하지 못한 것을 핑계삼아 휘하 군세의 침공 목표를 세르비아로 정한다. 본격적인 침공 이전 콘스탄티노플로 향해 요안니스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낸 무라트는 이젠 거칠 것도 없이 그대로 군세를 나눠 세르비아를 전방위에서 공격하면서, 1420년 세르비아가 오스만을 공격하는 데에 실패한 지 어언 10년만인 1430년 6월 오스만-세르비아 전쟁이 재개된다.

5. 세르비아 침공과 십자군 선포

전군을 세르비아 쪽으로 진군시킨 무라트는 선봉에다 스칸데르베그와 주인공을 세워 세르비아와 모레아간의 공조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고, 마지막까지 선처를 호소하던 세르비아 사신에게 더 이상 자비는 없으며 만약에 그런 걸 바란다면 지배권을 포기하고 오스만군을 그대로 맞이하라는 사실상 선전포고를 날린 뒤 사신이 스테판에게 이 말을 전해야 한다면서 축객령을 내린다.[6] 이후 스테판이 최대한 저항하기 위해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왕위를 넘기는 강수를 썼지만[7] 무라트는 고작 보스니아 따위가? 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 세르비아가 주인공을 여전히 여전히 염두에 두고 시간을 최대한 끌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 즉시 선봉장을 주인공이 아닌 투라한으로 교체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주인공을 무라트의 시선에서 빗겨나게 만들어 그를 비교적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게 해주는 큰 실책이 되었다.

투라한으로 선봉장이 교체된 지 며칠 뒤, 오스만군 본대는 세르비아의 돈줄인 은광이 위치한 코소보를 비롯한 세르비아 남부로 진격해 수많은 요새들을 사석포를 앞세워 최소한의 손실로 모조리 무너뜨렸고, 이러한 승리로 라구사 공화국과 육로 연결이 이루어지자 바로 이스하크와 아흐메트를 그곳으로 파견시켜 화포 관련 무역 협상을 맺는다. 또한 베네치아 등등 이탈리아의 십자군 참가 예상국들의 아드리아 해를 통한 역습을 막기 위해 스칸데르베그가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북부 지역에다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이와 함께 무라트가 교황청이 공의회를 개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받는다. 이에 그는 곧 십자군이 선포될테니, 그 전에 최대한 승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세르비아 북부와 보스니아에 대한 북진을 개시한다.

한편 이러한 세르비아 침공 소식에 엄연히 기독교 국가인 세르비아를 구하기 위해 교황청도 체사리니 추기경을 통한 후스 전쟁 종결, 왈라키아-헝가리 전쟁에 대한 종전 압박[8], 잔 다르크 시성 문제[9] 백년전쟁 종전에 대한 프랑스, 잉글랜드 협박으로 이들까지 끌어들여 십자군에 대한 거의 모든 준비를 이루었지만 가장 중요한 피렌체 공의회가 제국측 대표단의 억류로 지연되자 이를 참다 못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한다.

주인공이 떠난 사이 프란시스코와 할리드는 그를 대신해 모레아를 다스릴 이가 필요하다 판단하고 동시에 안드로니코스에게 향하고,[10] 장본인인 안드로니코스 또한 이를 알았기에 덤덤히 받아들인다.

그러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에는 공의회와 대오스만 십자군 준비차원으로 교황 특사인 가브리엘레 추기경이 찾아왔지만, 요안니스는 마지막 희망인 주인공이 볼모로 잡혀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이에 정교회측 대표의 공의회 파견과 자금 지원은 동의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는 내용을 전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브리엘레 추기경이 주인공의 죽음은 순교라는 망언을 하게 되고[11] 요안니스가 분노하여 일갈하자[12] 가브리엘레도 지금이 자신을 불사를 때라며 뻔뻔하게 나오며 회담은 파국으로 끝난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교황 특사단에 디미트리오스가 접촉한다.

교황 특사단과 디미트리오스가 함께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모레아였고, 당연하게도 모레아의 가신단부터 디미트리오스를 적대하고[13] 섭정 역할인 안드로니코스 조차도 탐탁치 않아한다. 특사단 일행이 노린건 안드로니코스가 병환에 시달리는 걸 이용, 섭정직을 디미트리오스가 물려받게 하여 주인공의 신변을 무시한 채 모레아가 십자군에 참가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안드로니코스는 특사단의 꾀를 역이용해 주인공을 볼모 상태에서 빼내고 거기다 알바니아까지 합류시킬 방법도 생각해내어 그 밑밥으로 일단 디미트리오스에게 신원 미상의 병력 2천의 지휘권만 준다.[14] 그리고 소피아에게도 디미트리오스의 감시를 부탁하며 본인의 암살 방지라든지, 이바니아의 신변 보장 등 대비책들을 마련한다.

6. 비딘 전투

한편 십자군 당도를 직감한 무라트는 코소보의 은으로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을 반강제로 용병화시키고 포로들을 노예병으로 굴려 병력 규모를 더 키움과 동시에, 세르비아의 전쟁피로도를 엄청나게 올려 세르비아군이 성밖으로 나와 야전에 응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위해 투라한의 시파히 기병대를 보스니아로, 본대는 북부에 있는 세르비아 잔존 도시들을 최대한 약탈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병력을 분할한 무라트와는 반대로 세르비아 군은 나중에 도착한 주라지 휘하의 보스니아 군과 합류하는 등 병력을 수도 스메데레보로 집결시키면서 1년간 존버를 택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하자 그대로 오스만의 보급선이 돌출된 니슈 지역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이들을 막는 역할은 다름 아닌 주인공이 맡게 되지만,[15] 그가 기지를 발휘하여 보스니아인 포로들로 이루어진 치중대를 요청해[16] 대규모 몸집 불리기에 성공한다. 마침 주인공이 가려던 곳이 도나우 강 국경선이었기에, 무라트도 그 뒤의 흑심은 모른 채 치중대에 대한 요청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승인하게 되지만, 만약에 대비하여 임브로스 섬의 영주인 크리토불러스를 부관 겸 첩자로 드라가시스 황제에게 합류시킨다.

제국과 오스만 사이에서 항상 애매한 태도만 보이다가 오스만에 대한 반역을 종용하는 크리토불러스를 계속 의심하던 주인공은 무슬림들만 쓰는 복합궁이 치중대 보급마차에 있는 걸 발견하게 되면서[17], 크리토불러스가 첩자라는 걸 알게 되고,[18] 보스니아군을 적당히 쫓아내면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세운다.

이후 주인공에게 도착한 세르비아의 사신은 황제를 저주하는 말만 가득 담긴 주라지의 서신을 건네고, 이를 본 주인공은 누가 누구를 욕하는 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 주라지가 세르비아 계승권을 신경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 일단 크리토불러스 몰래 세르비아군과 접촉하려 한다. 하지만 유대인 정보원이 주인공에게 세르비아 내부의 사정을 알려주면서[19] 주인공의 계획을 만류하고, 세르비아가 자기에게 완전한 적임을 확인한 그는 차도살인책에 더이상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되면서 일부러 목책 전진기지를 잘 보이는 곳에다 건설하고, 보스니아 포로 중 일부를 일부러 그곳에 배치하여 거짓 패배와 함께 포로 해방을 하는 등 수 차례에 걸친 기만책을 통해 주라지가 더 공세적으로 나가도 될 것 같다고 오판하게 만든다.

마침내 주라지는 크리토불러스가 주둔한 진지에 야습을 감행하고, 난전이 벌어지던 도중 주인공의 군세가 제3세력으로 개입해 양쪽에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다. 주라지는 대부분의 병력을 대가로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다 후녀디 야노시를 만나 목숨을 건졌지만 크리토불러스 난전 도중 전사했고, 그렇게 주인공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과거 에디르네에서 맛본 굴욕의 복수삼아 무라트의 성정을 박박 긁는 서찰을 보낸다. 이에 무라트는 주인공이 속박에서 풀려났다며 분개하지만 세르비아군 격파 소식도 잘못된 것도 아니었기에 차후 주인공과 유럽 국가들의 공조에 심각한 걸림돌이 생겼다는 것에 화를 삭이는 한편, 서신에 있던 십자군 분견대 포착 건을 보고 십자군이 오기 전에 세르비아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는 교역과 약탈을 위해 흩어져 있었던 이스하크와 투라한을 복귀시키며 총력전을 준비한다.

7. 모레아의 십자군 참전

세르비아 전쟁에 십자군이 개입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레아에서는 '이 타이밍에 오스만을 쳐야 되지 않겠냐' 라는 여론들이 힘을 얻고, 가브리엘레 추기경뿐만 아니라 교황청에서 새로 파견 보낸 특사까지 디미트리오스를 앞세워 알바니아에서 대규모 기독교 반란[20]까지 터진 상황에 모레아는 왜 머뭇거리냐고 모레아의 가신들과 안드로니코스를 강하게 압박한다. 결국 무라트가 아직까지는 동생을 처단하지 않고 계속 써먹고 있다는 점과 그 상황을 기민한 동생이 잘 이용해서 어떻게든 탈출했으리라고 판단한 안드로니코스는 오스만 영토 안에서 모레아군과 동생이 다시 접촉하도록 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모레아의 참전을 선언한다. 그 소식을 들은 무라트는 모레아의 참전이 의외라 의아했지만 이이제이로써 써먹자는 식으로 불가리아에 있던 주인공의 부대를 그리스 전선으로 보내고, 알바니아 반군 진압 겸 주인공을 감시하라면서 스칸데르베그까지 같이 아래쪽으로 내려보낸다. 이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 주인공의 선봉장 직위해제와 함께 최악의 결정이 된다.

8. 크루여 전투

무라트의 명령으로 비딘을 떠나 3일만에 그리스로 남하하던 주인공의 군세 내에서 모레아가 적으로써 맞서야 하는 상대가 되어버렸기에 모레아 출신 병력을 중심으로 불안감이 퍼지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칸데르베그와 만난 주인공은 자신이 하던 요새화 작업이 지연되었다면서 불만을 표하는 한편 이번에 터진 반란에 대해 고작 자유라는 허상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을 포기했다며 돌려까기를 시도하는 스칸데르베그의 말을 듣는다. 서로 뼈 있는 신경전만 하다보니 건설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던 둘은 각각 디라키온 크루여의 방비를 맡겠다며 헤어지고, 주인공은 그대로 카스트리오티 가문이 다스리는 크루여로 떠난다.

크루여에 도착한 주인공은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당주, 지온 카스트리오티의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으며 이번 반란에 크루여가 제외되었다는 걸 듣고, 스칸데르베그 때문에 참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판단한다. 크루여에 잠시 머물던 주인공은 모레아군을 이끌고 있는 자가 동생 디미트리오스이라는 걸 알면서 놀라지만, 이를 어떻게 타개할지 곰곰히 생각하다 모레아군의 탈환과 스칸데르베그를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도박같은 묘안을 떠올린다. 묘안의 첫 단추로 지온의 정치적 '생명' 포기를 요구받은 지온은 영주로써의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을 빼내야 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지 않았지만, 2주 후 스칸데르베그의 병력 3천이 알바니아 반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자 충격을 받아 지난번 제안에 뒤늦게 동의하며 스칸데르베그가 아닌 제르지를 크루여로 끌여들일 계획을 같이 준비한다. 주인공은 이런 크루여의 사정을 북진하는 모레아군이 알 수 있게 종군중인 토마스에게 서한을 보낼 준비를 한다.

하지만 스칸데르베그 또한 주인공이 베네치아나 모레아군 본대와 연락하는 걸 어떻게든 감시하고 있어 탈영병으로 위장한 결사대 100명을 밀사로 삼아 십자군이 오는 북쪽으로 보내는 척할 필요가 있었고, 어떻게든 모레아군으로 향하는 전령을 결사대로 숨기는 데에 성공한 시점에도 계속해서 알바니아로 접근하는 모레아군을 상대로 스칸데르베그가 기습한다. 기습에 무르라티를 중심으로 약 1천명의 손실을 본 모레아군의 모습에 디미트리오스는 당황해서 제대로 지휘도 못하는 등 한심한 모습만 보이고, 결국 프란치스코의 주도 하에 원래 목적지인 디라키온으로 가지 않고 잠시 기다리다 크루여에 계승 분쟁이 생겼다는 걸 알자 바로 크루여로 천천히 진군한다. 한참 디라키온을 요새화하던 스칸데르베그도 빈집 수준인 크루여로 모레아군이 향한다는 소식에 당황한 건 덤.

계략의 마지막 단추로 아버지인 지온의 뜬금없는 유고와 동시에 터진 계승 분쟁 소식에 멘탈이 가루가 된[21] 스칸데르베그는 엄청난 강행군으로 1주일 만에 크루여로 달려가 장례식에 참여하여 계승권에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으나.... 모든 것이 주인공과 지온의 함정이었고 스칸데르베그 본인은 손 쓸 순간도 없이 심복들에게 붙잡히고, 목에 칼이 드리워진 채 오스만을 배신하고 알바니아의 왕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그와 동시에, 크루여 성 밖에 차려놓은 숙영지에서 쉬고 있던 오스만군이 황제의 전권을 받은 지온과[22] 알바니아군에게 무장해제 상태에서 급습당해, 극적으로 탈출한 잔존 오스만 병사 40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멸한다.

이렇게 주인공은 스칸데르베그, 아니 제르지를 무력화하여 실권 없는 알바니아의 왕으로 옹립하여 흩어진 알바니아 반군을 다시 규합하는 데에 성공하고, 3일 뒤 디미트리오스 휘하의 모레아군 또한 아무런 저항 없이 환호를 받으며 크루여에 입성한다. 디미트리오스는 난전 중 황제를 만나 죽이려고 한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 아쉬워하면서 크루여의 교회에서 형을 만나지만, 자기가 모레아군을 이끌고 있으므로 주인공의 파문을 빌미로 삼아 그를 유폐하려는 오판을 했다가 정작 3천의 알바니아군과 맞닥뜨린 모레아군이 프란치스코와 할리드의 지시 하에 배신하면서 모든 계획이 허사로 돌아간다.
결국 디미트리오스는 절규하다가 토마스가 배신자라는 것을 문득 깨닫곤 그를 죽이려 칼을 뽑고 달려들지만, 한 병사에게 제지당하고 그 와중에 말이 죽으면서 강제로 낙마당하며 한쪽 팔이 불구가 된다. 그리고 볼모 신세가 되어버린 가브리엘레 추기경을 만나 이것저것 추궁한 주인공은 이미 교황청에게 파문을 당한 이상 십자군의 깃발을 버리고 모레아의 기치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하고, 단 며칠만에 오스만 군에 대한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과 동시에 총 12,000명의 대병력[23]을 이끄는 조커가 된다.


[1] 그렇다면 성문을 굳게 닫아둔 채 결코 열지 말지어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도시의 황제로 남아있어라. 오스만이 성문 밖의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24] 이것이 술탄이 그대에게 내리는 마지막 전언이다. [2] 드라가시스 황제는 이미 짐의 봉신이 되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스스로 나오지 않는구나. 짐이 그대의 고민에 도움을 주겠다. 만일 형제를 제 손으로 죽이길 꺼려 다른 이의 손을 빌리고 싶어한다면 짐이 기꺼이 그리 해주마. [3] 트라키아 점령지는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이후 정세 보고에서도 반환하지 않은 걸로 보아 그대로 상실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트라키아 점령지는 3차 오스만 전쟁에서 제국이 승리를 거두면서 수복되었다. [4] 알바니아의 영주들과 접촉하려는 모레아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다. [5] 정확히는 적대행위의 금지조약으로, 단순한 무력행사만이 아니라 오스만의 적국인 세르비아, 모레아 등을 베네치아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행위까지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6] 그런 와중에 사신이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작정하고 애원하자 그는 "성문을 열어 맞이하기 싫다면 마땅히 성문을 걸어 잠그도록 하거라."는 결사 항전의 의미가 담긴 말로 완곡한 거절을 하게 되는데, 이것조차 무라트가 신경쓰는 모습도 보인다. [7]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보스니아인이 아니다. 엄연히 세르비아 내에 실질 영지를 가진 세르비아계 귀족이고, 단순히 보스니아 왕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후원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8] 트란실바니아의 대부분을 왈라키아에게 양도하는 것. 헝가리의 왕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대노했지만, 대의을 위해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추기경의 설득이 결국 관철된다. [9] 잔 다르크는 죽은 지 거의 500년이 지난 1920년에 이르러서야 성인이 되었고, 생전에는 '자칭' 성녀였기에 성직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계속 나왔다. 샤를 7세 또한 그녀에 대한 정치적 부담+ 파문 위험 때문에 마지막에 잔 다르크를 버린다. [10] 안드로니코스를 뽑은 이유는 테살로니카를 다스린 경력이 있고 결정적으로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 [11] 요안니스 옆에 있던 근위병들이 명령이 없었는데도 칼집에 손이 갔을 만큼 엄청나게 분노했다. [12] 망국으로 치닫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후대의 비난과 자기 목숨을 걸고 도시도 불태운 동생이다! [13] 할리드는 대놓고 모가지를 딴다고 말했다. [14] 물론 디미트리오스가 모레아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라티니키 이피스, 스트라디오테 그리고 무르타티의 지휘권을 인수하지 못하게 조치가 이루어진 상태였고, 디미트리오스도 그걸 알기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으나 일단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넘어간다. [15] 드라가시스 황제에게 이교도의 깃발 아래, 같은 기독교 형제이자 십자군을 살육했다는 오명을 씌우려는 무라트의 속셈이다. [16] 신규 인력들을 모조리 황제의 부대가 가져가 스칸데르베그의 부대에 대한 인력, 보급 부담을 높여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방해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17] 사실 이건 무라트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일부러 노출시킨 거지만, 크리토불러스가 첩자로써 잘 행동하지 못한 것도 있고 황제도 여기에 겁먹을 인물도 아닌터라 오히려 역효과만 생기게 되었다. [18] 그래서 그 후 전투 회의마다 여러 번 뼈가 담긴 말들이 서로 오고 가는 모습이 보였고, 주인공이 이런 면에선 많이 유리했는지, 크리토불러스가 표정 관리를 못하는 모습도 많이 나온다. [19] 그 유대인은 지금 세르비아군은 황제를 처단하려는 생각 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세르비아 귀족들의 국론이 분열되어 절반 이상이 드라가시스 황제와 소피아 공주의 통치, 즉 모레아와의 동군연합을 바라고 있기에 주라지 입장에선 정치적 경쟁자인 황제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20] 사실은 니케포로스 주교가 백작들을 설득한 끝에 터트린 독립 반란이다. [21] 덤으로 이 과정에서 현란한 샷건을 보여준다. [22] 당연하지만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지온 카스트리오티라는 이름과 크루여의 영주라는 작위를 버리고 수도회에 들어가 아우구스티노 수사라는 새 삶을 얻었으며, 공식적 직위는 어디까지나 지온의 옛 조언자이자 주인공의 조언자만이라고 딱 정해졌다. [23] 오스만 군 중에 본국을 배신하고 주인공을 따르기로 한 군세 3천+직할 병력 5백+알바니아인 3천+무르타티 1천+스트라디오테 7백+라틴기사 3백+보병 병력 4천=총 12,500명. 14세기 로마 제국의 완전한 쇠락이 시작된 이후 최대 규모의 상비병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