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4:15:41

니시(세르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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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초창기2.2. 나이수스 전투 (269년)2.3. 4세기의 번영2.4. 훈족의 파괴2.5. 슬라브인의 도래2.6. 동로마 제국의 회복2.7.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2.8. 오스만 제국2.9. 세르비아 민족주의2.10.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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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동남부의 도시. 니슈, 니쉬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니시'이다.

인구는 18만 8천명으로, 세르비아에서 수도 베오그라드, 북부 보이보디나 노비사드에 이어 3번째로 큰 도시이다. 로마 시대의 이름은 나이수스(Naissus) 인데, 27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태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시대부터 주도로써 중시되었고,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를 거쳐 오스만 제국기에도 니슈 에얄레트의 치소였다. 근대에는 베오그라드와 함께 세르비아 봉기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써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에는 세르비아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시내에는 니시 성채, 해골탑, 메디야나 궁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다만 20세기 수차례 전란을 거치며 오스만 시기에 지어진 전통 가옥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 시가지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유럽적인 건물들이 많은 편이다. 한때 인구의 20%를 차지했던 무슬림 주민들은 추방되었다.[1] 불가리아와의 국경과 불과 50km 거리라 불가리아계 주민들도 많았지만 역시 이주되거나 세르비아화되었다. 시가지는 니슈바 강의 양안에 형성되어 있고, 남안이 더 크다. 서북쪽 외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공항이 있다. 역사성 때문에 불가리아가 영사관을 두고 있고, 튀르키예 영사관이 곧 들어설 예정이다.

2. 역사

로마 시대 지층에서 출토된 콘스탄티누스의 두상

2.1. 초창기

머나먼 옛날, 니시 일대에는 트라키아인이 거주하였는데, 기원전 300년 경에 켈트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며 그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일리리아 전쟁으로 발칸 반도를 점령해 나가던 로마는 기원전 74년경에 이 도시를 점령한 후 나이수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정복 기지로 사용하였다. 제정 초기까지 로마 보조병 기지가 도시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동남 유럽에 로마 가도가 건설되자, 니시에는 5개의 도시[2]에서 온 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기 2세기의 과학자 겸 지리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이수스를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로 분류하였고 5현제 중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시를 무니키피아로 승격시켰다.

2.2. 나이수스 전투 (269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는 역(praetorium)이 건설되어 전령의 쉼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3세기가 되며 나이수스에는 다시 군단병이 주둔하였다. 268년에 고트족이 대규모로 로마 제국의 동부를 강타하였을 시에 갈리에누스 황제가 1차러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고, 다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2세가 나이수스 전투에서 침략자들을 괴멸시켰다. (269년) 황산대첩 5만명의 고트족과 1만 이상의 로마군이 전사한 대격돌이었다고 전한다. 이 전투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고티쿠스' 칭호를 받았다. 전투로부터 4년이 지난 272년, 당시 장군이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이 도시를 지나가며 여관집 주인과 사랑을 나눈 결과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났다. 다만 콘스탄티누스는 클라우디우스 2세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2.3. 4세기의 번영

파일:니슈 세르비아 터키 1.jpg
시가지 동쪽 외곽의 메디야나 궁전 유적.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워 행궁으로 활용되다 442년 아틸라에게 파괴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두 전치를 끝내고 서방을 통일한 후, 316년부터 322년까지 고향에 머물렀다고 한다. 324년에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된 그는 다키아 메디테레니아 주를 신설하고 나이수스를 그 주도로 삼아 주었다. 플랜카드 붙이는 이유를 알겠다 361년에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전투를 앞두고 이곳에 머물렀다. 그의 치세에 도시는 요새화 되었다. 36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발렌스 황제는 나이수스 근교의 빌라에서 만나 제국을 동과 서로 분할하였다. 4세기의 니시에는 10만명 이상이 거주하였고 수십개의 빌라가 있었다고 한다. 쇠퇴하던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의 치세 때에는 나이수스의 상표?가 금괴에 찍혀 팔렸다고 한다. 한편, 4세기에 세워진 대저택이 발굴되었는데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눈길을 끌었다. 또한,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성당)도 초기 교회 건축의 예시로 주목받는다.

2.4. 훈족의 파괴

421년에 호노리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도 나이수스에서 태어났다. 한편, 훈족은 도시의 부를 탐내었고 요새화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441년에 포위된 도시는 443년에 함락되었다. 아틸라는 도시를 약탈하였고 폐허만을 남긴채 떠났다. 448년에 훈족은 돌아왔고,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수만명의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몇년이 지나 나이수스를 방문한 프리스쿠스는 쌓여있는 인골을 보고 도시가 방금 전에 함락된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교회에 일부 노인들만 남아있었다고 그는 부연하였다. 이후 일부나마 재건된 나아수스마저 480년에 재차 이민족에게 파괴된 후, 한때 거대했던 도시는 한동안 유적이 되어 있어야 했다.

2.5. 슬라브인의 도래

530년경에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나이수스를 재건하였고 대주교구를 설차하였지만 중소 도시에 그쳤다. 프로코피우스는 나이스소폴리스로 가록하였다. 하지만 도시는 재차 아바르족에게 파괴되었다. 한편, 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슬라브족의 대이동은 580년경까지 세르비아와 그리스 북부를 슬라브 거주 지역으로 바꿔 놓았다. 551년에 첫 슬라브인이 니시에 출발했고 580년대에 세르비아는 슬라브 거주지가 되어 있었다. 테살로니카의 슬라브족은 달마티아로 격퇴되었다.

2.6. 동로마 제국의 회복

파일:세르비아 터키 로마.jpg
니시 성채 내의 로마-비잔틴 시대 유적

615년, 슬라브인이 니시를 함락하였다. 그리스인 주민들은 도망가거나 동화되었다. 785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는 마케도니아와 니시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테오필로스 황제의 사망 이후 842년, 니시는 1차 불가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불가리아 제국은 1018년에 바실리오스 2세의 활약으로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하였고 시르미움 테마가 설립되었다. 1072년에는 제국의 혼란을 틈타 도주한 불가리아 왕실의 후예 보딘이 불가리아 황제를 칭했지만 동로마 군대에게 니시에서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파일:나이수스 터키 세르비아.jpg
민중 십자군과 동로마 기병대 간의 니시 전투

1096년 6월 말,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중부 유럽을 헤집던 군중 십자군 베오그라드를 약탈하고 니시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7월 3일에 치러진 니시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3] 군중 십자군은 전투에서 무려 1/4이 전사했음에도 기어코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도착했다.[4] 니시는 마누일 1세 시기에 요새화 되었고, 1155년에 당시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던 세르비아의 한 영주에게 넘겨졌다.

2.7.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

그리고 1161년, 마누일은 니시에서 스테판 네마냐를 만난 후에 도시를 네마냐 왕조에게 주었다. 하지만 마누일이 1180년에 사망한 후 네마냐 조가 독립해 버리며 니시는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 벨러 3세가 일시적으로 점령하였고, 1184년에 동로마 제국이 회복하였으나 결국 1185년에 세르비아의 영토가 되었고 1188년에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에 이른다. 1189년 7월 27일, 네마냐 왕조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을 니시에서 맞았다. 1203년, 2차 불가리아 제국 칼로얀이 니시를 점령하였으나 세르비아가 곧 되찾았다.

2.8.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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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세기에도 등장하는 쉴레이만 1세 시기 세르비아계 장군인 말크초을루 발리 베이의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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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경에 지어진 니시 성채.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힌다. 둘레는 2.1 km 이다. 높이는 8m, 두께는 3m. # #
파일:니시 터키 세르비아.jpg
니시 성채 내의 오스만 시기 하맘 (목욕탕)

1375년, 무라트 1세의 오스만군이 25일의 포위 후에 도시를 함락하였다. 1443년,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이 니시를 회복, 오스만 수비대를 소피아로 몰아내었다. 하지만 1444년의 바르나 전투로 범유럽 연합군을 몰아낸 무라트 2세는 1448년, 니시를 재차 오스만령으로 회복하였다. 이후 니시는 241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니시 산작 / 에얄레트의 중심지가 되었다.

2.9. 세르비아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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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엽 니시 시가지 지도
파일:해골탑 세르비아 터키.jpg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상징인 시가지 동남부의 해골탑 (Ћеле-кула)

대 튀르크 전쟁 중인 1689년에 오스트리아군이 니시에 입성하였으나 다음 해에 오스만 제국이 회복하였다. 1737년에 오스트리아군이 일시적으로 다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 니시는 1804년부터 1817년까지 이어진 세르비아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군대는 도시 인근 세르비아 반군의 요새던 체가르를 점령하기 위해 2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세르비아 인들은 5번의 공격을 격퇴해 내았으나 6번째 공격에서 오스만 군대는 아군의 시체로 참호가 메워자자 총공격을 시작하였고, 결국 요새는 함락되었다. (1809년 5월) 마지막 순간에 반군 지도자 스테판은 요새 지하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고,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 주위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2천명의 세르비아 반군과 4천명의 오스만군이 사망하였다. 함께 폭사

반란 이후 오스만 측은 952명의 세르비아 반군 해골을 4면에 14줄씩 박아넣어 탑을 세웠다. 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고 코소보 평원과 함께 세르비아 보훈 교육과 민족주의의 중심지이다. 유럽에서 가장 기괴한 기념물로 손꼽히며, 현재까지도 돌 틈 사이에 54개의 해골이 박혀있다고. 1821년 오스만 당국은 그리스 독립 전쟁과 연계하여 봉기를 꾀하고 있다며 니시 주교 밀렌티냐를 비롯한 독립파 2백여명을 사로잡아 6월 13일 공개 교수형에 처하였다. 19세기까지 니시의 기독교도들 중 세르비아 계와 불가리아 계가 각각 절반 가량을 차지했는데, 1841년 니시 봉기 역시 불가리아 봉기로 알려졌다. 일부 세르비아 지리가들 역시 니시를 자국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니시에는 3만 4천의 기독교도와 8천 5백의 무슬림 주민들이 거주하였다.[5]
파일:터키 니쉬 세르비아.jpg 파일:니쉬 터키 세르비아.jpg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무슬림-기독교도 동등 권리가 보장된 직후 니시에 세워진 성 삼위일체 성당

1870년 니시는 오스만 정부에 의해 설립된 불가리아 총대주교구에 포함되었고, 187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에서도 불가리아에 귀속되기로 결정되었다. 다만 1877년 12월 세르비아군이 니시에 당도하여 이듬해 1월 11일 입성하였고, 이로써 세르비아 공국령이 되었다. 점령 후 알바니아 구역은 전소되었고, 대부분의 무슬림 주민들은 코소보로 도주하여 프리슈티나 혹은 스코페에 정착하였다. 이는 약 한세기 후 벌어지는 코소보 전쟁의 배경 중 하나이다. 따라서 전후 무슬림 인구는 1천 가량으로 급감하였고, 불가리아계 역시 동쪽으로 이주하여 1884년에 이르면 세르비아계가 주민의 80%를 점하였다. 이후 니시는 빠르게 근대화되었다. 1879년 도서관이 세워졌고, 니시 태생의 작가 스테판 스레마치가 관장이 되었다.

같은해 첫 호텔인 '유럽'과 병원, 1881년에는 병원, 1881년에 문법 학교, 1882년에는 사범대, 1894년에는 여학교, 1882-87년에는 시청사가 세워졌다. 1883년에는 인쇄소가 세워졌고, 1884년 니시의 첫 신문이 발간되었다. 같은해 베오그라드와의 철도가 놓였고, 이는 1888년 소피아까지 연장되었다. 1897년에는 직물 공장이 들어섰고, 1897년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것에 이어 1906년 첫 상설 극장이 건립되었다. 1908년에는 인근 시체보 협곡에 세르비아 최대의 수력 발전 댐이 완공되었고, 1912년의 비행장에 이어 1913년에는 박물관이 세워졌다. 1차 대전기 니시는 세르비아군의 대오스만 전선 본부였고, 오스트리아에 베오그라드를 잃은 후에는 전시 수도가 되었으나 1915년 11월 점령되어 불가리아에 병합되었다. 3년간 불가리아 지배를 받은 후 니시는 1918년 10월 12일 페타르 보예비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에게 수복되어 전후 복구가 이루어졌다.

2.10. 현대

파일:터키 세르비아 니슈.gif
1930년대, 트램이 다니는 니시 도심 모습

1차 대전 후 니시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모라바 바노비냐 주의 치소가 되었고, 1930년 시내에는 트램이 놓였다. 같은해 베오그라드와 스코페, 테살로니키를 잇는 정기 항공편이 개설되었다. 하지만 1941년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수용소가 세워졌고, 약 3만 5천여명이 수감되어 1만여명이 시가지 서남부 부반즈 언덕에서 총살되었다. 1942년 2월 12일, 147명의 수감자들이 집단 탈출을 감행하였다. 1944년 10월, 처절한 전투 끝에 니시는 불가리아군 파르티잔에 의해 해방되었다. 하지만 도중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시가지는 크게 파괴되었고, 그해 11월에는 니시 상공에서 미국 공군 소련 공군이 아군오사 팀킬를 벌였다. 이어진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기 재건 중이던 도시는 1948년 6월 니샤바 강의 수위가 5.5m까지 오르는 전례없는 대홍수로 큰 피해를 겪었다. 1965년에 니시 대학이 세워졌고, 1999년 코소보 전쟁의 일환으로 5월에는 NATO 소속 네덜란드군이 이 지역에 확산탄 투하해 16명의 사망자를 냈고, 6월에는 나토 공군이 니시를 폭격하여 50여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2013년 밀라노 칙령 170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1] 현재는 약 2,000명의 무슬림이 잔존하고 있다. [2] 세르디카, 싱기두눔, 테살로니카 [3] 그 과정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4] 이후 니케아 인근 키지쿠스에서 룸 셀주크 군에게 괴멸당했다. [5] 무슬림들은 튀르크/알바니아/루마니아계. 주택으로 보면 세르비아계 3500 가구, 모슬림 3천 가구 점유. 이로써 약 3만 4천의 기독교도 중 절반 가량이 세르비아 계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