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01:16:17

명나라-몽골 관계

명나라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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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관계3. 중기 관계4. 후기 관계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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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와 몽골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초기 관계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동년 9월 14일 대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사실상 몽골은 중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곧이어 1370년 원정을 통해서 섬서, 감숙 등에서 버티고 있던 코케 테무르와 응창에서 버티고 있던 아유시리다라를 카라코룸으로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윈난의 바자르오르미와 기타 소규모 몽골 잔당만 제거하면 중원은 완전히 한족의 것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아유시리다라와 천원제는 계속해서 다시 중원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요동의 최대 세력 나하추와 손을 잡았고, 고려와도 손을 잡고자 했다. 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고 윈난, 요동이 모두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388년 3월 부이르 호수에서 남옥의 명나라 원정군이 몽골지도부를 완전히 섬멸한다.

중원과 요동까지 차지한 주원장은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방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섬서, 산서, 베이징, 요동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북방 방어체계를 수립했고, 자식들을 변방에 봉건 군주로 임명해서 변방 개척과 방어 임무를 동시에 하게 했다.[1] 그리고 카라델 칸국에 관서7위, 옷치긴 왕가의 후손에 우량카이 3위, 여진족에 수많은 위소를 설치하는 등 기미위소를 설치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몽골을 견제하고자 했다.

주원장이 만든 체제는 건문제 시기까지 유지됬다. 하지만 정난의 변으로 연왕 주체가 새로 황제가 되면서, 북방방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영락제는 자신이 연왕으로 있다가 정변을 통해서 황제가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번왕 군주들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가 되고 번왕제도를 곧바로 폐지했다. 수많은 번왕들을 내지로 보내서 형식만 갖추게 하고 힘을 가질 수 없게 했다. 북방의 수많은 위소에도 조정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대녕위와 개평위를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다. 개평은 원나라 상도 지역을, 대녕은 연산산맥과 그 위 초원지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들은 순찰만 돌게 했는데, 이 지역은 방어가 굉장히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제대로 되 순찰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사실상 빈땅이 된 이곳으로 몽골족들이 점차 남하했다.[2]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채찍과 당근도 멈추지 않았다. 영락제는 몽골족이 중국과의 교역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국과 협조하는 몽골족에게 호시(互市)를 허락해주었다. 이는 보통 조공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룩타이나 마하무드의 경우처럼 몽골과 오이라트의 수장급 인물에게는 왕의 호칭을, 우량카이 등 일개 부족 수준의 우두머리에게는 도독의 지위를 주었다. 특히 우량카이 3위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우량카이 3위는 요동에 있던 옷치긴 왕가의 후손의 영역에 설치한 위소로, 이 시기 대녕과 요동사이에 분포했다. 이들은 명나라에 몽골족의 동향과 정보를 알려주고, 명나라는 이들에게 무역 혜택을 주면서 서로 윈윈관계를 유지했다.

영락제 시기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한가지 큰 문제가 생겼는데, 수도가 몽골족의 위협에 곧바로 노출됬다는 것이었다. 북경 바로 위는 험준한 연산산맥이 막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선부(宣府)와 대동 지역이 특히나 위험했다. 선부는 험준하기는 했지만 한번 뚫리면 거용관까지 곧바로 뚫린다는 문제가 있었고, 대동은 산세가 그렇게 험준하기 않아 초원세력의 주요 중원 침략 루트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보(堡)를 엄청나게 많이 쌓기 시작한다.

한편 초원에서 오이라트가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영락제는 오이라트를 몽골족 견제에 활용하기로 하고 수장들에게 조공책봉을 해주었다.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힘을 기른 오이라트는 계속해서 몽골을 공격했다. 영락제 자신이 직접 몽골과 오이라트를 원정하면서 초원에 강력한 세력이 등장할 수 없도록 했다.

3. 중기 관계

영락제 이후로 명나라는 점차 몽골에 소극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선덕제 시기 본격적으로 몽골족이 대녕, 개평 지역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에 선덕제는 개평위를 다시 설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428년에는 우량카이 3위를 정벌했는데, 이 이후로 우량카이 3위의 공격이 심해졌다. 북경 바로 위와 요동 지역이 한달에 한번 꼴로 공격을 당하게 되자, 선덕제는 결국 방어선을 남하하기로 한다. 이 방어선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렇게 버려진 개평, 대녕, 흥화 지역은 이후에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하한 방어선에 있는 보와 성을 연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선덕제 이전은 보와 성채 위주로 방어를 했지만,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국경을 남하한 이후로는 아예 산해관부터 산서지역까지 커다란 장성을 만들어서 방어하는 것으로 대응하게 된다. 선부와 대동은 여러모로 불안했기 때문에 뒤에 장성을 하나 더 쌓게 된다.[3][4]

정통제 시기에는 녹천에서 일어난 반란[5]과 묘족들의 반란으로 오랜시간동안 남방에 집중했기 때문에 북방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오이라트의 에센이 초원을 장악하는 것을 눈뜨고 바라보게 된다. 초원을 통일한 오이라트는 본격적으로 명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하미, 우량카이3위, 여진족, 조선에 포섭을 시도했고, 명나라는 이들에게 절대 오이라트 편에 붙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다가 왕진의 일방적 무역 중단으로 명분을 얻은 에센은 1449년 본격적으로 명나라를 침공한다. 이 때 명나라의 황당한 실수로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는 등, 국가적 위기사태에 이르게 되지만, 우겸의 지도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에센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물리친다. 에센은 이후에도 몇차례 대동과 선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호시를 다시 열어준다는 조건으로 사로잡은 정통제를 석방시킨다. 이 때 호되게 당해서 그런 것인지 장성과 보의 건설을 가속화했고, 북경성에 외성을 쌓고, 북경 방어조직을 개편하는 등의 조치를 했다.

에센이 사망한 이후로 초원지대에 몇십년간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 몽골족은 세력다툼에 밀려 도망 혹은 약탈 목적으로 명나라 변방을 자주 공격했는데, 특히 하투(河套)[6] 지역이 심했다.[7] 그래서 이 시기 사서를 보면 하투 지역, 즉, 영하, 섬서, 대동 등이 자주 언급된다. 초원의 혼란 과정에서 관서7위와 청해 지역이 오이라트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섬서 지방은 완전히 오이라트에 둘러쌓이게 되었다. 그래도 이 시기는 비교적 명나라 입장에서 평화로운 시기였다. 비록 침공이 잦아졌다고는 하나 에센처럼 대규모로 침공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전보다 방어를 더욱 단단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가 바로 성화제, 홍치제 초기 시기인데, 이 시기에 명나라 경제도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8] 이후, 다얀 칸이 몽골족을 다시 통합하고,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했지만 커다란 성과는 없었다. 이 시기부터 몽골은 명나라의 화포에 밀려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가정제 시기부터는 구변(九邊)[9]이라는 이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가정제부터 북로남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북로는 바로 초원의 몽골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무역문제에 가까웠는데, 알탄 칸이 요동을 제외한 명나라와 접하는 모든 땅을 차지한 뒤 명나라와 교역을 시도했으나, 이게 잘되지 않자 명나라에 대한 전방위 공격을 시도했다. 명나라는 더욱 경계를 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것이 절정에 이른 것이 경술의 변으로,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것이다. 알탄 칸은 호시를 열어준다면 포위를 풀어준다고 했고, 명나라도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곧바로 명나라는 입을 싹 닫았고, 계속해서 변방은 몽골족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명나라도 몽골과 무역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점차 느끼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변방의 안정이었고, 알탄 칸이 명나라의 죄인들을 계속해서 거두어갔기 때문이었다. 알탄 칸은 한족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연산산맥에 후흐호트라는 이름의 정주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알탄 칸의 손자가 알탄 칸이 자신의 아내[10]를 빼앗은 것에 원한을 품고 명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알탄 칸은 삼낭자의 요청에 손자를 다시 데려오기로 했다. 이에 융경제는 몽골에 투항한 한족들을 다시 돌려보내면 손자를 돌려보내주고, 선부와 대동에 시장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결국 극적으로 무역이 다시 재개되니, 이를 융경화의라고 한다. 융경제는 알탄칸에게 순의왕(順義王)이라는 직책을 내려주고, 후흐호트에 귀화성(歸化城)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무역이 재개되면서 북방도 다시 어느정도 안정되었다.

명나라와 적대하는 몽골족도 많았지만 우호적인 몽골족 또한 많았다. 이들 중에는 아예 명나라에 귀부하는 부족들도 있었는데, 명나라에서는 이들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고 북방 방어에 활용했다. 임진왜란 시기 이여송이 데려온 달단인들이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부한 후에 멀쩡히 산 것만은 또 아니어서, 보바이처럼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4. 후기 관계

알탄 칸과의 화의로 어느정도 북방이 안정되긴 했지만, 요동지역은 시끄러웠다. 문제의 시작은 알탄 칸이 차하르부를 요동 상류로 쫓아낸 것이었다. 요동으로 간 이들은 우량카이 3위를 흡수하고 무역을 위해 요동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명나라에서 이들에게도 어느정도 무역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그것만은 성에 차지 않아 더욱 가혹하게 공격을 했다. 이전에 우량카이 3위가 공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요동의 방어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광녕위(廣寧衛)가 심하게 공격을 받았는데, 차하르가 바로 이 근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11] 이 시기 떠오른 인물이 이성량이었다. 철령위의 몰락한 성주이씨 후손 집안 출신이었던 이성량은 늦은 나이에 우연히 요동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몽골족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이성량은 동시기 척계광과 함께 명나라의 주요 명장으로 칭송을 받았고, 요동에서 왕처럼 군림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몽골의 요동 공격이 강화되자, 여진족에 대한 관리가 느슨해졌다. 사실 이시기 여진족은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이면서 힘을 점차 강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해서여진의 완(ᠠᠨ, Wan) 한 같은 경우 실제로 여진족 통합 직전까지 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량이 실수로 건주여진의 수장 누르하치의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성량은 보상으로 누르하치에게 막대한 무역이권을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누르하치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마침내 해서여진까지 통합하고 강력한 실력자가 된다. 명나라는 무역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졸지에 말라죽게 생긴 누르하치는 1618년 7가지 한을 발표하고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 바로 옆에 있는 차하르부에게도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이전보다 훨씬 무역혜택을 주었고, 아예 은까지 대량으로 지원해줬다. 하지만 당시 차하르부의 수장이었던 링단 칸은 명나라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금을 몽골족을 통합하는데 활용한다. 링단 칸은 여진족 견제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진족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새로 후금의 군주로 등극한 홍타이지는 본격적으로 링단 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링단 칸은 이에 밀려 서쪽으로 계속해서 패주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몽골 부족들을 공격했다. 결국 수많은 몽골족들이 홍타이지에게 투항했고, 결과적으로 여진족은 오늘날 내몽골 지역 대부분의 땅을 차지했다. 그렇게 여진족 세력만 불려주던 명나라는 결국 혼자서 여진족을 상대해야했고, 결국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멸망하면서 명나라와 몽골 사이의 관계도 끝나게 된다.

5. 기타

  • 명나라 후기 학자 서광계는 몽골을 명나라와 똑같은 문명인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무(武)를 약화시키고 문(文)을 강하게 해야 다시는 명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마 알탄 칸이 한족처럼 성 짓던 것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하다.
  • 이 시기 명나라에서는 몽골을 달단(韃靼)이라고 불렀다


[1]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연왕 주체다. [2] 영락제 시기 까지는 내려오지 못했다. 선덕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3] 나머지 만리장성 라인은 장성대신 보와 성채 위주였다. 현실적으로 이곳들까지 장성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 [4] 외부에 있는 장성을 외장성, 내부에 있는 장성을 내장성이라 한다. [5] 녹천의 토사(土司) 사씨 가문이 미얀마의 샨족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6] 감숙, 섬서 일대에서 꺾이는 황하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7] 에센 이후로 오이라트의 주요 인물들이 하미 근처에 거주하기 시작해서 초원의 각축장이 황하 일대로 이동한 것이다. [8] 특히 묘족 반란이 진압되고 장강 유역이 안정되면서 강남 지역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9] 가욕관에서 압록강까지 9개의 진(鎭)을 설정한 것을 기리킨다. [10] 삼낭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1]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여송도 이곳에서 몽골족에게 사로잡혀 사망한다 [12] 단 화포 기술력은 제공하면 안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