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크림 칸국 기라이 왕조의 11대 군주. 오스만 제국의 사파비 제국 원정에 수차례 종군하였으나, 마침내 거절하자 폐위되었다. 이 결정에 반발하여 카파를 포위했으나, 오스만 측이 옹립한 이슬럄 2세에 패하고 살해되었다.2. 생애
1551 ~ 1577년간 재위한 데블레트 1세의 아들로, 1555년 형 아크메드가 사망한 후 공동 군주 겸 후계자인 칼가에 봉해졌다. 부왕과 함께 수차례 러시아 침공에 종군하던 중 1555년 수비시치에서 부왕을 구하기도 하였고, 1560년대에는 오스만 군을 도와 헝가리에서 싸웠다. 1570년대 들어 메흐메드과 동생 아딜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후자는 스텝 지방으로 이동하여 칼미누스 강가에 신도시 볼라 세라이를 세운 후 노가이인을 규합하였다. 다만 사망 직전 데블레트 칸은 두 아들들을 화해시킬 수 있었고, 1577년 6월 그가 사망하자 45세의 메흐메드가 칸에 올라 아딜을 칼가에 봉하였다.2.1. 치세
즉위 직후 메흐메드는 노가이인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볼히니아를 습격하여 국왕 스테판 바토리에게서 배상금을 받아낸 후 포로 3만 5천명, 말 4만 필, 소와 양 50만 두와 함께 귀환하였다.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을 도와 연이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다.2.1.1. vs 사파비 제국 (아제르바이잔 원정)
1578년 여름, 무라트 3세가 아제르바이잔 진군을 명하였다. 1555년 사힙 1세가 명을 거역하여 폐위된 전례가 있음을 기억한 메흐메드는 아프다는 이유로 친정 대신 아딜과 무바라크 & 가지 형제가 이끄는 2만 대군을 보내었다. 본래 아들 사데트도 파견되었지만 곧 불러들인 것으로 보아, 전쟁을 핑계로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3개월의 진군 끝에 11월경 시르반에서 외즈데미르오을루 오스만 파샤와 합류한 크림 칸국군은 샤마키를 포위하던 시르반 총독 아라스 칸 루믈루가 이끄는 2만 5천의 사파비 군대를 격파하고 무간 평원으로 남하하여 키질바시의 루물루 부족을 격파하였다.하지만 11월 말 사파비 대군이 당도하여 벌어진 몰라카산 전투에서 오스만-크림 군대는 장맛비 속에 말들이 넘어지고 활이 무뎌지던 끝에 대패하여 전리품 전부와 아딜까지 낙마하여 사로잡혔다.[1] 다만 다음 원정에서 아딜은 모하메드 호다반다 샤의 아내와 관련된 궁정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1579년 여름 메흐메드는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데르벤트에서 오스만 파샤와 합류하였고, 동생 가지는 바쿠에서 사파비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크림 칸국군은 시르반 전역을 장악하고 전리품과 포로를 챙겼다. 시르반 구원에 나선 사파비 군대 역시 패배하였고, 그 지휘관 무카메드 칼리프가 전사하였다.
동생 아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이루었다 선포한 메흐메드는 가을 무렵 많은 전리품 및 수천의 포로와 함께 본국으로 회군하였고, 동생 가지가 소수의 병력과 시르반에 남았다. 술탄 무라트는 이를 언짢게 여겼고, 실제로 얼마 후 사파비 조의 키질바시 군대가 시르반을 재점령하였다. 한편 회군 후 메흐메드는 아들 사데트를 칼가로 삼았는데, 이에 동생 알프가 반발하며 (메흐메드의 아들 중 하나를 포함한) 여러 베이들의 지지를 받아 칼가 직위를 주장하였다. 분노한 메흐메드는 알프에게 사파비 전선으로 향하도록 했는데,
2.1.2. 형제들의 반란과 마지막 원정
알프는 형제 셀야메트와 함께 초원으로 도주했다가 코사크에게 잡혔다. 메흐메드는 코사크에 사절을 보내어 형제의 송환 대가로 7만 디나르 금화를 제안하였다. 본래 사절들은 풀려난 후 크림 칸국 영내로 진입하며 즉시 형제를 죽이도록 지시되었으나 쉬린스의 알리 베이가 알프를 지지하자 메흐메드는 알프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칼가로 삼아야 했다. 해임된 사데트는 2순위 계승권자인 누레딘 지위를 받았고, 알프와 사데트는 크림 반도를 동서로 분할하여 영지로 삼았다. 동부에는 쉬린 가문이, 스텝 지형의 서부에는 노가이인과 연계된 만수르 가문이 유력 귀족이었다.[2]분쟁 후 1580년, 3번째 아제르바이잔 원정이 개시되었다. 가지와 사파 게라이가 이끄는 크림 칸국군은 시르반을 침공해 총독 살만 칸의 키질바시 군대를 격파하였고, 데르벤트의 오스만 파샤를 도와 바쿠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말라크하산에서 키질바시 대군을 만나 다게스탄으로 철수하였고, 사파비 정규군도 북상해오자 오스만 파샤는 데르벤트로 철수하였다. 1581년 봄 가지와 사파 휘하의 크림 칸국군은 재차 시르반을 침공했으나, 샤마키-사브란 전투에서 시르반 총독 페예르 칸에게 패배하고 가지가 포로로 잡혔다. 이후 메흐메드는 더이상의 이란 원정에 거부감이 들었다.
2.1.3. 술탄에 맞서다
1582년 여름, 카파에 오스만 제국군이 당도하여 크림 칸국에 재차 페르시아 원정 종군을 요구하였다. 메흐메드는 귀족회의 후 거부 의사를 밝혔고, 오스만군은 홀로 진군하였다. 1583년 가을, 오스만 파샤가 메흐메드를 체포하여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하라는 밀지와 함께 시르반에서 카파로 향하였다. 메흐메드는 회담을 명목 삼아 오스만 파샤를 스타리 크림으로 초청하였고, 그가 거부하자 의심이 현실화되었다 여겨 4만 대군과 함께 카파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한세기 가량 이어진 동맹 관계 탓에 양측 군대 모두 섣불리 공격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2.1.4. 사망
그동안 칼가 알프가 비밀리에 칸의 진영을 떠나 오스만 파샤와 만났고, 후자로부터 (사실 월권 행위인) 칸으로의 추대 제안을 받았다. 대부분의 베이들은 이를 거부했지만 카파의 무프티 (성직자)만은 지지하였다. 그러던 1584년 5월, 메흐메드의 다른 형제 이슬람 게라이를 실은 오스만 함대가 카파에 당도하였다. 이슬람 게라이가 자신을 신임 칸으로 봉한다는 술탄의 칙령을 내밀자 대부분의 귀족들이 합류하였고, 메흐메드는 아들들 (사데트, 무라드, 사파)과 만수르 베그를 대동하고 초원으로 도주하였다. 추격에 나선 알프, 셀야메트, 무바라크는 페레코프 인근에서 메흐메드의 마차를 따라잡아 그를 교살하였다. 사후 메흐메드는 바흐치사라이에 안장되었고, 동생 이슬럄이 칸이 되었다.[3] (이슬럄 2세)2.2. 사후
한편 일부 만수르 가문원과 함께 초원으로 도주한 사데트, 사파, 무라드는 제위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3개월 후 형제들은 1만 5천의 노가이 군대와 돌아와 수도 바흐치사라이를 장악하였고, 사데트가 칸에 올랐다. (사데트 2세) 그는 이슬럄이 도주한 카파를 포위했으나, 3개월이 흐른 후 대포를 대동한 4천 오스만 군이 사데트를 재차 초원으로 몰아내었다. 1585년 봄 사데트는 재차 남하했으나 크림 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패배한 후 다게스탄의 쿠미크 부족장 초판에게로 피신하였다. 사파비 조의 모하메드 호다반다는 기뻐하며 보검을 보내며 함께 오스만 조와 싸울 것을 제안하였다.1586년 10월, 사데트는 루스 차르국의 초대를 받아 동생 무라드와 합류하였다. 파디샤 무라트 3세는 호자 베이를 아자크로 보내어 사다트와 무라드에게 사면과 함께 귀순을 제안했는데, 고민하던 사데트는 아스트라한에서 러시아인에게 살해되었다. (1587년) 한편 사데트의 짧은 치세 동안 칼가였던 사파는 체르케스 부족에 의탁하다가 1586년 가을, 쿠미크 부족의 사데트와 합류하였다. 다만 형과 달리 아스트라한으로 향하지 않고 남은 그는, 다시 체르케스 측에 망명했다가 1588년 봄 이슬럄 2세가 사망하고 숙부 가지 2세가 등극하자 고국으로 돌아와 새 칸의 누레딘이 되었다.
같은해 6월 루스 차르국 대사와 무라드에 대해 논의한 그는 1591년 가지와 함께 모스크바 원정에 나섰다가 귀환 도중 와병하여 사망하였다. 한편 아스트라한에 남았던 무라드는 1586년 봄 모스크바를 방문해 화내를 받고 9월 아스트라한에 돌아온 후, 루스 차르국의 감시 하에 네 강[4]의 군주라 선포하며 노가이-카바르드-쿠미크 부족을 모아 크림-오스만 세력에 대항할 단일 칸국을 구상하려 하였다. 노가이 지도자 우루스 베이는 루스 차르국의 압박 하에 동참했으나, 파디샤에게 이를 고발하였다. 1587년 봄, 이슬럄 2세는 차르의 지원 하에 무라드가 3만의 루스-코사크군과 연말 크림 칸국을 침공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알프와 셀야메트가 오카를 습격, 격퇴되긴 했으나 루스 차르국의 무라드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 있었다. 루스 차르국은 크림 칸국이 아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라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편 노가이의 우루수 베이는 무라드의 과한 요구에 반발하여 술탄에게 사절을 파견,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고 그 총독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볼가 코사크에 의해 파괴된 사라이치크 대신 아딜의 볼라 세라이 성채를 거점으로, 재차 아스트라한 해방에 나설 것을 제안하였다. 얼마전 부하라 칸국에게서 캅카스 북안의 교통로를 열어 대러 동맹을 맺기 위한 아스트라한 협공 제안을 받았던 술탄은 큰 관심을 기울였다.
술탄은 피얄레 파샤에게 부하라와 노가이 모두를 방문하게 하였고, 그는 아스트라한 점령이 가능할 것이라 보고하였다. 1588년 봄, 술탄은 이슬럄 2세의 주도 하에 우루스 베이와 함께 볼가 원정을 준비하게 하였고 피얄레 파샤는 카파에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하였다. 하지만 얼마후 이슬럄 2세가 사망하여 원정은 취소되어 오스만 군대는 페르시아 전선에 파견되었고, 함대는 지중해로 돌아갔다. 한편 1587년 쿠미크 부족장 샤마칼의 딸과 결혼하러 남하했던 무라드는 장인을 친러로 포섭하려 하였다. 시도가 실패하자 아내 없이 아스트라한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가을 사다트가 사망하자 그 형부와 재혼하였다.
1588년 이슬럄 2세가 사망한 후 계승한 가지 2세는 모스크바에 사절을 파견해 무라드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루스 차르국 측에서는 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답하였다. 1589년 2월과 여름에 모스크바를 두차례 방문한 무라드는 이듬해 차르의 허락 없이 고국 귀환을 결심하였다. 러시아인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출발 직전 무라드와 조카 쿠미크는 살해되었다. 루스 차르국은 이를 타타르 주술사들의 소행이라며 그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다만 사데트와 무라드의 과부 엣-투르간은 고국에 보낸 편지에서 남편과 의붓아들이 독살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평화 협정으로 엣-투르간은 사데트의 아들들 (데벨레트, 메흐메드, 샤힌)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