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etafiction메타픽션은 등장인물들이 작품 속 세계(fictional universe)가 픽션이라고 인지하는 설정을 둔 작품이거나,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말한다. 픽션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나 모순을 제기하여 아이러니와 자아 성찰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주로 쓰인다.[1]
영어 위키백과 List of metafictional works 문서에서 메타픽션 장르의 작품 목록을 볼 수 있다.[2]
당연히 대부분의 픽션 속 세계는 현실의 독자나 관객 입장에서 보면 허구이지만 적어도 작품 내에서 만큼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이라고 가정하고, 작품 속의 캐릭터들도 자신이 사는 세상이 현실이라고 믿고있는 것을 전제로 스토리가 짜여지는 반면, 메타픽션에서는 아예 작품 내에서도 이것이 픽션임을 전제로 하거나 작품 내 캐릭터들이 자신이 픽션 속 임을 인지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메타픽션과는 정 반대로 허구의 픽션 속 얘기가 실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는 실화 주장형 픽션,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픽션임을 고지하는 것은 픽션 면책 조항 문서로.
2. 역사
메타픽션이란 용어는 현대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개념은 훨씬 예전의 소설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14세기 시절 문학에서도 발견될 정도이다. 물론 당시에는 '메타픽션'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진 않았고 1970년대 소설가 William H. Gass가 쓴 "Philosophy and the Form of Fiction"을 통해 메타픽션이라는 용어가 생겨난다.물론 그 이전부터 메타픽션적 시도를 했던 작품은 존재했었다. 시초와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려고 한다면 가령 1920년대 쓰였던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인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에서도 이러한 메타픽션 시도가 사용되었던 것을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메타픽션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가상의 작가가 만든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작품 밖 연극 리허설 현장에 나타나 자신의 사연을 얘기하며 드라마를 전개하고, 그것이 연극 무대와 엮여 들어가는 식이다. 작품 속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현실(물론 관객 입장에서는 여전히 픽션이다)의 작가에게 버림받아 괴로워하다가 현실에서 연극을 올리려는 극단을 찾아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피란델로는 이후 메타픽션 장르의 선조로 평가받으며, 포스트모더니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창작물 속에서 픽션이 인지된다'라는 소재는 물론 아주 예전부터 사용되었고 메타픽션이라는 용어도 1번 의미로서 20세기 시절부터 존재했지만, '메타픽션'이라는 단어가 이 '창작물 속에서 픽션이 인지된다'라는 의미로 구체화된 것은 20세기 후반 및 21세기 초반부터이다.
3. 종류
메타픽션의 정의나 해석도 시대에 따라서 점점 변하고 있다. 본 문서에 적힌 해석은 당시 시대별로 대중적으로 널리퍼진 의미를 분류해놓은 것이다.3.1. 소설 이론의 재탐구/자기 성찰
영어로는 Self-Reflexive라 일컫는다. 소설 문화에서 메타픽션이라는 용어가 생겼던 당시의 의미는 이쪽에 가깝다. 포스트모더니즘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소설 속에서 소설 자신이 쓰이는 과정이 드러나거나 소설 속에 소설 자신이 등장하는 등의 요소를 첨가하여 창작 과정을 통하여 소설의 기본 이론을 기초부터 재탐구하려는 경향을 가진 소설을 말한다. 결코 앞쪽이 중요한 게 아니다. 기승전결과 자체 완결성을 배제하는 앙띠로망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양식. 이러한 실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선구자적 인물로는 루이지 피란델로와 남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있다. 다만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 전반에 들어가서 메타픽션의 의미는 후술할 2번, 3번의 의미 등으로 해석이 바뀌어갔다.3.1.1. 관련 문서
3.2. 창작물 속의 창작물
픽션에 대해 다루는 픽션 (fiction about fiction)
쉽게 말하자면 '소설 속의 소설', '만화 속의 만화', '영화 속의 영화'처럼 작품 속에 있는 작품 즉
극중극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다.EBS 수능특강 국어에서도 이를 다룬 소설이 등장했다. '미궁에 대한 추측'이란 소설이며, 전문을 읽어보면 책의 역자 서문 같지만 사실 소설이다. 처음 읽으면 그 난해함(?)과 생소함에 고개를 기울이고 평가원에선 출제를 주저하는 작품.
예시로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라는 게 있다. 이 작품은 영화 속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설정이며 어느날 내레이션의 목소리를 인식하면서 생기는 일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영화이기 때문에,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라는 영화 속 세계에 존재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작품 속 주인공이 자신이 영화 속 등장인물이란걸 인식하고 현실의 관객을 인식하진 못한다. 이 영화는 유명한 메타픽션계 게임 스탠리 패러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닥터후 코믹스중 하나인 'The Girl Who Loved Doctor Who'의 경우 주인공 일행이 어떤 평행세계로 빠졌는데 그 평행세계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 닥터후'라는 TV 드라마에 불과한 평행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만나기까지 한다.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매드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 작가의 소설이 현실로 일어난다는 설정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현실이 된 가상 캐릭터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메타픽션이 극중극의 형식으로 다뤄진다.
러시아계 미국인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중에는 독자들이 읽고있는 소설 그 자체가 작중인물이 작성한 텍스트라고 설정된 경우가 많다. 단순히 1인칭 서술이 아니라 해당 텍스트가 작중 세계관 내에서 원고나 책의 형태로 존재하고 독자는 그것을 읽고 있다는 설정. 나보코프의 양대 대표작인 < 롤리타>와 <창백한 불꽃>이 이런 특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롤리타의 경우 첫머리에 주인공 험버트험버트의 원고를 편집한 정신분석학자의 소개글이 나오며, 창백한 불꽃은 장편시의 본문과 그에 대한 해설(주석)이라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구조를 통해 텍스트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숨겨놓고 독자가 그것을 찾아내게 하는 퍼즐 풀이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3.2.1. 관련 문서
3.3. 창작물 속에서 픽션이 인지됨
픽션 그 자체를 의도적으로 반영한 픽션(fiction which deliberately reflects upon itself)
보통 대부분의 창작물은, 그 창작물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 작품 안에서는 현실이라는 가정하에 진행된다. 하지만 메타픽션은 그 작품 속에서도 그 세계가 픽션이라는 것이 인지되는 장르를 말한다. 즉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게임 속 등장인물이 자기가 사는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라는 식.
제4의 벽 돌파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픽션이란 걸 연극에서 비유해보자면 연극은 관람객석과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하고 있는 세계는 아예 별도의 세계로 간주된다. 그리고 '관람객석'(현실)과 '무대위'(가상) 사이의 이 경계를 제4의 벽이라고 부른다. (콘서트 장르의 무대가 아닌 이상) 스토리텔링 형식의 대부분 오페라/ 연극/ 뮤지컬 등에서는 관객은 무대 위의 상황에 간섭할 수 없고 무대 위의 상황도 관객에게 간섭할 수가 없다. 이것이 아마 보편적인 '픽션'의 개념이다.
하지만 메타픽션은 이 제4의 벽을 아예 뚫어버린 것 이다. 꼭 연극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게임의 경우 1인칭 시점, 영화의 경우 3인칭 전지적 시점 그 자체가 제4의 벽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만화 속 캐릭터가 이게 만화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한다거나 영화 속 캐릭터가 카메라를 향해 보며 관객들에게 말을 하고 이게 영화란 세계를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을 한다거나 아예 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작품 안에 개입한다거나[3] 하는 것들도 메타픽션의 일종이다. 애니메이션의 성우드립도 메타픽션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제4의 벽을 돌파한 대사나 연출을 메타발언이라고도 한다.
물론 작품 속 캐릭터가 이것이 작품 속이란 걸 인지하거나 관객, 독자, 혹은 플레이어를 인지하거나, 제작진 및 작가가 직접 작품의 개입하는 등의 메타픽션적 연출은 사실 아주 예전부터 존재했었고, 현대 작품에도 은혼, 마블 코믹스의 스탠 리, 데드풀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발언등은 스토리텔링에 중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 일종의 짤막한 '연출'에 불과했던것과 달리, 실제로 스토리나 장르에 메타픽션을 진지하게 개입시키고 깊숙하게 다룬 작품은 2010년대 이전까지는 흔치 않았다.
물론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9년 영화 퍼니 게임은 범인이 대략 영화를 만든 감독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며,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보더니 관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리모컨으로 영화의 시간을 다시 되감아서 상황을 뒤집어버리기도 하는 등 메타픽션적 연출이 중요하게 사용되었으며, 세계가 창작물이고 루프하고 있었던 설정의 1999년 애니메이션 The Big-O 및 마찬가지로 루프물이고 특정인에 들어가서 조종을 할 수 있으며 캐릭터들 일부가 플레이어를 인식했던 2001년 PS1용 게임 고기동환상 건퍼레이드 마치, 진지하게 메타픽션을 다룬 작품들도 종종 있었지만 이러한 작품들 중에서 크게 메타픽션이라는 장르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은 적었다. 저 세 작품은 그리 크게 흥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퍼니 게임은 너무 실험적인 영화라서 상당히 매니악했으며 Big-O는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어서 1쿨로 종료한 애니메이션이었고, 건퍼레이드 마치도 상당히 딥 다크한 분위기인 탓인지 게임의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다. 그나마 그 이후에 나온 미디어믹스인 애니메이션이 발랄한 청춘물로 장르를 탈바꿈하면서 좀 흥했던 정도.
하지만 2011년(리메이크는 2013년) 출시되었던 인디 게임 스탠리 패러블처럼 메타픽션을 스토리텔링이나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중요 도구로 다루는 작품들이 2010년대 이후로 여럿 생기게 되었다. 스탠리 패러블 이후로도 메타픽션 요소가 중대 스포일러였던 2013년 게임 당신과 그녀와 그녀의 사랑, 마찬가지로 메타픽션 요소를 적극 활용했던 2015년 출시 인디 게임 언더테일 및 2017년 출시 인디 게임 두근두근 문예부! 2016 스팀 정식 발매 어드벤처 게임 원샷 등등. 당시에는 문학에서 쓰였던 장르인 메타픽션이 2010년대 이후로는 게임계에서의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또한 오로지 '전지적 시점'으로만 진행되어 독자나 관객이 작품에 개입할 수 없는 다른 매체(만화, 영화 등)와 달리 게임이라는 수단은 플레이어가 직접 주인공을 조종하거나 특정 선택을 할 수 있는 등 작품에 직접 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메타픽션이라는 장르와 상성이 좋았던 이유도 있었다.
3.3.1. 관련 문서
4. 비판
분명 스탠리 패러블 처럼 아예 작품 자체가 픽션의 구조를 뒤트는걸 목적으로 하거나 데드풀, 언더테일, 원샷, 메탈기어 시리즈 처럼 스토리에 메타픽션적 요소를 개입시키면서도 훌륭하게 작품으로 소화시켜 좋은 평을 받은 작품도 있지만, 이런 몇몇 히트작들이 일으킨 광풍으로 메타픽션이라는게 일종의 트렌드로 너무 유행이 되고 남발되다 보니 일부 작품들은 스토리 진행, 연출 등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메타픽션만을 억지로 넣어서 비판받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만큼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에 잘 써야 하는 장르이다. 쉬헐크(드라마)도 제4의벽 돌파를 과하게 남발한 억지 결말로 비판을 받은 케이스.메타픽션이라는 설정 자체가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는 일단 사람에 따라서 몰입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히 현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픽션 세계는 실화 기반이나 다큐도 아닌 이상 이걸 현실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영화를 볼때 몰입할 수 있는건 적어도 '세계 내에서'는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이라 설정되어있고, 등장인물들도 당연히 자기가 사는 세상, 자기가 겪는 일들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걸 전제로 스토리가 짜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4의벽 돌파가 과도하게 개입되면 '여기 캐릭터들 지들이 픽션속 캐릭터인거 다 아는데 그럼 세계 내에서도 어차피 다 가짜라는거 아니야?' 하면서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것.[4] 즉 '관객 입장에서는 현실이 아닐지언정 캐릭터 입장에서는 현실'인 스토리가 '캐릭터들 입장에서도 현실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어차피 자기가 픽션인걸 알고있는 캐릭터들이 뭘 위해 싸우고 뭘 쟁취하려하든 몰입이 깨지는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인공지능도 아닌 이상 결국 자신들이 픽션임을 깨닫고 괴로워하든 뭘하든 그마저도 현실 작가가 쓴 대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기에 애당초 자신이 픽션임을 알고있다는걸 전제로 어떤 연기를 해도 그 연기 내의 그 어떤 자유의지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픽션에선 캐릭터들의 대사나 행동이 결국엔 그 세계 내에서는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데 세계 내에서도 이것이 픽션임을 인정해버리는 메타픽션 에서는 그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껏 몰입해왔던 스토리가 알고보니 세계 내에서도 허구에 불과했다는 꿈 결말로 끝나는 경우도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와 같다. 물론 꿈 결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선한 반전으로 충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메타픽션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 좋은 소재가 될 수도, 몰입을 해치는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