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5월의 여왕이라는 뜻으로, 과거 대학에서 5월마다 열리던 미인대회 행사다. 그런 대로 화젯거리가 되던 행사였고 일부 메이퀸 입상자는 연예계로 진출하기도 했다. 해당 대학교 내 메이퀸 입상자는 교내에서 가장 유명한 여학생+뭇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학교의 아이돌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메이퀸은 근처 연세대학교나 서강대학교에도 알려질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다.로마와 켈트에서 유래한 범 유럽적이며 정령신앙적인, 가톨릭 기준 이교도의 행사로 땅의 풍요로움과 대지모신을 위하는 행사다. 여기서 지모신의 화신, 아바타를 선정하는 것이 그 기원이 된다. 성당은 이러한 행사에 껄끄러웠지만 특별히 탄압하진 않아서 살아남았다.
2. 역사
아모레퍼시픽재단에서 설명하는 메이퀸 대회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한국에서 메이퀸 대회의 시초는 이화여자대학교였다. 1908년 열린 이화학당의 22회 개교기념 축제에서, 창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게 꽃을 엮어 만든 관과 함께 '메이 퀸'이라는 칭호를 헌사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이것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한 것이라고 한다. 제2대 메이퀸은 1910년 최활란, 제3대는 1917년 김활란이 뽑혔다.
1927년부터는 학생들 중에서 메이퀸을 뽑았다. 졸업 예정생들 중 성적, 품행, 신앙 등의 면에서 우수한 학생을 투표로 뽑는 대회를 만든 것이다. 메이퀸 대회는 1933년 중단되었다가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6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다시 열렸다. 1961년에는 메이퀸의 자격규정이 정해졌다.
각 대학 각 학과 4년 급에서 (
개신교) 신자로서 신앙이 돈독하며 성적과 품행이 우수하고 활동적이며 지도자격이 있는 대표적 인물. 신장은 160cm 전후.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메이퀸 대회는 취재용 헬기까지 동원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받았다.
이화여대의 메이퀸 대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메이퀸 대회가 과열되면서 학내에서 회의론이 일었다.1978년 5월, 메이퀸 제도 폐지를 위한 졸업생 모임이 결성되었고, 동시에 24개 학과에서 과퀸 선발을 거부했다. '대학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전통'이라며 폐지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메이퀸 대회는 폐지되었다.
다른 학교들에서도 1980년대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행사였지만 1990년대 이후 페미니즘 단체들이 성 상품화라는 이유로 반발해 모두 폐지되었다. 특히 이화여대처럼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대학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70년대에 이미 폐지한 바 있다.
이명박 전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이화여대 재학 중 메이퀸이었음[1]이 대통령의 회고에서 알려졌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고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뻔했던 장상도, 이화여대 재학 시절 수학과 퀸에 선출된 적이 있다. 맥도날드 할머니도 한국외국어대학교 메이퀸 출신이었다고 한다. 재벌가에 시집간 메이퀸도 있는데 현대가 정몽우의 부인인 이행자 고문이 숙명여대 메이퀸 출신이다.
[1]
학교 메이퀸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단과대나 학과 단위의 메이퀸이거나 자서전 특유의 흔한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