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26:37

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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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자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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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Onze 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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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칸토나 조지 웨아 마티아스 자머

UEFA 유로 1996 MVP
마티아스 자머

1995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위르겐 클린스만
( AS 모나코)
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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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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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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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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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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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자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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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이름 마티아스 자머
Matthias Sammer[1]
출생 1967년 9월 5일 ([age(1967-09-05)]세)
동독 드레스덴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2],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000000> 선수 SG 디나모 드레스덴 (1976~1985 / 유스)
SG 디나모 드레스덴 (1985~1990)
VfB 슈투트가르트 (1990~1992)
인테르나치오날레 (1992~199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3~1998)
지도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0 / 수석 코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0~2004)
VfB 슈투트가르트 (2004~2005)
행정가 독일 축구 연맹 (2006~2012 / 기술 이사)
FC 바이에른 뮌헨 (2012~2016 / 단장)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8~ / 외부 고문)
국가대표 23경기 6골 ( 동독 / 1986~1990)
51경기 8골 ( 독일 / 1990~1997)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행정가 경력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7. 기타

[clearfix]

1. 개요

독일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3], 수비형 미드필더[4]였다.

동독 클럽 디나모 드레스덴에서 데뷔, 독일 재통일 슈투트가르트 인테르를 거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특히 전성기를 보낸 도르트문트 시절, 분데스리가 2연패와 클럽 최초의 UCL 우승을 이끌고, 독일 대표팀[5]에서는 유로 1996 우승을 주도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이 업적으로 199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면서 역대 두 번째 수비수 발롱도르 위너가 되었다.[6] 그러나 UCL 우승 이후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1998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고, 결국 31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7] 은퇴 후에는 도르트문트의 감독을 맡아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기도 했으며, 독일 축구 연맹 기술 이사와 바이에른 뮌헨 단장을 거쳐 다시 도르트문트로 돌아와 외부 고문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통일되기 전 작센의 중심도시인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마티아스 자머는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클럽 SG 디나모 드레스덴의 유스팀에서 축구 커리어를 시작한다. 아버지 클라우스 자머]는 디나모 드레스덴의 감독이었는데, 1985년 성인팀에 데뷔한 자머는 뛰어난 기량으로 디나모 드레스덴을 이끌었고, 어린 시절부터 동독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 팀의 주축으로 성장해 나간 자머는 1988-89, 1989-90 시즌 연속으로 이 디나모 드레스덴을 동독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독 국가대표에서도 20경기 넘게 국가대표 경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그의 커리어에 변화가 온 것은 1990년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 통일 독일의 초기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때문에 동독인들이 크게 고통받아야 했고 동독의 명문 SG 디나모 드레스덴도 분데스리가 팀의 재력을 앞세운 공세에 한계를 느껴야 했다. 결국 자머는 통일 직전 UEFA컵 4강전에서 소속팀을 이기고 결승에 오른 분데스리가 슈투트가르트의 제의를 받고 슈투트가르트로 옮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즌 활약한 자머는 1990-91 시즌에 정식으로 동독 리그와 통합된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뒤, 세리에 A의 명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으로 이적한다. 하지만 인터 밀란에서의 1992-93 시즌은 이탈리아 적응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이탈리아 생활을 포기하고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로 돌아온 자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팀에 몸 담게 된다. 당시 도르트문트를 지휘한 감독이 바로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이다. 히츠펠트의 리베로 시스템에 최적화된 그는 리베로로 전향하게 된다. 히츠펠트 감독이 부임하고 스테판 샤퓌자, 카를하인츠 리들레 투톱과 팀의 핵심 미하엘 초어크의 맹활약, 떠오르는 신성 라스 릭켄이 공격을 지휘하는 도르트문트의 후방을 책임진 자머는 맹활약을 펼쳐 나가면서 강호이자 명문팀으로 거듭나게되며 결국 도르트문트는 1994-95 시즌 무려 32년 만의 리그 우승이자 창단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파일:EUgcBnWWsAERvAj.jpg
발롱도르를 수상한 자머
1995-96 시즌에는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위르겐 콜러와 축구사에도 길이 남을 당대 최고의 중앙 수비 조합을 형성하여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2연패를 달성했고, 이듬해 유로 1996 우승까지 이끌며 1996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브라질의 신성 호나우두와 잉글랜드의 간판 스타 앨런 시어러를 제치고 발롱도르를 수상한다.[8] 이는 베켄바워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수비수 수상이었으며, 현재까지 독일 선수와 분데스리가 소속 선수로는 마지막 발롱도르 수상 사례로 남아있다.[9]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6-97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파죽지세로 올라와 4강에서 맨유를 물리치고 결승전에서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유벤투스와 만났다. 자머는 무릎이 좋지 못한 상태였지만 출장을 강행했고 철벽 수비를 선보인다. 팀은 리들레와 라르스 리켄의 골로 델 피에로가 1골을 만회한 유벤투스에 3-1 승리, 창단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때 자머의 무릎 상태는 이미 은퇴를 고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셈.

1997-98 시즌의 대부분을 수술과 재활로 보내야 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 출전도 좌절되면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된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자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디나모 드레스덴에서의 활약으로 동독 대표팀에 승선한 자머는 통일 전까지 동독 국가대표로 23경기 6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통일 후 첫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1992에 출전하여 활약했지만 결승전에서 덴마크에게 0-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하지만 대회 도중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추태를 부리다 퇴출되고 팀도 8강전에서 불가리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에게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내주고 1-2로 역전패하며 탈락했다.

당시 자머는 에펜베르크의 파트너로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으며 그때까지 팀의 핵심이었던 로타어 마테우스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로 대표팀과 멀어졌고[10] 이렇게 중심없이 표류하던 전차군단을 다잡은 인물이 바로 서독 출신의 새로운 주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공격형 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묄러, 마테우스의 리베로 자리를 계승한 동독 출신 마티아스 자머의 3인방이었다.

유로 1996에서 이 3인방의 활약을 토대로, 독일은 2년 전의 치욕을 뒤로 한채 조별 리그에서 크리스티안 치게, 안드레아스 묄러의 골로 체코를 2-0으로 가볍게 제압한데 이어 클린스만의 두 골, 자머의 한 골로 러시아를 3-0으로 대파하는 등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고. 8강전에서는 떠오르던 강호인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위르겐 클린스만의 선제골, 자머가 결승골을 넣으며 돌풍을 잠재웠다. 이어진 4강에서 개최국 잉글랜드를 상대로 클린스만이 결장한 상황에서도 자머, 묄러가 중심이 되어 승부차기 끝에 팀을 결승에 진출시켰고, 결승에서 마침내 체코를 2대1로 꺾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6년 만에, 그리고 통일 독일의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다. 거기에 자머는 이 대회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수비수로는 정말 드물게 유로 1996 MVP를 차지하고,[11][12] 수비수로서는 사상 두 번째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자머는 30대로 접어들면서 수술대에 자주 오르는 유리몸이 되었고 1998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승선조차 하지 못한다.[13] 결국 자머가 빠진 공백을 메우지 못한 독일 수비진은 유고슬라비아에 2골을 내주는 등 불안한 모습을 노출시키다 기어이 크로아티아와의 8강전에서 경험 부족의 수비수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쓸데없는 반칙으로 퇴장당하며 0-3으로 대패하고 탈락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자머는 결국 국가대표로 복귀하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하고, 자머의 조기 은퇴 및 세대교체에 또다시 실패한 전차군단은 1994 미국 월드컵 때 들었던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다시 듣게 되었고, 유로 2004까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14]

3. 플레이 스타일



동독 축구가 배출해낸 '최후의 리베로'. 원래 미드필더 출신으로 세련된 테크닉과 넓은 시야를 겸비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할 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스위퍼, 즉 리베로로 포지션 변경 후에는 리베로 포지션에서도 훌륭한 판단력으로 절묘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당대 최고의 리베로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넓은 활동량과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커버함과 동시에 공격 전체를 진두지휘 했다. 피가 터지고 머리 부상을 입는 상황 속에서도 절대 필드를 벗어나지 않았고 특유의 매서운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팀을 지탱했다. 그러한 자머의 정신력을 바탕으로 도르트문트는 UCL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른 은퇴와 출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리몸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4. 지도자 경력

1998년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9-00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강등위기에 처하자 리그 경기 5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급하게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이 소방수로 임명된 우도 라테크 감독과 함께 남은 5경기 동안 2승 2무 1패로 리그 11위를 기록, 팀을 1부리그에 잔류시켰고 시즌 종료 후 우도 라테크에게 감독직을 넘겨 받아 2000-01 시즌 도르트문트 감독으로 임명된다. 전 시즌 리그 11위권에 머물렀던 도르트문트를 곧바로 리그 3위로 끌어올렸으며 2001-02 시즌에는 얀 콜레르, 마르시오 아모로소, 에베르통의 삼각편대를 앞세워 바이어 04 레버쿠젠 비이에른 뮌헨을 극적으로 따돌리고[15] 5시즌 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UEFA컵에서는 준우승을 차지 한다. 2002-03 시즌에는 초반 5경기에서 1승 4무를 기록하며 무패를 달렸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리그 중반 로스토크, 뉘른베르크, 하노버 같은 반드시 잡아야 할 하위권팀들에게 무승부 등 발목을 잡히면서 리그 3위에 만족했야 했다.[16] 당시 분데스리가는 리그 1,2위는 챔피언스 리그 직행, 3위는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부터 출발하였는데 2003-04 시즌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에서 클뤼프 브뤼허에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하며 UEFA컵으로 추락하였다. 재정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도르트문트 였기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여 고액의 TV 중계권료를 확보하는게 최우선이었지만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로 무산되었고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며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2003-04 시즌 초반 1군 스쿼드 중 11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할 판이었다. 당시 리그 초반 부상당한 선수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로소(무릎 부상), 얀 콜레르(폐렴), 오토 아도(십자인대 부상), 프링스(십자인대 부상), 콘세이상(근섬유 파열), 로시츠키(맹장 수술), 기 드멜(십자인대 부상), 메첼더(아킬레스건 부상), 페르난데스(발목 부상), 에바니우손(십자인대 부상), 데데(무릎 부상)>

주전 11명중 4명이 십자인대, 2명이 무릎 부상이라는 FM같은 게임이라도 뒷목을 잡을만한 부상 릴레이가 이어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분전하여 리그 6위로 끝마친다. 다만 팬들사이에서도 자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자머에게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경질된 지 얼마 안 되어 자머는 또 다른 친정팀인 VfB 슈투트가르트 펠릭스 마가트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슈투트가르트는 알렉산드르 흘렙, 케빈 쿠라니, 안드레아스 힌켈, 필립 람 같은 당시에는 어린 유망주들이 포진되어 마가트의 지도 아래 분데스리가의 돌풍을 이끈 팀이었는데 자머는 부임 이후 빠르게 팀을 수습하며 리그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자머의 베스트 11 위주의 기용 고집으로 다른 벤치 선수들과 불화를 겪으며 팀워크가 저해되었고 리그 막판에 부진을 겪어 리그 5위를 기록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머는 1년 만에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머의 후임으로 온 감독은 조반니 트라파토니.

그 이후 2006년 독일 축구 연맹의 기술 이사로 5년 계약을 맺으며 주로 11~18세 유소년 팀을 담당하며 유소년들에게 스포츠 과학으로 새롭게 체계를 만든 독일 축구 연맹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또한 요아힘 뢰프 감독이 이끄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술적인 부분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5. 행정가 경력

2012년 바이에른 뮌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단순히 사무실 업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티아스 자머도 감독 출신인 만큼 훈련장과 홈&원정 경기 등 선수단과 항상 동행하면서 선수단을 체크하다 2016년 질병으로 인하여 사임을 하게 되었다.

2018년 4월, 자머는 같은 보루센 레전드인 제바스티안 켈과 함께 도르트문트의 보드진에 합류하면서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 빌트지에 따르면 보루센의 새로운 보드진으로 합류하며 주로 회장인 한스-요아힘 바츠케와 함께 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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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7. 기타

  • 독일의 레전드급 선수라면 다 한번씩은 거칠 바이에른 뮌헨을 선수 시절 단 한번도 거치지 않은 안티 바이에른이다. 특히 도르트문트 팬들에겐 레전드. 하지만 선수 생활을 마치고 나서 스포츠 디렉터 자격으로 바이에른 뮌헨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사장과 함께 앞장서서 도르트문트를 견제하며 비난하고 도르트문트의 선수 이적에 간섭하고 있다. 당연히 친정팀 팬들 입장에선 클럽의 전설적인 선수가 다른 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친정을 괴롭히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 지금은 다시 친정팀의 단장으로 복귀했으니 다행이지만.
파일:GOAL_Defender.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수비수들 중 3위에 이름을 올렸다.

[1] /maˈtiːas ˈzamɐ/. [2] 스위퍼 [3] 스위퍼, 발롱도르 수상 포지션 [4] 1994 미국 월드컵까지만 해도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5] 동독 출신이다보니 1990년 독일 재통일 전까지는 동독 대표로 국가대항전에 출전했다. [6] 역대 최초는 1972년 프란츠 베켄바워. 이후 2006년 파비오 칸나바로가 수상하면서 세 번째 수비수 수상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 수비수가 발롱도르를 수상한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 오히려 2006년 이후로 수비수가 수상 가능성은 커녕 포디움(최종 후보 3인)에 단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가뭄이 지속되다가, 2019년이 되어서야 버질 반 다이크가 2위를 차지하였다. [7] 자머의 은퇴 이후 독일 대표팀은 1998 월드컵에서는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 0-3 완패를 당하고, 유로 2000에서는 포르투갈에 0-3, 잉글랜드에 0-1로 패하며 조 꼴찌로 탈락하는 등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8] 총점에서 144점을 얻어 143점의 2위 호나우두와 단 1점차 초박빙인 역대 최소 표차 수상이었다. 심지어 1위표는 호나우두가 16표를 받아 13표를 받은 자머보다 우세했기에 정말 아슬아슬했다. [9] 자머의 발롱도르 수상 이후 독일 선수 중에서는 올리버 칸이 2001, 2002년 연속으로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3위에 그치고, 2014년 마누엘 노이어도 포디움에 들었지만 3위에 그치고 만다. 분데스리가 소속 선수 중에서는 전술된 칸과 노이어에 2013년 프랑크 리베리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3위에 그치고, 2021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2022년 사디오 마네가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2위에 그치고 만다. [10]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데다, 한창 전성기를 구사하던 위르겐 클린스만과 사이가 매우 좋지않은 것도 큰 이유였다. [11] 현재까지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에서 대회 MVP를 수비수가 차지한 것은 이 때의 자머가 유일하다. 골키퍼로는 유로 2020에서 MVP로 등극한 잔루이지 돈나룸마가 최초. [12] 이 대회에서 보여준 자머의 퍼포먼스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 호세 나사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바비 무어,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 프란츠 베켄바워, 1998 프랑스 월드컵 릴리앙 튀랑, 2006 독일 월드컵 파비오 칸나바로 등과 함께 국제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3] 이때문에 자머를 대신해 마테우스가 39살의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컴백했다. [14]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깜짝 준우승을 기록하긴 했지만, 결승전까지 우승후보라고 불리는 전통의 강호들은 한 차례도 만나지않은 대진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15] 도르트문트의 승점이 70점, 레버쿠젠은 69점, 바이에른 뮌헨은 68점이었다. 최소 한경기만 무승부를 기록했어도 뒤집힐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6] 33라운드 까지만해도 도르트문트가 2위였으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슈투트가르트에 2위 자리를 내줬다.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