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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러디 밸런타인/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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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결성과 데뷔3. 크리에이션 레코드4. 해체와 재결합5. m b v

1. 개요


1983년에 결성된 아일랜드의 슈게이징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활동 내역.

2. 결성과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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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의 모습. (왼쪽부터) 데이비드 콘웨이 - 케빈 실즈 - 데비 구지 - 콜름 오시소그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케빈 실즈는 1963년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고 그가 6살 때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사했다. 10대 때, 그는 팝 음악에 사로잡혔다. 1978년 케빈 실즈는 드러머 콜름 오시소그와 친해졌는데 이 둘은 14살부터 가라테 대회장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다. 이 둘은 의기투합해 1978년 아일랜드에서 콜름의 친구와 셋이서 더 콤플렉스(The Complex)라는 밴드를 짠다. 섹스 피스톨즈, 라몬즈 펑크 밴드의 곡을 커버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콜름의 친구 리암 오 마옹라이(Liam Ó Maonla)가 Hothouse Flowers를 결성하기 위해 떠나면서 해체되었다. 그 후도 케빈과 콜름은 트리오 밴드 라이프 인 더 데이(A Life in the Day)라는 포스트 펑크 밴드를 결성하지만, 인기가 없어 다시 해산한다. 라이프 인 더 데이 해산 후 케빈과 콜름은 1983년 데이비드 콘웨이(David Conway)라는 아일랜드 가수와 함께 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결성했다. 이 당시의 결성 멤버는 현재는 탈퇴한 데이비드 콘웨이와 현재까지 멤버로 있는 케빈 실즈, 콜름 오시소그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라는 밴드 이름은 초기에 있던 멤버인 데이비드 콘웨이가 제안한 것으로 B급 공포영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케빈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그 영화를 당시에는 보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 밴드 이름을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86년에 밴드 이름이 어떤 영화 제목이랑 똑같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영화를 봤더니 최악이야. (웃음) 정말 싫어하는 영화와 연관짓는 건 딱 질색이라서 밴드 이름을 바꾸고 싶었고 지금도 바꾸고 싶을 정도다. 저 영화와는 음양의 관계인것 같고, 저 영화가 음이라면, 우리 밴드는 양이네.
― 케빈 실즈, CROSS BEAT 2012년 #

1983년 3월 기타리스트 스티븐 아이버스와 함께 케빈 실즈와 데이비드 콘웨이는 케빈 실즈의 부모님 집에서 4트랙 레코더로 밴드의 첫 데모를 녹음했다. 케빈 실즈와 콜름 오시소그는 리통 레인 스튜디오에서 리듬 트랙을 오버더빙했다. 이 데모가 좋은 평가를 받아 마이 블러디 밸렌타인은 타이쿤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몇 차례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를 고용해 음악 작업을 벌였으나 거듭된 멤버의 탈퇴와 교대로 일이 꼬였다. 멤버가 교체되면서 데이빗의 여자친구 티나 더킨[1]이 키보디스트로 가입했다. 이후 미국 밴드 R.E.M.의 오프닝 액트를 맡기도 했다. 아일랜드의 음악계가 자신들의 밴드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2] 3개월 정도 네덜란드에서 작업을 하던 밴드는 베를린으로 옮겨 첫번째 미니 앨범 《This Is Your Bloody Valentine》을 발매한다. 이 미니 앨범은 초기 멤버였던 데이비드 콘웨이가 보컬을 취하고 있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사운드와 전혀 다르다. 이 앨범의 장르는 포스트 펑크, 고딕 록이였고 닉 케이브의 밴드로 유명한 버스데이 파티의 영향을 받은 앨범이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으며, 퀄리티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데이비드 콘웨이 활동 당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음악.

이 밴드의 초기 앨범들을 들어보면 현재 《 loveless》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스타일과는 많이 달라 듣고 있는게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인데, 메인 작곡자가 실즈가 아니라 이전 멤버인 데이비드 콘웨이였고 보컬 역시 콘웨이였기 때문이다. 지금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 실즈와 부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 당시에는 콘웨이가 중심이고 케빈 실즈는 밴드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MBV 팬들은 이 당시 콘웨이 시대의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3] 1985년 중반,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티나 더킨은 밴드를 탈퇴했고, 나머지 밴드들은 베이시스트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 여름에 여성 베이시스트 데비 구지를 밴드의 신규 멤버로 맞이해, 피버 레코드가 소유한 세일럼 스튜디오에서 리허설을 했다.

이 음반사의 소유주들은 이 밴드에 감명을 받았고, 12월에 또 다른 EP인 《Geek!》을 발매했다. 1986년 10월에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신작 EP 《The New Record by My Bloody Valentine》가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 조 포스터의 레이블인 칼리도스코프 사운드(Kalidoscope Sound)에서 발매됐다. 조 포스터는 또한 이 EP를 프로듀싱하기도 했는데,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영향을 받은 사운드를 선보인 이 EP는 영국 인디 차트에서 2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EP의 성공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재정적 성공을 안겨줬고 더 자주 공연을 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런던 외곽에서 후속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1987년 초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밴드 프리미티브스(The Primitives)의 레이블 레이지 레코드(Lazy Records)와 계약을 맺고 《Sunny Sundae Smile》이라는 싱글을 냈다. 경쾌한 멜로디와 그라인딩 기타를 결합한 밴드의 첫 번째 음악적 성취의 싱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음악씬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C-86[4]에서 통하는 기타 팝을 들려 준다. 또 이 노래는 영국 인디 싱글 차트에서 톱 10 히트곡이었다. 이 싱글은 콘웨이 시대의 마지막 작업물이다. 1987년 3월 투어에서 데이비드 콘웨이는 건강 문제, 음악에 대한 환멸감,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밴드를 떠나기로 발표했다. 콘웨이는 밴드 탈퇴 후 호러/ SF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콘웨이가 탈퇴한 이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음악은 대격변을 맞이한다.
데이비드 콘웨이 탈퇴 이후의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음악.

콘웨이가 밴드를 떠나면서 리드 보컬을 잃은 밴드는 다시 오디션을 갖고 보컬리스트를 모집했다. 오디션 결과, 1987년 4월에 밴드는 기타 연주도 할 수 있었던 보컬리스트 빌린다 부처[5]를 뽑아서 비로소 현재의 라인업을 완성시켰다, 동시에 60년대의 사이키델릭 록과 70년대의 펑크에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록색이 강한 사운드로 변화한다. 케빈이 데이비드 대신 노래를 부르고[6], 케빈과 목소리가 비슷한 빌린다의 트윈 보컬 체제가 된 것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특유의 사운드를 결정지은 큰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를 영입하고 현재의 멤버 라인업이 되었을때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라는 이름도 바꿔버리려고 했지만 딱히 좋은 이름이 없어서 그냥 계속 썼다고한다. 이 라인업으로 발매한 첫 EP이자 영국 인디 싱글 차트에서 13위에 오른 《 Strawberry Wine[7] 그리고 《Strawberry Wine》 릴리즈로부터 한달 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다시 한 번 《Ecstacy》 EP를 완성했다.

한달 만에 발매된 미니 앨범 《Ecstacy》는 빠르게 녹음되었다. 이 앨범은 이 밴드가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녹음할 수 있는 것을 증명했으며, 케빈 실즈가 개발한 혁신적인 기타 기술을 포착할 수 있는 첫 기회를 제공한 중요한 미니앨범이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사운드에 버즈 앤 러브,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의 요소를 접목한 《Ecstacy》는 영국 인디 앨범 차트에서 12위에 올랐다. 덧붙여서 《Strawberry Wine》 EP와 《Ecstasy》 EP를 합친 컴필레이션 앨범 《 Ecstasy and Wine》을 발매한다. 이 당시 사운드는 꽃밭처럼 컬러풀한 얼터너티브 록, 쟁글팝 느낌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느낌의 음악이지만 이때부터 스타일이 현재의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3. 크리에이션 레코드

《You Made Me Realise》의 수록곡들

1988년 1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설립자 앨런 맥기(Alan McGee)를 만나 그가 주최하는 행사에 출연한다. 이 행사에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은 앨런 맥기의 밴드 'Biff Bang Pow!'와 공연을 했다. 행사 후 앨런은 밴드에게 크리에이션 레코드 레이블 소속으로 싱글을 제작할 기회를 주었다. 밴드는 같은 해 8월에 레코딩에 들어가, 이스트 런던 스튜디오에서 일주일도 채 안되어 작업한 EP 《You Made Me Realise》를 크리에이션으로부터 발매했다. 이 EP는 영국 인디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비평가들로부터도 일제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EP는 MBV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필청해야하는 EP다. 이 EP를 기점으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지금까지의 사운드에서 더 큰 변모를 이룬다. 강렬한 기타 연주와 기관총 같은 격렬한 드럼, 덧없고 관능적인 멜로디를 융합함으로써 MBV는 단숨에 영국 인디씬의 최전선으로 우뚝 서게 된다. 타이틀 곡 《You Made Me Realise》는 지금도 MBV 라이브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표곡 중 하나이다. 종반의 노이즈 파트[8]는, 스테이지에서 10분 이상에 걸쳐서 펼쳐져[9] 모든 감정이나 사고를 날려버릴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사운드는, 사전에 배포되는 귀마개와 함께, 그들의 라이브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고 있다.

또, 《Slow》의 묵직한 리듬이나 퍼커시브한 멜로디에는,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초기 사운드의 영향도 볼 수 있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소닉 유스, 다이노소어 주니어 등 미국 밴드에서 영향을 받은 사운드를 노이지, 펑키시한 어레인지로 변환시키는 등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차례차례 구현함으로써 이후 라이드, 페일 세인츠, 챕터하우스같은 슈게이징이라고 불리는 밴드들의 양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기타 트레몰로 암을 든 채 코드를 누르고 변조시키는 케빈의 연주 스타일이다. 여기에 리버스 리버브라고 불리는 역회전과 비슷한 이펙트 처리와 변칙 튜닝의 울림 등을 조합한 시공이 일그러지는 듯한 사운드(글라이드 기타)는 당시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충격적인 사운드였다. 케빈 실즈의 리버스 리버브 사용, 얼터네이티브 튜닝, 트레몰로 암 조작 및 풍부한 효과는 밴드의 스타일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50년대 이후 척 베리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이 훌륭한 방법으로 트레몰로 암을 사용해 왔지만 대부분의 트레몰로 암은 80년대산 모던하고 세련된 음색이 드러나기 때문에 특별히 끌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83년경 한 친구가 펜더 재즈 마스터를 강력히 추천해줬다. (중략) 그래서 쳤더니 다른 기타와는 확연히 다른 트레몰로 암 사운드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10] 마치 테이프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느낌으로. 너무 재밌어서 완전 빠져버렸다. 그게 EP 'You Made Me Realise'에 수록된 'Slow'다.
― 케빈 실즈, CROSSBEAT 2012년 #

3.1. Isn't Anything

《Isn't Anything》의 수록곡들

이후 10월 발매하는 싱글 《 Feed Me With Your Kiss》는 한달 뒤 발매되는 데뷔 앨범 《 Isn't Anything》에 수록되는 등 "선행 싱글"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질주하는 강박관념적인 드럼 위에서 빌린다와 케빈이 번갈아 가며 부르는 이 싱글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하드코어한 기타 리프를 포함해 음미하고 경악하며, 그러면서도 유머감을 느끼게 한다. 이 노래를 작곡한 케빈도 장난기가 있는 곡으로 완성됐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11]
EP의 히트로 정규 앨범 제작 기회를 잡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같은 해 11월 웨일스에서 녹음한 데뷔 앨범 《 Isn't Anything》을 발매했다. 노이지한 사운드와 탈진적인 남녀 보컬의 조합을 들려주는 이 앨범은 비평가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인디 차트에서도 마침내 1위를 기록했다. 이 작품의 디스토션이나 샘플러 등을 사용한 격렬하고 달콤한 음악은 이후에 " 슈게이저"라고 불리며 유사한 사운드를 울리는 팔로워 밴드를 탄생시키는 록 역사의 중요한 앨범 중 하나다.

당시 수면장애에 시달리던 케빈은 대마초 엑스터시를 복용하면서 거의 최면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 채 연일 철야에 이르는 작업을 반복했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귀신이나 소, 외계인 등의 환각까지 볼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당시를 회상한 케빈은 당시의 본인의 상태를 "미쳐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에 700 파운드의 저예산에다가 녹음기간이 단 2개월이라는 제약 속에 평균 수면시간 2시간 만에 간신히 완성시킨 것이 바로 앨범 《 Isn't Anything》이었다. 베이시스트 데비 구지는 '섹스야말로 넘버 원의 마약'이라고 말할 정도로 섹스에 빠져 살았고, 케빈 또한 "soft as snow (but warm inside)과 "feed me with your kiss'같은 곡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연인이자 팀 동료인 빌린다와의 섹슈얼한 관계에 영감을 얻어서 많은 곡들을 만들었다. 이들의 명반 중 하나인 《Isn't Anything》은 그런 밴드의 상태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새겨져 있다. 《No More Sorry》의 가사는 당시 빌린다를 괴롭혔던 첫 번째 남편을 저격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 Isn't Anything'은 인간성에 관한 것이다.
― 케빈 실즈, 롤링 스톤 #
빌린다의 맏아들 토비의 아버지인 옛 파트너는 머리가 지끈거려. 그의 악행은 《loveless》 무렵까지 계속되고 있었어. 그 인간은 아들을 쫓아다니기도 하고 당신을 죽여 버리겠다거나 아들을 유괴해 버리겠다거나 그녀를 협박하기까지 했지. 그러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름다운 연애 관계도 자라났어.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운드가 생겨났고 섹스는 그 큰 요인이었지. 그것은 자극적이고, 점점 경험을 거듭해 가고 있었어…… 어쨌든 우리들은 당시 25세 정도였으므로, 젊었으니깐.
―케빈 실즈,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야말로 모든 것 #

밴드에게 1988년은 엄청나게 결실이 많은 해였다. 당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명성은 그룹의 미국 레이블이 된 미국의 'Sire/Warner Bros.'의 관심을 끌 정도로 커져 버렸다. 1989년 초에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사운드의 영향을 받은 팔로워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라이드 슬로우다이브가 그렇다.

3.2. loveless

1989년 2월이 되자 밴드는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크리에이션 레코즈는 5일 안에 녹음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고 케빈은 작업 초기에 앨범 녹음에는 6개월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2년 반이 걸리게 된다. 케빈 실즈는 세션을 반복적으로 진행하였고 이 기간 동안 케빈 실즈의 까다로운 완벽주의와 실험적인 녹음 기술, 기술적인 어려움, 그리고 밴드가 고군분투했던 질병들[12]이 생기게 됐다. 당시 콜름은 리듬 트랙을 만들기 위해 샘플링된 몇 개의 드럼 패턴만 연주할 수 있었다. 2년 이상 지속된 이 프로세스는 19개의 스튜디오에서 작업됐으며 앨런 몰더(Alan Moulder), 안잘리 두트(Anjali Dutt) 및 라이카(Laika)의 가이 픽스센(Guy Fixsen)등 9명의 엔지니어들이 참여했다. 녹음 내내 스튜디오에 있던 스태프들은 그의 피드백 역회전 기타를 반복하는 케빈의 행동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13] 뒤늦게 돌이켜보면 2년 반이라는 시간은 케빈이 그리는 이상의 사운드스케이프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앨범 녹음 기간이 길어지자 케빈과 크리에이션의 창립자 앨런 맥기는 먼저 다른 EP를 출시하기로 하고 1990년 4월 EP Glider를 발표했다. 그렇게 해서 잉태된 《Glider》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었다.
Soon

《Glider》의 리드 트랙 《 soon》은, 당시의 유행한 두 번째 사랑의 여름[14](Second Summer of Love)과 매드 채스터 무브먼트와 공진하는 댄스 비트다. 《 Isn't Anything》이상에 만취해버린 기타 사운드, 그리고, 빌린다와 케빈의 녹아드는 듯한 보컬 전부가 믹스된 명곡이다. 브라이언 이노[15]는 이 노래를 '대중음악의 새로운 표준'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타이틀 곡 《Glider》은 제목 그대로 거대한 난기류 속을 글라이더로 비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인스트루멘털 넘버다.

1991년 2월이 되어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2집 레코딩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EP 《Tremolo》를 발매했다. 이쪽도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UK 인디차트에서도 톱을 기록하고 있다. 《Tremolo》는 《 to here knows when》을 리드곡으로 내건 작품이다. 《Swallow》는 터키의 벨리 댄스 뮤직을 카세트로부터 추출해 리듬에 이용하는 등, 샘플링을 더욱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Tremolo》의 특징이다. 수록곡을 3개의 유현한 인터루드로 연결, 총 1곡처럼 들리도록 했는데 이 기법은 같은 해 발표한 이들의 2집 《 loveless》에서도 사용된다.

1991년 11월, 2집 《 loveless》가 마침내 발매된다. 현재는 록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걸작으로 평가받지만, 《 loveless》는 밴드 멤버들이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녹음 중에 케빈과 빌린다는 헤어졌고, 첫 남편의 폭력에 겁먹은 빌린다는 아들 토비를 납치당할까봐 불안감에 공황장애를 앓아 최면요법을 받고 있었다. 콜름은 몸이 아파 드럼을 제대로 치지 못한 데다 집을 잃었다. 한편, 데비도 오랜 세월 사귀고 있던 동성 연인과 헤어져 심리적으로 불안감에 빠져 레코딩에 참가할 수 없었다. 사실상 《loveless》는 케빈 혼자 레코딩한 앨범이었다. 그러한 밴드의 사정을 안으면서, 앨범 발매를 향한 집요한 재촉을 레이블측으로부터 계속 받은 케빈은 나날이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창립자 앨런 맥기에게 불신감을 더해 간다.
《loveless》의 수록곡들
인간성의 일부는 다른 것이고, ' loveless'는 더 다른 것이다. 인간성은 영혼 속에 있지만, 분명히 특별히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태도를 나타내었고, 나는 그것을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깨달았다.
― 케빈 실즈, 롤링 스톤 #
저 앨범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줘, 난 그렇게 확신해. (중략) 앨런이 '야, 음반이 어딨어?'라고 물으면 케빈은 거의 다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앨범에서 첫 번째 싱글이 나오자 그 곡은 《Soon(바로)》라는 제목이었다. 그래서 다시 앨범 언제 나와?라고 물었더니 다음 싱글 곡은 《To Here Knows When(언제냐고 묻는다)》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빈이 모든 곡을 끝내자 그 프로젝트는 《loveless(사랑이 없다)》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 파올로 휴위트[16]의 『크리에이션 레코즈 이야기』 #
난 울지 않지만, 그게 날 울게 했어. 그냥 날 미치게 했어.
― 앨런 맥기 (크리에이션 레코드 설립자) #

하지만 이 앨범은 밴드 사령탑인 케빈의 뇌 속 이미지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 Isn't Anything》에서 한층 더 진화된 혁명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록 역사상 최고의 걸작 앨범 중 하나다.《 loveless》의 겹겹이 층을 이룬 기타, 신디사이저, 샘플러에 의한 소리의 벽(Wall of sound)은 90년대 이후 거의 모든 기타 밴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loveless》의 레코딩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정확한 천재인 케빈은 강박관념에 가까운 정밀함으로 앨범의 사운드를 만들었다. 19개의 다른 스튜디오에서 녹음테이프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케빈은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레코딩을 하다가 녹음 장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 동안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눈에 거슬리는 스튜디오 비용을 마련했다. 이 앨범의 엔지니어링은 브라이언 이노의 제자 앨런 몰더(Alan Molder)가 담당했다.

또한 이 앨범에는 엄청난 제작비가 투여됐는데 전작 《 Isn't Anything》의 제작비가 7천파운드이었던 것에 더해, 《 loveless》는 2년이 넘는 기간동안 19개의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이 영향을 주어, 27만파운드라는 제작비가 투여되어 크리에이션 레코즈가 파산 임박까지 갔다는 설이 있었다. 수년 동안 《 loveless》가 제작하는데 25만 달러가 들었다는 다양한 보도가 있었다. 케빈은 몇 년 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행동에 대한 다른 악명높은 이야기들과 함께 그의 행동에 대한 소문을 일축했다. 케빈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확실히 매우 미쳤었다. 그것은 매우 불쾌하고 과도하게 운전하는 상태 였지만 결코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

케빈이 제공하려고 했던 어떤 현실적 점검도 90년대의 최고의 레코드 중 하나를 만들어낸 케빈의 음악적 성취를 약화시키지 못했다. 케빈의 손에서 만들어낸 《 loveless》는 광기와 집착의 이야기에 싸인 자기영구적인 기계이며, 천재의 요구에 대한 속기가 되었다. # 하지만 대중음악계의 걸작 중 하나인 《 loveless》는 당시 트렌드와 전혀 거리가 먼 음악이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실패를 거둔다. 영국 음반 차트에서는 24위를 기록했지만,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전혀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당시 록씬의 트렌드는 너바나 펄 잼으로 대표되는 그런지였다. 당시 미국에서 밴드는 다이노서 주니어의 서포터 밴드로 등장하면 미국 진출을 이루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앨범은 비록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만장일치로 찬사를 받았다.

loveless》가 발매되자마자 크리에이션 앨런 매기는 제작비 문제 등으로 곧 밴드와 계약을 종료했다. 이 앨범은 이대로 묻히는 듯 했으나, 해가 지날수록 점점 평가가 상승해, 현재는 1990년대의 대표적인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Q.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 loveless》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앨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케빈 실즈: “음, 내 생각이라…. 당시 그 앨범은 찬밥 신세나 다름없었다. 크리에이션 레코드사는 발매 한 달 후 우리를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아무런 홍보도,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딱히 우리 편을 들어 주는 직원이 없었다. 다들 그냥 이상한 밴드로만 생각했다. 시험 삼아 그래도 한 1~2주 동안은 열심히 지원해 주더니만 그러고 끝이었다. 요컨대 당시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 기대했고, 결국 그 바람대로 됐던 것 같다. 한데 그렇게 된 데는 대중의 몫이 컸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 지역이나 매체, 혹은 특정 팬 층이나 뮤지션, 기자들 따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정해 준 거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의 의견이 쌓이고 쌓여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출처
Q. 《 loveless》가 발매된 지 올해로 30년이 지났는데, 지금 그 앨범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느끼시나요?

케빈 실즈: "잘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최근 재발매를 위해 스스로도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들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있다고나 할까."뭐야, 이런 사운드였어?" "이런 거 했어?" 이러면서 놀라더라고. 너무 신기하지만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어서 기쁘고 자랑스러워. #

4. 해체와 재결합

크리에이션 레코드과의 계약을 끝낸 밴드는 1992년 10월에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와 계약을 맺었다. 아일랜드 레코드사와 계약한 후 케빈은 새 음반 제작을 위해 홈스튜디오를 지었지만 기자재가 쓸모없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계속되면서 녹음은 다시 정체됐다. 1995년에는 콜름과 데비 구지가 밴드를 떠났지만, 케빈과 빌린다는 3집 제작을 시도했고, 케빈은 앨범이 1998년에야 나올 수 있음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작 도중인 1997년 빌린다도 밴드에서 탈퇴하면서 밴드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결국 3집을 완성하지 못했다. 10년동안 앨범이 없자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는 2001년 밴드를 고소했다. 출처

이후, 케빈은 프라이멀 스크림의 투어 멤버를 맡거나 이들의 앨범 <XTMNTR>, <Evil Heat>에 도움을 주었고, 2013년의 프라이멀 스크림의 신보에도 기타 녹음을 해 주었다. 또 요 라 텡고, 다이노서 주니어 등의 밴드와 콜라보레이션을 실시했다. 케빈 실즈는 2003년 영화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음악을 담당해 제작하기도 했다.[17] 종종 활동 중단 전에 녹음한 음원의 발매나 재결성 소문이 팬들 사이에서 돌거나 케빈이 활동 중단 전의 음원은 아일랜드 레코즈에 전달됐다고 말하는 등 새로운 움직임이 미디어에 다루어졌지만 이들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고 눈에 띄는 진척도 볼 수 없었다.
2008년 런던 라운드하우스 공연

그렇게 밴드는 1990년대부터 오랜 침묵을 이어오다 2007년 8월 드디어 재결합 기사가 뜬다. 이들이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2008년 6월에는 케빈, 콜름, 데비, 빌린다의 4명이 영국 라이브하우스에서 라이브를 재개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 유럽 음악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에도 헤드라이너로 출연했다. 대표곡 'You Made Me Realise'에서는 무려 15분간의 피드백 노이즈를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9월경부터는 북미를 도는 투어도 감행했다. 재결합 이후 계속해서 투어를 하다가 2012년에는 과거의 정규 앨범 《 Isn't Anything》, 《 loveless》의 리마스터 앨범과 컴필레이션 앨범 《EP's 1988–1991》을 발매하게 된다. 케빈 실즈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한 리마스터 앨범이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아시아 투어가 시작돼 일본 도쿄와 오사카 공연을 모두 매진시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돌연 발매된 것이 2013년 3집 앨범 《 m b v》다. 2월 3일 밤(영국 시간)에 밴드 공식 사이트가 리뉴얼되면서 LP, CD, DL판이라는 세 가지 포맷이 준비됐다. 사이트에는 리뉴얼과 동시에 접속자가 폭주해 순식간에 서버가 속 폭주로 다운되는 소동이 벌어졌고 몇 시간 동안 트위터 페이스북에 팬들의 징징불평이 이어졌으며 백악관에 청원까지 올라갔었다.

5. m b v

기나긴 세월동안 나오지 않았던 음악계 베이퍼웨어 중 하나가 발매 된 순간이었다. 무려 23년만의 정규 앨범인 《 m b v》는 1995년부터 1997년 사이 케빈이 빌린다와 함께 자신의 홈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찍어둔 아이디어 음원들이 바탕이다. 한번 엎어진 이 음원들을 2011년 《 Isn't Anything》, 《 loveless》 리마스터 작업 때 우연히 다시 들을 기회가 있었고 솔로 명의로 된 발매도 고려하면서 보완한 결과 《 m b v》라는 신작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당시 케빈은《m b v》에 대해 비치 보이스의 《 SMiLE》을 인용해 말하기도 했다. 과거에 찍은 여러 단편들을 현대의 해석으로 조합하고 거기에 새로운 기타나 보컬, 기타 악기를 겹쳐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작품은 2011년경 진행된 비치 보이스의 《 The Smile Sessions》 프로젝트와 분명히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m b v》의 수록곡들
확실히 버트 배커랙의 영향도 있고,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보사노바로부터의 영향이, 배커랙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기묘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프린스의 영향도 있어. 사실 《New You》의 멜로디의 절반은 커트 코베인이 죽은 뒤 쓴 것이다. 나는 그의 부고를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그 생각만 했다. 커트와 같은 입장이 되면…… 등이라고 생각해 버렸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곡이기도 하고 이별 곡이기도 하다. 죽은 자에 대한 이별이 아니라 산 자에 대한 죽은 자와의 이별과 같은. 그런 생각을 노래한 곡으로 완성됐어.
― 케빈 실즈, 롤링 스톤 재팬 인터뷰에서 #

이 앨범은 평단들에게 '완벽한 복귀'라는 평을 받았으며, 피치포크는 9.1점을 줬고 메타크리틱에서는 87점을 기록했다. 앨범 《m b v》의 특징이라면 케빈 실즈의 멜로디메이커,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동안 혁신적인 기타 사운드나 강렬한 노이즈의 그늘에 묻히기 일쑤였던 멜로디 라인이 본 작품에서는 비교적 앞에 나와 있다. 또, 라이브에서는 드물게 데비가 코러스를 취하는 《New You》는, 이 앨범의 베스트 트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트랙은 미국의 피아니스트 버트 배커랙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원래 케빈은 비틀즈, 라몬스, 더 후가 영웅이었으며 어린 시절에는 TV에서 나오던 할리우드 영화의 음악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독특한, 부유감 가득한 멜로디 라인이나 코드 전개는, 그러한 음악 체험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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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재발매 바이닐

m b v》 이후로는 주로 투어를 하고 있다. 2013년 새 앨범을 작업한다고 말했지만 역시 나오지 않았고, 2018년에도 케빈은 새 앨범이 나온다고 말했지만 역시나 나오지 않았다. 2021년 3월 31일 도미노 레코딩 컴퍼니와 유통 계약을 체결해 모든 스튜디오 앨범을 실물로 재발매하고, 스트리밍 사이트에도 곡을 풀었다. 계약 발표 후 여러 매체와 진행된 인터뷰들에서 케빈 쉴즈는 새 앨범의 발매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무려 2개의 앨범을 제작중이라고 한다.[18] 하나는 "따뜻하고 멜로디적인" 앨범이고 다른 하나는 더 실험적인 앨범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바이닐 제작 공장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빌린다 부처는 밴드가 2021년 말까지 녹음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


[1] 티나는 키보드 연주에 자신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1985년 탈퇴한다. [2] 당시 아일랜드 음악계는 U2가 데뷔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3] 이런 이유로 콘웨이가 탈퇴하지 않고 계속해서 밴드에 있었다면,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그저 그런 평범한 밴드로 남아 유명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음악잡지 NME의 컴필레이션으로부터 취해진 씬의 호칭. 주로 쟁글 팝, 파워 팝에 속하며 스코틀랜드 출신 밴드가 많다. 프리미티브스, 수프 드래곤, 사라 레코드 소속 뮤지션, 파스텔스, 바셀린즈가 대표 밴드로 꼽힌다. [5] 빌린다 부처는 어린 시절 클래식 기타를 배웠고 주로 재미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6] 원래 케빈은 노래를 부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디션으로 메인 보컬을 뽑아서 뽑힌 사람에게 전적으로 보컬을 맡길 생각이었다, [7] 덧붙여서 지금까지의 릴리즈를 모은 CD가 네덜란드의 레이블에서 한동안 나왔다. [8] "홀로코스트 섹션 Holocaust Section"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9] 정말 길 때는 30분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10] 케빈은 트레몰로 암의 연결부에 테이프를 감아 원래 규격보다 더 높게 꽂아 넓은 가동범위를 활용한다. [11] "남녀 보컬의 흥정은 굉장히 트래디셔널한 낸시 시나트라 시절의 곡 같아.(웃음) 그런데도 곡의 애티튜드는 버스데이 파티(The Birthday Party)적이기도 해. 조금 웃기는 이상한 곡이지만, 장난기가 있는 곡으로 완성된거라고 생각해. 절대 회고주의적인 곡은 아니야 아마 1985년인가 그 이전에 우리가 들었던 음악으로부터의 영향이 들어있지만, 사운드적인 어프로치는 새롭다. 뭐, 비교적 간단하게 완성된 곡이긴 하다." # [12] 당시 케빈 실즈와 빌린다 부처는 이명을 앓았다. [13] "이것도 역시 힙합의 영향인 것 같은데 특히 드 라 소울의 해피한 느낌이다. 그 전형적인, 가볍게 튀는 베이스라인이 있지? 저런 느낌이나 코드의 느낌이, 원래의 발상으로서 있었을 거야. 사운드에 관해서는 샘플러를 구사했어. 사실 이때 기타의 피드백 노이즈를 샘플링해 포개는 수법을 처음 시도한 거야. 키패드가 탑재된 샘플러였기 때문에 그것을 두드리면서 피드백 노이즈를 반복해 갔지. 게다가 시퀀서도 컴퓨터도 일절 쓰지 않고 오로지 테이프에 담아냈어." # [14] 두 번째 사랑의 여름은 1988, 89년 여름 애시드 하우스의 발흥,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과 엑스타시의 광범위한 보급, 그리고 레이브 파티의 활성화로 인해 영국 젊은이층 전반에 행복감이 만연해있던 시기를 가리킨다. [15] 이노와 케빈 실즈는 2017년 합작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16] NME 소속의 30년 경력의 저명한 영국의 대중음악 평론가다. [17] 앨범 < loveless>의 트랙 < sometimes>가 실리기도 했다. # [18] 하지만 워낙 지연을 많이 하고 거짓말을 많이 치는 케빈이라 팬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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