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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동남쪽의 '1호 유정'. 중동 최초의 석유 생산 시설이다 | 카룬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조성된 바르드 네샨데 사원의 석주 |
지명의 유래가 된 옛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 (사르마스제드)
사르메스제드 언덕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시내의 사파비 시절 모스크
1. 개요
페르시아어: مسجد سلیمان영어: Masjed Soleyman / Masjed Soleiman
이란 서남부 후제스탄 주의 도시. 아바즈에서 동북쪽으로 70km, 슈슈타르에서 동쪽으로 30km, 이제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 약 10만명으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각각 40% 정도 분포하는 후제스탄에서 이제와 함께 루르인 (바크티야르 부족)이 주로 거주하는 두 도시 중 하나이다. 본래 바크티야르 부족의 월동지에 속한 마을에 불과했으나 1908년 5월 16일 이란 최초의 유전이 발견되며 도시 역사는 물론, 향후 중동사의 판도가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지금도 시가지 동남부에는 기념비적인 '1호 유정'이 보존되어 있다. 이란의 유일한 석유 산지로 번영하던 도시는 1928년 다른 유전이 발견되고, 1999년 석유 매장량이 바닥을 드러내며 점차 쇠락하였다. 따라서 이란 내에서는 한물 간 도시로 여겨진다.
다만 자원이 바닥난 후에도 동북쪽 카룬 강의 수력 발전소로 인한 전기 생산과 정유 산업 덕에 도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협곡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시가지 북부의 언덕에는 지명의 유래가 된 사르마스제드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이 남아있고, 1호 유정 근처에는 사파비 왕조 시절에 세워진 쉬아 성소인 자메 모스크가 있다. 또한 시내에는 잉글랜드-페르시안 석유 회사 시절의 사옥들도 남아있다. 도시의 북쪽 외곽에는 샤히드 아시야이 마스지드 솔레이만 공항이, 서북쪽 외곽에는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마스제드 솔레이만 캠퍼스가 있다. 후제스탄 지역답게 여름에는 45도를 넘기고 겨울에도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 더운 날씨를 지녔다. 이란의 1부 리그 축구팀 나프트 마스제드 솔레이만 FC의 연고지이다.
2. 역사
사르마스제드의 위성 사진
고대의 지명은 파르수마쉬였고, 거대한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있었다. 현재의 지명은 이슬람 정복 시에 무슬림 병사들이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파괴하려 들자 현지인들이 사원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슬람에서도 존경받는 솔레이만 ( 솔로몬)이 지은 건물이라 꾸며내었고, 이로써 파괴를 면하고 모스크로 바뀌는 것에 그쳤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16세기 사파비 왕조 시기에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의 자녀들이 매장된 영묘가 조성되었고, 근대 시기 일대는 킬라레스탄이라 불렸다. 한편 일대에 자리잡은 사다트 키리는 일대의 타르 (천연 석유)를 가공하여 선박 제조 혹은 전쟁 무기용으로 팔았는데, 석유 존재의 가능성을 인식한 영국의 기업가 윌리엄 녹스 다아시는 1906년 사다트 키리와 협정을 맺고 유전 개발에 나섰다.
이로써 성립된 앵글로-페르시안 석유 회사는 마스제드 솔레이만을 약자인 MIS로 일컫었고, 바크티야르 부족장 하지 알리 콜리 칸과 함께 일대의 토지를 장악하고는 실업자가 된 농민들에게 1-2 리얄의 낮은 일당만을 주며 석유 생산에 동원하였다. 석유 산업과 함께 일대는 본격적으로 도시화되었고, 1924년 후제스탄 평정과 함께 도시를 방문한 팔레비 1세는 마스제드 솔레이만과 사르마스제드가 혼용되던 지명을 전자로 통일하게 하였다. 이는 2년 후 이란 의회에서 의결되었다. 한편 반세기간 일대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영국인들은 1950년 모사데크 총리의 석유 산업 국유화와 함께 추방되었다. 1955년에는 팔레비 2세가 방문하였고, 1959년 그간 슈슈타르 군에 속하던 마스제드 솔레이만은 자체적인 도시로 승격되었다.
2.1. 근대적 산업 도시
카룬 강에 세워진 마스제드 솔레이만 댐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회사 시절의 건물 (현 석유 박물관)
20세기 초엽 중동 석유 산업의 중심지로써 마스제드 솔레이만은 이란의 근대화에 있어 두드러진 도시 중 하나였다. 먼저 1907년 시찰차 방문한 영국 대표단의 비행기가 착륙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이란 최초의 비행장이 세워졌다. 1918년에는 인근 카룬 강을 막아 이란의 첫 수력발전소가 세워졌고, 이로써 중동 최초의 전력 발전소 역시 들어섰다. 이란 최초의 도시간 철도 역시 슈슈타르-마스제드 솔레이만 간의 화물 노선이었다. 다만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 도중 파괴되었다. 비행장을 계승한 공항 역시 전쟁 도중 파괴되었다가 창립 100주년인 2007년 운영을 재개하였다.
연고 축구팀인 나프트 마스제드 솔레이만 FC의 홈구장 역시 영국인들이 만든 중동 최초의 축구장이었다. 그외에 이란 최초의 서구식 병원, 정유 & 우유공장, 철교, 스포츠 & 사교클럽, 골프 클럽, 근대식 수영장, 케이블카 등이 산업 도시로 성장하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 도입되었다. 1912년 4만 3천 톤에 불과하던 석유 생산량은 1925년 400만 톤으로 급증하였다. 하지만 20년간 이란의 석유 생산을 독점하던 도시는 1928년 하프트골 유전의 발견으로 중요성이 감소하였고, 1935년 12만 7천 배럴을 끝으로 점차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성기의 일일 생산량에 그쳤다.
3. 갤러리
사르마스제드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사르마스제드 (조로아스터교 사원)
마스제드 자메 (금요 사원)
도심부 전경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회사 사택
마스제드 솔레이만 과거 사진 (영국인 거주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석유 저장 시설
최근 들어 현대화된 정유 공단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건물
마스제드 솔레이만 댐
1호 유정
바르드 네샨데 사원 유적
- [마스제드 솔레이만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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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마스제드
바르드 네샨데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캠퍼스
일대에서 출토된 고대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