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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행의 연속'이었던 황태자비의 삶
1993년 6월 9일, 전통의상인 쥬니히토에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마사코 황태자비. |
1993년 6월 9일, 결혼식 후 펼쳐진 카 퍼레이드에서 몰려 든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
나루히토 황태자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은 당시 일본 최대의 이슈였다.[1] 이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은 형의 결혼을 기다리다 3년 먼저 결혼, 딸까지 하나 낳은 상황이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고, 마사코 황태자비가 엘리트 외교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마사코 황태자비는 결혼 직후부터 2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 황실의 보수성과 아들 출산이 바로 그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다른 서양의 왕족들처럼 황태자비로서 해외 순방 등을 통하여 일본의 외교에 보탬에 되고 싶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일본의 황족들이 나라의 외교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황태자 부부는 이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황실의 해외 순방은 서양 왕실의 그것보다 형식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거기에 일본 황실은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남존여비가 심해서, 여성 황족들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or 자제)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서양에서 오랜 시간을 성장하며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는, 넘을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였다. 외교관 경력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 지난 수십년간 마사코 황태자비가 해외순방에 참여한 것은 5차례밖에 안 된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했던 단순한 행동,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2]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다. 그녀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큰데, 그것을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3]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실과 계속 충돌, 갈등하게 된다.
시누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대학을 졸업한 후 조류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아랫동서 키코 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황실로 시집왔다. 직업을 가진 여성이 황실로 시집온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최초였다. 게다가 키코 비는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3년이나 먼저 시집와서 황실에 적응해 있었으며, 황실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창시절부터 황실 가족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그 틈에 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를 더 괴롭혔던 것은 바로 아들 출산의 문제였다.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래 일본 황실에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딸들만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다.[4] 따라서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을 후계자, 즉 황태자의 아들을 낳는 것은 황태자비의 가장 큰 의무였다. 오랫동안 일본 황실에서는 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일이 흔했지만, 옛날에는 후궁 소생의 아들로 얼마든지 다음 천황 자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후궁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였고[5], 현대의 황실에서 후궁 제도란 가당치 않았다. 때문에 마사코 황태자비는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황태자 부부에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결혼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는 33세[6]이고 오와다 마사코는 29세[7]였는데, 지금에서야 둘 다 적당한 나이에 결혼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 결혼연령보다 꽤나 높은 나이였다. 그래서 황실에서는 결혼 전부터 이 점을 염려하여,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이라면 모두 받는 교육[8]의 기간과 과목 수도 미치코 황후 때보다 단축했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 사람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훨씬 좋으니, 임신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 의사들의 전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황실과 궁내청에서는 수천년 된 관습에 따라 29세의 오와다 마사코가 임신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간주하였다고 한다.[9]
마사코 황태자비는 주변의 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임신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궁내청에서는 그녀의 해외 순방을 허용하지 않는 등, 생활을 엄격하게 제약했다.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기 전에는 당시 궁내청 장관들과 동궁대부[10]가 허가도 없이 마사코 황태자비를 방문해서 임신을 요구하기도 했고, "임신을 못하면 황태자/황태자비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외국 귀빈이 일본 황족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눌 때는, 마사코 황태자비를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대상포진과 우울증 등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1998년 무렵의 마사코 황태자비. |
여러 번 유산했으며, 2000년에는 유산 후유증 때문에 시할머니인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다.[11] 오랜 불임 끝에 2001년에 임신했다. 전 일본이 마사코 황태자비의 임신에 주목하고 아들의 탄생을 바랐지만 딸이었다. 2001년 12월 1일에 태어난 이 딸이 바로 아이코 공주이다.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에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임신을 강요당했으나, 아이코 공주를 낳을 때도 노산이었던 데다가[12] 잦은 유산과 주변의 강요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힘드니 임신이 될 리가 없다. 아이코 공주를 낳은 것만도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이후에는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였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약받고 아들 출산을 강요당하면서 각종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우울증을 이유로 모든 공식 활동을 중지하고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다.[13]
나루히토 황태자는 이러한 압력에 대하여 일본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황실 내에 마사코 황태자비의 인격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라는 상상을 초월한 발언을 하여, 아내를 부당하게 음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사하고 아내를 지켜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발언의 직설성과 "황태자가 보호하는 황태자비를 부정할 수 있는 세력이란 천황 내외뿐이지 않느냐??"는 점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이 발언은 결혼 10년이 지나면서 일본 황실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불편한 관계에 다들 지쳐 있을 때쯤이라, 나루히토 황태자의 충격적인 발언을 계기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호감도가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의 비난과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질책까지 들어,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사실 일본 황실이 천황을 위해 존재하는데, 훗날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이 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땐 누워서 침뱉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루히토 황태자가 그 사실을 정말 생각하지 않고 저런 말을 했을까? 나루히토 황태자도
심지어 아이코 공주를 임신하고 있을 때만 해도 "뱃속의 아기가 아들이면 안 된다!!"고 마사코 황태자비의 유산을 기원하는 스레가 2ch에 수십 개가 세워졌을 정도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괴롭힘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이코 공주를 출산했을 때도 일본에서는 "축하하지만 빨리 둘째를, 기왕이면 남자아이를 임신해 주었으면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니 나루히토 황태자는 "설령 내가 역풍을 맞는 한이 있어도, 아내와 딸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이다.
얼마 후 마사코 황태자비는 대상포진과 적응장애로 요양생활에 들어가지만, 일본 여론은 두문불출하며 공무에 참석하지 않는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2. 여제 계승 논란
남편 나루히토 황태자와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와 함께 찍은 사진. 2002년 12월, 아이코 공주의 첫돌 무렵. |
황태자 부부의 유일한 즐거움은 아이코 공주를 기르는 것이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칩거 중에도 정성을 다해 아이코 공주를 양육하였으며, 아이코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서 2006년 4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한다.
이런 도중에 일본 정부는 남자 황족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실전범을 개정하여 여자 황족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려 하였고, 그 당시 일본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에 대하여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가 제2계승자가 되고 장래 여성 천황이 되므로, 여론의 관심은 아이코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그런데 황실전범 개정을 논의하기 1주일 전, 시동생 부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함으로써 황실전범 개정은 흐지부지되고, 2006년 9월 6일,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바로 히사히토 친왕이다.
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마사코 황태자비(왼쪽)와, 2006년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을 낳은 키코 비(오른쪽). 병원[14]도 다르고 5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도 있건만, 옷과 포대기는 물론, 목걸이와 귀걸이마저 통일했다. |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후, 황태자 일가는 쩌리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황족들과 국민들의 관심은 히사히토 친왕과 차남 일가에게 집중되었고, 황실전범 개정 움직임은 쏙 들어갔다. 이후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은 천황 부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실에서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키히토 덴노&후미히토 친왕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3. 아이코 공주의 이지메 사건과 극복
그러나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세간에서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 출산의 압력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확실히 언론과 황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조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공식 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찍힌 사진 같은 것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얼굴이 좋아진 게, 차라리 본인은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본인에게 지워진 부담과 긴장을 덜어낼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모양.그러나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2~3학년 시절, 학교에서 왕따[15]를 당하여 등교 거부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학교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초등과 고학년에 들어서부터, 아이코 공주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다. #
아랫동서 키코 비와 함께 찍은 사진. |
동물원에서 시동생과 아랫동서의 아들인 히사히토 친왕과 함께 염소를 관람하는 모습. |
히사히토의 탄생으로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둔 여성 천황 허용 논의는 일단 잠잠해졌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기나긴 아들 타령에서 해방되었다.
4. 2013년까지 행적
개인적으로는 불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튼 요양 생활이 10년 이상 지속될 정도로 오래 이어지면서 국내 여론도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좋게 봐서 폐인, 나쁘게 보면 남편에게 실드받는 한없는 게으름뱅이'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은 국비로 생활을 지원받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런 대외활동도 없는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국민 여론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워낙 동정론이 많이 불고 있어, 동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곳도 상당히 많아졌다.나루히토 황태자에 대해서는 별 비난 여론이 없는데, 그는 계속 아내를 지켜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서술된 인터뷰 사건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애초에 일본 황실은 인터뷰에서 절대 저런 직설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저 인터뷰는 상당한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궁내청이 해명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후 나루히토 황태자는 지속적으로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의 불화설에 시달리게 된다. 차남 부부에게 갑자기 셋째를 낳으라고 한 것도, 이 일이 있었기 때문이란 소문이 있다. 심지어는 "아키히토 덴노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폐위하고 차남 후미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았을 정도.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제위를 지키시려면 이혼 하고 젊은 여자를 새 황태자비로 맞아 아들을 낳으셔야 합니다!!"라며 나루히토 황태자를 압박하고 있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요양 중이던 마사코 황태자비는 직접 나서서 "남편과 함께 피난민들을 방문하여 위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랜만에 공무에 등장하였는데, "아프다더니 얼굴이 좋아보인다", "꾀병 아니냐"는 비난을 들었다.
2013년에는 결혼 20주년을 맞은 마사코 황태자비의 요양이 10년째 이어지자, "치료가 해를 넘겨 계속되면 적응장애가 아니라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 # 라며 황태자 부부의 분가 생활이나 여름 해외요양 등 보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
2013년 3월에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서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사실상 나루히토 황태자의 퇴위나 강제이혼만이 남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지만, 퇴위는 나루히토 황태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건데 그럴 가능성이 없거니와,[16] 강제이혼을 가만히 당할 만큼 나루히토 황태자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17]
2013년, 만 50세 생일 기자회견에 세간의 인식과 남편과 딸의 입지 문제를 인식한 탓인지 "공식활동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적응장애에 대해서도 "완치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5. 2014년~2016년 7월
2014년 4월,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입학식에서. |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 참석 횟수가 많이 증가한 배경 중 하나로, 아이코 공주의 독보적인 학업성취도를 들 수 있다고 한다. 연일 기사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성적에 대해 칭찬 일색이고, "황족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는 등 딸의 심상치 않은 성적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으로 보인다. 아이코 공주는 향후 도쿄대학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가쿠슈인 초등과에서도 최상위이라는데, 여기에는 황태자 부부의 영재교육이 뒤따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저널리스트는 아직 "황태자 부부가 아이코 공주의 여제 즉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코 공주가 도쿄대학에 합격할 경우 "특혜 입학 내지는 일반 수험생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시비에 휩싸일 수도 있기에 아예 어머니처럼 해외 유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옥스퍼드 대학교나 하버드 대학교를 노려서 직접 영국 A-level/ 미국 SAT에 응시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런 단계를 거쳐서 정말로 합격할 경우에는,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 지위를 승계하게 된 이후 확실히 황실 내에서 반격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태자비보다 신분이 낮은 아랫동서 키코 비의 공무량이 상대적으로 많아 비교를 당하고, 요양이 약 10년을 넘어갔으나, 2015년 5월부터 일본 내 공무를 계속 늘렸다. 10월 20일에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만 81세 생일 기념 음악회에도 참석했다. 거기에 2년 만에 외국 공무를 나가, 7월에는 통가 국왕의 대관식에 황태자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이를 위해 아이코 공주의 수업 참관을 하지 않았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이코 공주의 따돌림 문제 때 직접 수업 참관을 했을 정도로 딸에게 애정이 각별한 것을 보면, 공식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좋지 않은 여론을 의식했거나, 정말로 황실 적응을 극복했을 수 있다.
2015년에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의 방일 환영 만찬회에도 참석했는데,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영어 연설을 통역이나 일본어 번역문 없이 자유자재로 듣는 모습이 보도되어, 모처럼 어려서부터 현지에서 익힌 영어실력을 발휘하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에 첫 공식 만찬회 데뷔로 화제가 되는 등 인기가 높던[18] 조카 카코 공주는, 필리핀 대통령의 영어 연설 내내 일본어 번역문을 들여다보고 있어, 큰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와 크게 대조되었다.[19] 이후 궁내청에서는 "카코 공주가 연설 후 티타임 때는 영어로 능숙하게 대화했다"고 해명했다.
2016년 3월 말, 황족들과 함께 음악회에 참석했다. 작년부터 눈에 띌 만큼 대외활동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여론은 긍정적이진 않았지만,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은 어딜 가나 찬양 일색이었다. 그러나 아이코 공주의 수업 참관에 황태자 부부가 참가했을 때, 일부에서는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후미히토 일가의 자녀들처럼 열심히 공무하는 부모를 보고 자라지 못했다"[20]는 식의 비난이었다.
2016년에 들어서도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우수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을 장래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하는데, 문제는 키코 비가 직장생활 경험도 없고 고전적인 비(妃)라는 이미지가 강한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일한 희대의 수재이자 커리어우먼 출신이라는 것. 게다가 황태자 부부도 아이코 공주를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한다는 소문 및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을 찬양하는 주간지의 기사를 보고 들으며, 키코 비는 애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에 대한 키코 비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지만, 일본 황족들 중 히사히토 친왕의 또래는 5살 위의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뿐이라, 세간에서도 일본 황족들 사이에서도 비교를 많이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서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에게 게임을 금지시키며, 텔레비전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만 보게 하고, 그 외에는 다 금지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황실에 대해 다루는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키코 비가 어린 아들을 너무 억압하는 듯하다고 한다. "본인이 원하는 학과가 도쿄대학에 있다면 좋겠지만, 미래의 천황이라는 이유로 너무 억압하는 것이 아닐까?? 진로에 대해서는 히사히토 친왕이 좀 더 성장한 후에 논의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아이코 공주의 여름방학이기 때문인지 2016년 7~8월에 들어서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이코 공주와 셋이서 자주 공무에 나온다. 중3이 된 아이코 공주는 밝은 얼굴에 살도 빠지고 얼굴도 갸름해지는 등, 외모도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최근 들어 아이코 공주는 키가 크고 성숙해진 모습에다 점점 마사코 황태자비를 닮아가고 있다. 다만 일본 여론은 이 모녀의 성장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고 공격하고 있으며, 아이코 공주의 카게무샤 설까지 돌고 있다.
6. 2016년 8월~ 2017년
2016년 8월 8일, 시아버지 아키히토 덴노가 생전퇴위 의사를 표명하였다. 남편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키히토 덴노의 뒤를 이어 새 천황이 되면, 마사코 황태자비도 황태자비에서 황후가 된다.그 이후 8월부터 현재(10월)까지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가 논의되는 와중에 10월 6일, 마사코 황태자비는 바쁜 공무 중에도 아이코 공주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결국 모녀는 10월 20일 미치코 황후의 생일파티에 가지 않았고, 여전히 아이코 공주의 정확한 병명을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9월 26일부터 결석하던 아이코 공주는 6주 만인 11월 8일 오후부터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위장 장애와 어지럼증을 겪었다고 한다. 아마 학업 스트레스와 주변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추정된다.
다만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라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는 병으로, 언론에 알려도 문제없는 병이다. 그런데도 언론이나 가쿠슈인에 알리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다. 이러다 보니, 최근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한 아이코 공주에 대한 이미지를 더 나쁘게 하기 위한 궁내청의 공작이라는 소문도 있다. 위에도 적혀 있듯 일본 황실을 담당하는 부서인 궁내청은 유독 황태자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유명한데다, 어린 시절 아이코 공주가 간염에 걸렸을 때도 궁내청 병원이 아닌 도쿄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단 사실 하나로도 궁내청이 상당한 수준의 깽판을 놓았던 전적도 있는지라[21] 궁내청을 향한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한편 고등학교[22] 진학이 얼마 남지 않은 11월인데다가 황실 문제 이외에도 여러가지로 큰 사건들이 제법 되는지라, 일본 여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이렇게 궁내청에 대한 논란이 있는 와중에, 궁내청은 "조금씩 회복되어 '극심하게 야위었던 모습'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 당분간 상태를 지켜 보면서 등교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이코 공주님은 차를 탄 채로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교내까지 들어가고 있습니다. 결석 전에는 학교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서 교문을 지났었으니까, 역시 회복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곧 에스컬레이터식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아이코 공주에 대해 "아이코 공주님은 조치대학(上智大学)에 진학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아이코 공주의 개인 과외 선생님이 조치대학 출신의 여성인데, 그 선생님으로부터 조치대학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고 관심을 가진다는 듯하다.
사실 2013년에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이 공개된 이후 아이코 공주가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갈 거란 소문은 있었지만, 아이코 공주는 동궁의 내친왕[23]이기 때문에, 사촌언니들인 마코 공주나 카코 공주처럼 같은 내친왕이라도 방계 출신 황족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대학을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24]
그러나 일본 여론은 "지금 학교나 제대로 다녀라"라는 평이 대다수이고, 마사코 황태자비도 가쿠슈인이 딸 아이코 공주를 지나치게 특별 취급하고 있는 것이나[25]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응이 늦다는 점에 불만을 내비친 적도 있고, 이번 장기 결석 중에 궁내청은 아이코 공주의 증상에 대해 가쿠슈인에 상세하게 전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갈등의 골이 깊은 듯하다.
한편 아이코 공주는 15세 생일(2016.12.1)을 기념으로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와 사진을 찍었는데, 정말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아이코 공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일본 여론은 비난이 없진 않지만, 아이코 공주의 15세 생일 사진이 공개된 이후 아이코 공주를 동정하는 분위기다.
2017년 10월 중순을 기준으로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 횟수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뉴스 기사에 보도되는 일도 많아졌다.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얼굴이긴 하나, 표정이 많이 밝아졌고 자연스러운 편. 적어도 아랫동서인 키코 비처럼 억지스럽고 이상하진 않다. 또한 나루히토 황태자와의 분위기도 좋아보이며, 서로 쳐다보며 웃는 사진도 많다. 기껏해야 키코 비만 남편을 바라보는 사진이 많은 후미히토 부부와는 굉장히 상반된다.
7. 2018년
2017년 12월 1일[26] 황실 회의에서 차기 후계구도를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로 정한 이후,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보도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발표 이후부터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는데, 남편 나루히토 황태자의 계승이 확실시되자 아내인 마사코 황태자비도 차기 황후로서 일본 언론의 보도 비중이 엄청 높아졌다.최근 공무량도 많아지고 몸 상태로 인해 못하던 공무도 하는 등 마사코 황태자비도 상당히 분발하고 있어서, 적어도 일본 황실 내의 위치와 상황적으로는 호재라고 볼 만 하다.
심적 부담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더 이상 임신을 강요당할 일도 없고, 남편과의 금슬도 좋고, 자녀교육이 걱정이긴 하겠지만 성적이 우수하고 조금만 더 자라면 되는 무남독녀뿐이라, 3남매를 두고 있는 키코 비보다 부담이 거의 없다. 더구나 자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던 남편의 승계도 무사히 못을 박았다. 툭하면 자녀 문제로 기사에 나오는 키코 비보다는 상황이 좋다.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의 관계도 호전되었다. 미치코 황후는 주간지에서 "미치코 황후가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키코 비가 더 황후감으로 걸맞다'고 확언했다더라"라는 기사를 보고 교통통제를 감안하고 심야에 동궁으로 가서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를 만났으며, 공무에서는 미치코 황후와 마사코 황태자비가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 키코 비 또는 아키시노 일가와 비교하는 기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보다 미치코 황후, 키코 비와의 관계에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보이고 있다. 5월 13일, 미치코 황후는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메이지 덴노 이후로 역대 황후에게 내려오던 양잠 사업[27]를 전수했으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2004년 인격부정발언 이후로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아키시노 일가와의 정양도 있었다는데, 이는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급속도로 입지가 추락하고 있는 키코 비의 의사였다는 모양. 키코 비는 마사코 황태자비와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미치코 황후의 신뢰를 되찾고 히사히토의 계승에 대한 협력을 얻으려는 것 같다고 한다. 동시에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한 협조도 얻고. 그만큼 마사코 황태자비의 황실 내 입지가 키코 비보다 더 굳건해졌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28]
그리고 일본 황실에서는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 모녀를 심리적으로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딸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기로 유명한데[29], 딸의 이지메 피해 사건으로 이러한 애착이 더욱 심해졌다. 딸의 학교생활과 건강 상태에 따라 마사코 황태자비의 상태도 상당한 수준으로 널을 뛰었고, 마사코 황태자비는 딸의 학교 운동회나 축제 때면 몸이 안 좋아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황실로 들어와 모든 것을 잃은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슬하의 유일한 딸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있다.[30]
2018년 여름방학에 아이코 공주가 3주간 영국의 이튼 스쿨로 단기 유학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궁내청에서는 슬슬 모녀를 심적으로 독립시키려 하고 있다. 기사를 보면, 은근슬쩍 이 유학을 통해 아이코 공주가 한 명의 황족 여인으로 성장하는 기초가 되길 바라는 게 느껴진다. 그 기간 중 공무에 나온 마사코 황태자비도 그렇게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도 2019년 5월 이후 황후가 되면 그전처럼 딸에게 붙어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를 어느 정도 감내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2018년 8월 16일부터 시즈오카현 시모다시에 위치한 황실 별장에서, 얼마 전 영국에서 돌아온 아이코 공주와 함께 휴양했다. 그동안 많은 공무를 해서인지 다소 피로한 기색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많이 혹사한 상태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황태자비로서는 마지막 휴양을 하였다.
11월 9일에는 천황 내외가 주최하는 가을 원유회에 15년 만에 끝까지 참석했다. 그동안 마사코 황태자비는 참석을 아예 못하거나 하더라도 도중에 조퇴했지만, 이번에는 끝날 때까지 참석했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안심, 기대, 우려, 부정 등 여러 내용이 보인다. 이날 나루히토는 평소보다 매우 즐거워 보였던 반면, 후미히토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댓글 중 '아키시노노미야 전하의 불만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에 더 관심이 간다.'는 말이 있다. 그 옆의 키코 비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원유회 이후 황태자가 참석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 황태자비도 같이 참석하면서, 일본에서는 여전히 걱정반 기대반인 상태로 지켜보고 있다.
2018년 12월 9일 55세 생일을 맞이하여 고쿄에 방문했을 때[31]는 당초 예정보다 10분 늦은 40분간 천황 내외와 대화를 하고 나온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32]
인터뷰에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성명에서 “앞으로 남은 기간을 생각하면 (황후가 된 이후)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서도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건강과 관련해선 “체력 회복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 예전보다 많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고쿄 방문을 마친 다음 오후에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주최하는 가쿠슈인 OB관현악단 정기 연주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연주회가 파한 다음 아카사카 어소에서 천황 내외를 초대해서 생일 기념 만찬도 하는 등 생일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55세 생일을 맞이하여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건강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회복에 전념하면서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황태자 내외를 전담하는 의료진들 역시도 "황태자비의 건강 상태가 회복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무를 하면 건강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8. 2019년: 마침내 황후가 되다
1월 8일부터 미열 등 감기 증상을 보여 11일과 16일에 열리는 새해 일본 황실 정례 행사에 결석했다.2월 8일 남편 나루히토와 함께 제 64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전국콩쿠르 시상식에 참석하여 입상한 청소년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독서콩쿠르 참석은 2002년 이후 17년만이다.
2019년 2월 23일 나루히토 황태자의 59세 생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나루히토는 " 마사코 황태자비의 건강이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태"라고 밝히면서 아내가 5월 1일 황후가 되는 것에 상당한 수준의 심적 부담을 가지고 억지로 공무를 하는 모양인지 "서두르지 않고 본인의 건강 상태에 맞게 천천히 회복하길 바라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의 이해를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2월 25일 및 26일에 이루어진 천황 즉위 30주년 기념 궁중다도회에 불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에서는 "여전히 마사코 황태자비의 건강 상태가 안 좋은 게 아니냐"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적응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천천히 업무를 보면서 최종적으로 완쾌에 돌입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에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특히 5월 1일부터는 황후라는 중책을 맡게 되고, 그 이후에는 예전처럼 아프다고 제대로 쉬기는 어렵고, 갑자기 엄청난 공무들이 뒤따라온다. 때문에 "그에 따르는 여러가지 심적의 부담이 황후가 될 날이 다가옴에 따라 강해져서, 결국 최근 호조였던 회복을 방해하는 게 아니냐"는 의료인의 지적도 있었을 정도.
2019년 3월 17일 보도에 의하면, 천황 내외의 마지막 궁중다도회에 마사코 황태자비가 불참하게 된 것은 "적응장애의 여파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먹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라고 궁내청 직원이 밝혔다. 궁내청 내부에서는 "그래도 천황의 마지막 다도회인데 힘들어도 참석만은 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보도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체념에 가까운 태도라서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앞으로 황후가 되는 황태자비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3월 13일 열린 제 15회 건강한 소사이어티 시상식에 부부 동반 참석을 한 것에 궁내청 관계자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소사이어티 시상식은 650명 정도가 참석한데다 관계자와의 저녁식사가 있어서, 앞서 궁중다도회 때와 마찬가지로 마사코 황태자비의 참석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시상식 전날 참석 의사를 알렸는데, 궁내청 관계자는 이를 두고 "'곧 황후가 되니,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석을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사이어티 시상식은 공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어서 마사코 황태자비가 참석할 수 있었지만, 일단은 식사 자리가 포함된 공무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적응장애의 증상이 개선되고 있으며, 불특정 다수가 있는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상태가 호전 일변도라기보다는 상태가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이러한 추측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한편 동궁어소 관계자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2월 24일 있었던 재위 30년 기념식을 계기로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차기 황후로서의 자각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나루히토의 즉위 후에 황궁 내 거처에 대한 리모델링 때문에 한동안은 동궁과 황궁을 오가면서 공무를 봐야 하는데, 이때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를 한동안 동궁어소에서만 진행하겠다고 궁내청은 검토 중에 있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요양과 공무 활동을 병행하는데 있어 컨디션 부담을 최대한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를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궁내청이 이제서야 황태자비를 배려하는 것은 "결국 자기네들에 대한 숙청을 막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행위"라고 보는 시각이 상당히 강하다.
4월 2일 천황 내외의 결혼 60주년 겸 천황의 즉위 30주년 기념 음악회에 남편과 같이 참석했다. 이후 각종 현 천황 내외 퇴위 전 관련 행사들에 남편과 함께 계속 참여 중이라서, 황후 즉위를 앞두고 일부 주간지에서 황태자비의 건강 이상설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견제하는 듯하다.
4월 25일 황궁에서 즉위식 관련 의식과 절차 리허설을 진행했다.
4월 30일 미치코 황후가 맡고 있던 일본 적십자사 명예총재를 퇴임함에 따라, 이후 5월 1일자로 황후가 되는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인수인계될 예정. 적십자사 대회가 5월 22일에 예정되어 있어서 갓 황후가 된 마사코가 대회에 참여할지에 대한 여부가 관심을 받고 있으나, 사실상 궁내청에서는 참석이 확정되어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마사코 황후는 황태자비가 되기 전에 기대했으나 출산 등을 이유로 좌절되었던, 해외순방이나 국제교류 등의 활동에도 뜻을 두고 있다고 한다.
4월 30일 오전 10시, 퇴위 전 제례행사인 퇴위 당일 현소 대전의 의식(退位礼当日賢所大前の儀)이 치러졌다. 천황, 황태자, 성인 황족들이 황궁 내 궁중삼전(宮中三殿)[33]에 인사하는 의식으로, 천황과 황태자는 삼전 내부에 들어가서 의식을 치르지만 황족들은 간단하게 인사만 한다. 이 행사에 마사코 황태자비는 불참[34]하였으나, 오후 5시에 열릴 퇴위예정전의 의식(退位礼正殿の儀)에는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5월 1일 오전 11시에 있을 즉위 후 조견의 의식(即位後朝見の儀)에는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즉위를 앞두고 일본인들 사이에는 엘리트 외교관 출신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여러 외국어에 뛰어난[35] 마사코 황태자비의 국제친선 부분에서의 활약에 관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즉위 당일인 5월 1일 구 황족/미성년 황족, 구 궁내청 직원 등을 만나는 자리에 친정아버지 히사시, 친정어머니 유미코, 여동생 레이코[36]와 세츠코가 참석했다. 서로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친정 가족들은 황후의 건강한 모습에 상당히 안도하는 모습이었다고.
5월 7일 오후 거처에서 고쿄로 이동했는데, 그 이유는 5월 8일에 예정된 궁중삼전에서 열리는 천황 승계의식의 향후 일정을 정식으로 보고하는 행사[37]를 위한 최종 리허설 때문이라고 한다.
5월 8일 궁중삼전에서 승계의식을 치렀다. #
5월 9일 주일중국대사 부부와의 이임 인사 자리를 가졌다. 이후 15일자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원래는 나루히토 덴노만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하루 앞선 8일 제례행사를 마친 후에도 황후의 컨디션에 문제가 없자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38]
5월 11일 고쿄 내 후키아게고쇼에 있는 상황, 상황후 부부와 저녁 식사를 위하여 남편 그리고 딸 아이코 공주와 같이 방문하였다.
즉위 이후 마사코 황후의 자연스러운 미소에 대한 호평이 일본 언론 및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현재 동궁대부에서 시종장이 된 사람이 곧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기에 새로이 시종장 후보들을 물색하고 있다. 후임으로는 마사코 황후가 외교관 시절 직속 상관이던 인물이 유력하게 거론되는 중[39]인데 만일 이게 실현될 경우 나루히토 덴노가 천황이 되면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 중 하나인 해외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물론, 마사코 황후 입장에서도 과거 상관이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을 돌봐주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어 더욱 더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의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궁내청은 "5월 1일자로 마사코 황후가 미치코 상황후로부터 일본 적십자사 명예총재직을 이어받았으며, 5월 22일자로 예정된 적십자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참고로 마사코 황후가 명예총재직을 받기 전에 있었던 명예부총재직은, 2019년 5월 1일자로 황태자비에 준하는 직위를 가진 키코 비가 받을 것으로 보인다.
5월 27일 일본을 국빈으로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멜라니아 트럼프 미국 영부인 내외와의 회담이 즉위 후의 첫 국제 데뷔무대가 될 예정이다.
황후가 되어 첫 지방 공무로 6월 아이치현에서의 식수 행사에 참여하는 게 확정되었다. 궁내청은 마사코 황후의 건강을 고려하여 일정을 단축하는 등의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 1박 2일 일정을 소화하는 것으로 확정지었다.
[1]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당시 꽤나 큰 관심사를 불러 일으켰다.
[2]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 오와다 마사코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불과 몇 초 길게 말했다 하여 비난이 쏟아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다니!!" 라는 등등. 옛날 사극에서나 여성이 남편보다 많이 말했다고 부덕하다는 꾸지람을 듣지, 그런 고루한 시각을 1990년대까지 유지했단 거다.
[3]
그래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공식 석상에서 언제나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다. 사진을 확인해보라.
[4]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age(1969-04-18)]세), 1981년 12월 20일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age(1981-12-20)]세), 1983년 10월 25일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age(1983-10-25)]세), 1986년 3월 8일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age(1986-03-0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age(1988-07-22)]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age(1990-09-15)]세), 1991년 10월 23일
코무로 마코([age(1991-10-23)]세), 1994년 12월 29일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age(1994-12-29)]세), 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age(2001-12-01)]세).
[5]
후궁을 둔 마지막 천황은
메이지 덴노였고,
다이쇼 덴노부터는 후궁을 두지 않았다. 메이지 덴노의 아내
쇼켄 황후(하루코)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기 때문이다.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아 한때 후궁 제도의 부활이 심각하게 거론되었으나, 다섯째(
아키히토)와 여섯째(
마사히토)가 아들로 태어나 후궁 제도 부활은 무산되었다. 아키히토 덴노의 아내이자
마사코 황태자비의 시어머니인 미치코 황후는, 시집오자마자
임신하여 나루히토 황태자를 낳았다.
[6]
1960년 2월 23일생
[7]
1963년 12월 9일생
[8]
일종의
신부수업.
[9]
그러나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31살이던 1965년에 둘째
후미히토 친왕을, 35살이던 1969년에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출산했다. 또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는 33살이던 1986년에 첫째
쓰구코 공주를 낳았고, 2년
터울로 총 3명의 딸을 낳았다.
[10]
황태자의 시종들 중에서 최고위
[11]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의 고부갈등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2]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의 나이는 만 37세로, 자연분만 산모 중에서는 매우 많은 나이에 속한다. 30대 중반부터는 산모의 체력 문제로 자연분만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13]
궁내청과 시부모
아키히토&
미치코 황후 내외에 의한 '감금' 이라는 설도 있었다.
[14]
아이코 공주는
궁내청 병원,
히사히토 친왕은 아이쿠(愛育) 병원에서 태어났다.
[15]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왕따 사건 뒤에, 숙모인 키코 비가 연루되어 있다고도 한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들과 키코 비가 친한 사이라는 소문.
[16]
후사가 없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적장자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고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동생에게 계승하거나 조카나 적당한 친척을 양자로 맞아들여 해결한다.
[17]
만일 가만히 당할 사람이었으면 1993년에 기어이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7년 동안 계속해서 청혼했다는 점을 본다면, 그 역시 여간내기는 전혀 아니다.
[18]
2014년 12월 29일부터 성년(만 20세)을 맞아, 본격적으로 공무를 시작했다. 특히 그 무렵 언니
마코 공주가
영국에
유학 중이라
카코 공주가 언니 몫까지 각종 공무를 하며 언론 및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노출되었는데,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다른 황족들보다 인기가 더욱 높았다.
[19]
특히
카코 공주는 2015년 4월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영어 공부를 많이 시키고 영어로 된 수업도 많다. 그런데 영어 연설 내내
일본어 번역문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이후 카코 공주가 영어 공부에 힘쓰고 있다는 기사,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야기 등등이 나오게 된다.
[20]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프다며 요양할 때, 키코 비는 부지런히 각종 공무에 참석했다. 특히 어린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공무에 데리고 다니면서 황실, 궁내청, 국민들로부터 점수를 땄다.
[21]
그런데 정작
아키히토 덴노가 비슷한 시기에 궁내청 병원이 아닌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궁내청에서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선택적 깽판
[22]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23]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남자는 친왕/왕.
[24]
원래 황족들은 대대로
가쿠슈인에서 대학까지 다니는 게 보편적이고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방계 황족들부터는 가쿠슈인 대학을 가지 않는 탈 가쿠슈인 선택이 적지 않다. 다카마도노미야의 맏딸
쓰구코 공주가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진학한 것을 시작으로, 다카마도노미야의 막내딸
아야코 공주는 조사이국제대학을 다녔으며, 아키시노노미야의 바보 자매로 악명 높은
코무로 마코와
카코 공주도
국제기독교대학을 다녔다. 마코와 카코 공주의 남동생인
히사히토 친왕도 가쿠슈인을 다니지 않고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ㆍ초등과ㆍ중등과를 거쳐
츠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25]
게다가 그 특별취급이
히사히토 친왕처럼 떠받들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자가 아닌
공주라는 이유로 억압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26]
아이코 공주의 만 16세 생일이었다.
[27]
누에치기
[28]
당시 기사에서 황실 관계자는 "마사코 황태자비의 협조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했다. 황실 회의로 히사히토의 승계를 못 박기는 했어도, 아키히토의 양위 발표에 대한
일본 총리의 태도나 영향력을 고려하면, 나루히토가 천황 자리에 있는 이상 황위 계승 논란이 언제든지 불지펴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29]
예전에 "황태자 내외를 이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슬슬 흘러나올 때 "마사코 황태자비의 아이코 공주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이혼 자체가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나루히토가 이런 걸로 물러날 사람이었더라면 애초에 청혼을 7년이나 했을리가 없다
[30]
미치코 황후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시어머니
고준 황후로 부터 당해온 모진 시집살이 때문에, 1993년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의 결혼식이 열린 뒤 얼마 이후 실어증을 앓게 되었고, 회복되어서 한 첫마디가 "사야코." 였던 것을 보았을 때,
사야코 공주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31]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생일을 맞이하면 천황 내외를 방문하여 인사하는 게 전통이다.
[32]
그 이유는 보통 황족이 고쿄에 들어가는 동안 그 주변은 경찰이 통제하기에 주민 불편 등을 감안해야 하고, 천황 내외의 스케줄은 분단위로 상당히 바쁜지라 최대한 정해진 시간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걸 어긴 것 자체가 상당한 화제가 되는 것이다. 일단 한 주간지의 취재에 의하면, 지연된 이유에 대해서 황실 관계자는 "황후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어쩔 수 없이 지연된 것"이라고 한다.
[33]
현소, 황령전, 신전으로 이루어진 황실 공식 예식용 공간.
[34]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불참
[35]
결혼기념 만찬회에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초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2018년 나루히토의
프랑스 국빈 방문시 프랑스어로 된 연설문을 직접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연설문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검수하고 나루히토의 프랑스어 발음교정까지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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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언니와 형부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일부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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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에게는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전통 복장을 입게 되었으며, 궁중삼전에 참배한 것은 2002년 황태자비 시절 해외 방문 후 참배 이래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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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덴노 등의 걱정과는 달리, 현재까지 마사코 황후는 정해진 공무에 하나도 빠짐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이러한 많은 공무를 소화하는 와중에도 별 다른 건강상 문제를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서는 갑작스러운 공무의 증가에 대해서 아직 완치도 안 된 상태인 만큼 최대한 부담을 덜 주는 방향으로 일정을 조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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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여관장으로는 보통 황실예법에 해박한 구 황족 혹은 구
화족 출신자들이 선발되지만, 종종 공직자 출신자들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