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李炳南북한의 정치인, 의료인.
2. 생애
1903년 12월 9일,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1917년 직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 1921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1931년에 졸업, 소아과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193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연구를 하였으나 1942년에 제적당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이병남 소아과의원을 차려서 개인 병원을 운영했다. 해방 이후 다시 경성대학 의학부 소아과학교수로 일하게 되었으며 서울시내 의사들 500여명과 함께 <서울시의사회>를 조직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위원장은 백병원으로 유명한 백인제 박사였으며, 학술부장은 같이 월북하게 되는 최응석이었다. 리병남은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1947년, 민주주의 민족전선 확대 중앙위원회 성립에 참여했다가 8월에 체포, 그 결과로 철직되고 다시 개인병원으로 돌아가 남한의학협회 부회장, 남한보건연맹 보건정책위원장 등으로 일했다.
이후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 차 북한으로 갔다가 그대로 잔류했고, 1948년 8월 21일, 김일성도 만났다. 이후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에 수립된 정부의 초대 보건상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 군사위원회 직속 후방구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전시 보건사업을 조직집행하면서 군의 분야를 담당했다.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종전 이후 1955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을 겸하였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보건상에 유임되었으며 1958년 9월 7일, 김응기, 김응상, 박문규, 박세창, 유철목, 정성언, 최재우, 최재하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으나 천리마 운동 당시 인민들을 너무 과도하게 부려먹는 것을 시정해달라고 김일성에게 건의했다가 영감이 늙어서 그런 거라고 비판을 받고 1959년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보건상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보건상으로 1960년 5월 19일에야 최창석이 임명되었으며 리병남은 조선의학과학원 부원장으로 내려갔다. 전일춘 회고록에 상당히 재밌는 내용이 나오는데, 남한에서 간첩을 보내서 리병남과 자꾸 접촉하려 하자 '일부 편협한 자'들이 리병남 일가를 모조리 경흥군으로 하방시켜버렸다고 한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77년 2월 18일에 사망, 1986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복권되어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23년 3월 26일자 로동신문은 "공화국의 첫 보건상: 교수 박사 리병남동지"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그의 생애를 기렸다.
3. 여담
그의 아들 리충녕은 김정일과 남산고중 동창으로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김일성종합대학 화학부 졸업 이후 청수화학공장을 거쳐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기사장까지 갔으나 뇌종양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김정일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만 않았으면 화학공업상을 시켰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카더라.그의 딸 리원영은 신경내과 전문의가 되었으며, 국어학자 리극로의 장남이자 고려의학자(한의학자)인 리억세와 결혼했다.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