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10월 11일 ~ 1998년 6월 9일 (향년 81세)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의료인.2. 생애
1916년 10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유정(現 평양시 중구역 유성동)의 부농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선 그가 빈농가 출신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구라를 치고 있다. 1910년생 출생설도 있었으나 묘비 공개로 오류로 확인되었다.1929년 평양 광성중학교에 진학하였고 평양의학전문학교(8회) 졸업 이후 1941년, 화북청년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는데 정작 조선대백과사전은 평양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부수로 일하다가 1941년에 일본으로 가서 외과학을 배우고 1945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1945년 9월, 북한으로 들어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보건부장에 임명되어 1947년 6월까지 일하였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 의무부장 및 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6.25 전쟁 발발 이후 전선사령부 군의국 외과군의장으로 일했다. 이후 외국 유학을 가서 의학을 더 공부했고 1954년 4월, 보건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59년 10월, 전임 보건상 리병남이 경질된 후 1960년 5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후임 보건상에 승진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적십자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함흥의학대학병원장에 임명되면서 리락빈에게 보건상을 물려주었고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도 소환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봉한의 경락설을 지지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경질되었다고 한다. # 이후 1990년 6월까지 함흥의학대학병원장, 황해남도 인민병원 원장, 보건경영학연구소 연구사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흘러 1998년 6월 9일에 사망, 애국렬사릉에 보건상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부고도 발표하지 않다가 6월 15일이 돼서야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영전에 화환을 보내주었다는 것이 조선중앙통신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형 최응석도 2달 전에 사망한 상태라 형제가 나란히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3. 여담
그의 형 최응석(崔應錫)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로 남한의 초기 중요 의료 엘리트였으나 국대안 파동 이후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병원장을 맡았다. 그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것 때문에 최창석 역시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정보도 있었으나 낭설로 밝혀졌다.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21권.
- 신영전, 김진혁, 최응석의 생애: 해방직후 보건의료체계 구상과 역할을 중심으로, 의사학 제23권 제3호(통권 제48호) 2014년 12월.
[1]
조선향토대백과 인물정보관에는 崔昌石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