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01:48

루카스 포돌스키/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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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카스 포돌스키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

2.1. FC 쾰른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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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22일 18세의 나이로 쾰른에서 프로 데뷔를 하였다. 데뷔 시즌인 2003-04 시즌에 19경기 10골, 2004-05 시즌에는 30경기 24골을 터뜨리는 폭발력을 보여줬으며 2005-06 시즌에는 32경기 12골로 꾸준하게 쾰른의 주 득점원이 되었다. 그러나 2006년 FIFA 월드컵 직전에 쾰른이 부진으로 강등 위기에 놓이자 이적을 결심하여 이적료 약 1,000만 유로의 이적료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다.

2.2.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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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활약을 보여줬으나 당시 소속 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비교적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첫 시즌에는 로이 마카이 클라우디오 피사로에게 밀리고, 둘이 이적한 07-08 시즌에는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영입되면서 또 후보가 되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위르겐 클린스만이 감독으로 온 08-09 시즌에도 입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08-09 시즌부터 점점 이 두 선수의 폼이 안 좋아졌지만, 포돌스키의 폼도 시망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포돌스키가 '국대스키'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 계기는 역시 바이에른 시절인데 이 시절 포돌스키는 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포돌스키가 공격 전반을 다 소화할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처진 공격수 자리와 윙어 자리가 잘 맞는데 당시 바이에른의 공격진의 주축은 루카 토니와 클로제였다. 완벽한 골게터 타겟인 세리에 30골 득점왕과 완벽한 이타적 타겟맨인 2000년대 분데스 최고의 공격수 투톱에게 대항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4-4-2의 측면 미들을 노리기에도 그 자리에는 프랑크 리베리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있었다. 아무래도 왼쪽의 리베리에겐 대항할 수가 없고, 슈바인슈타이거에게 대항하기에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에 선다는건 무리가 있었기 때문.

게다가 당시 바이에른의 공격 알고리즘은 대강 이랬다. 대놓고 루카 토니나 클로제에게 뻥 or 리베리가 다 알아서 하겠지 or 너무 리베리쪽에 수비가 몰리면 오른쪽에서 얼리 크로스. 이와 같이 쌈빡한 매커니즘이었기에 포돌스키가 뛰기 힘들기도 했다.

포돌스키는 클럽이나 국대에서 봐도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나 측면 자리에서 빠른 스피드와 튼실한 피지컬을 이용해 직선 돌파 혹은 강력한 킥력을 이용한 무식한 중거리가 최고의 장점인데 바이에른에서는 포돌스키에게 이런 공간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그 공간은 공격수의 것이거나 그냥 리베리를 위해 비워뒀다. 게다가 그 때 당시 교체 출장도 잦았다.

이렇다 보니 포돌스키는 '국대스키'란 별명과 함께 '국대에서의 활약에 비해 클럽에선 그보단 못한다'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2.3. FC 쾰른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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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2009-10 시즌

2009-10 시즌에는 결국 친정팀 쾰른으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27경기 2골이라는 최악의 부진을 기록하게 된다. 이 때 세운 무득점 기록은 무려 1,425분. 이와중에 한 골은 전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 상대로 득점한거다.

2.3.2. 2010-11 시즌

2010-11 시즌에는 포지션을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를 오가는 프리롤 형태의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바꾸고 드디어 본 실력을 클럽에서도 발휘하는지 굉장한 활약을 펼쳤다.

소속팀인 쾰른은 전력이 불안정한 하위권 팀인데 거기서 단연 군계일학, 가장 빛나는 선수가 당시 주장직을 맡고 있던 포돌스키. 32경기 13골 6어시스트의 상당히 준수한 스탯을 쌓았다. 이제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포워드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

그런데 클럽에서 잘하자 그 반대로 대표팀에서 고전하고 있다. A매치 몇 경기째 골 못넣는 건 고사하고 경기력도 부진한 상황. 유로 2012가 코 앞인데 최근 무섭게 치고 나오는 안드레 쉬를레에게도 밀릴 지경이다.

2.3.3. 2011-12 시즌

설상가상으로 2011-12 시즌이 시작하기 전, 소속팀 쾰른에서 한 시즌만에 주장직을 박탈 당했다. 원래 성격이 어른스럽고 리더십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좋지 않은 언행과 사고[1]를 자주 쳐서 주장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이로 인해 쾰른의 폴커 핑케 단장과 스톨레 솔바켄[2] 감독이 리더십 부족이라고 하며 포돌스키와 마찰이 일어났고 결국 주장직을 브라질 수비수인 페드로 게로멜에게 넘겨주었다. 심지어 부주장 자리까지 사샤 리터에게 주며 제대로 눈밖에 난 상황. 이 같은 상황으로 언론에는 이적설까지 떴으나 일단은 쾰른에 잔류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속에서 2011-12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18골 8도움으로 팀 내 최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여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다. 여담으로 득점 2위인 클레멘스가 26경기에서 5골, 노바코비치가 17경기에서 4골을 기록할 정도로 그가 쾰른의 공격 혼자서 책임지고 있다고 할만큼 과언이 아니다.

시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소속팀이었던 쾰른이 전력 보강을 약속 해놓고 이행하지 않는다며 툴툴대며 구단과 계속 마찰을 빚어오더니 결국 아스날 FC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언론에 알려진 계약 세부 내용으로는 4년 계약에 이적료 1,300만 유로, 주급은 10만~11만 파운드를 받는다고 한다. 이적 시장 기간이 아닌 3월에 이적 협상이 이루어지며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양측 구단이 이적 완료를 시켰는데, 아스날 측에서는 로빈 반 페르시에게 팀의 야망을 보여주고 유로 2012를 통해 폴디의 몸값이 오를것을 우려한 점이고 쾰른에서는 강등당하면 헐값에 포돌스키를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협상이 이뤄진 셈이다.

그리고 결국 쾰른은 분데스리가 2011-2012 시즌 17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강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적하기 전 소속팀을 강등의 위기에서 탈출시키며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던 포돌스키는 안타까움을 토로했고 쾰른 팬들은 강등당한 설움도 모자라 그들이 끔찍히도 아끼던 포돌스키를 눈물을 흘리며 보내야만 했다.[3][4]

2.4. 아스날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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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는 9번으로 확정. 9번의 전 주인이었던 박주영은 30번으로 밀렸고 이적시장 막판에 프리메라 리가의 셀타 비고로 1년 임대를 떠났다.

2.4.1. 2012-13 시즌

프리미어리그 3R 리버풀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EPL 데뷔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4R와 이어진 챔스에서도 1골씩 기록, 세 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시즌 초반을 보냈다.

그런데 찰떡호흡을 보이던 키어런 깁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산토스와 호흡맞추기 시작하자마자 득점이 없다. 그전까지만 해도 리그든 챔스든 매경기 꼬박꼬박 골을 쑤셔넣고 어시스트도 곧잘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산토스가 한마디로 패죽이고 싶은 플레이로 공수를 완벽히 말아먹자, 포돌스키는 눈물을 머금고 윙백자리까지 내려왔다.

11월 3일 프리미어리그 10라운드 맨유 원정에서는 시오 월콧이 체력방전으로 제대로 못 나오고 다른 공격자원들도 부상과 부진으로 각각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공격진을 이끌어야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저런 사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결국 팀도 패배를 기록하였다.

11월 17일 프리미어리그 12라운드 북런던 더비에서는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그 선제골을 넣은 아데바요르가 퇴장당하면서 분위기는 아스날쪽으로 넘어온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메르테사커가 동점골을 박아넣는데 성공했으며 그 이후 분위기를 전환한 아스날이 공세를 펼치고 전반 40분이 조금 넘어서 우리의 포돌스키가 역전골을 넣었다! 이후 팀은 3골을 더 성공시키면서 5:2 완승을 거뒀다.

11월 21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5라운드 몽페리에와의 홈경기에서 1대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몽펠리에의 패스미스를 챔벌레인이 가로채서 포돌스키에게 밀어주고 (그리고 챔벌레인은 태클을 당해 한동안 경기장에 쓰러져 있었지만 묻혔다) 포돌스키가 다시 지루에게 패스, 지루가 다시 한번 기가막히게 연결한걸 포돌스키가 그대로 발리슛으로 연결하여 2:0 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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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추가 득점이나 실점없이 경기가 종료되어, 13년 연속 16강 진출을 확정지었고, 근 1달여만에 클린시트를 만들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스날이라는 클럽 자체가 큰 기복을 보이는 만큼 포돌스키의 기복도 꽤나 있는 편. 하지만 절대로 실패한 영입은 아니다. 오히려 몸값에 비해 좋은 활약을 펼쳐주고 있다. 주급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서도 키어런 깁스와의 콤비네이션도 좋으며 수비 가담률이 좋아서 왼쪽이 뚫리는 일도 적고 강력한 왼발을 자주 보여준다. 거기에 이타적인 플레이는 덤. 함께 영입된 산티 카솔라가 대박이라면 포돌스키는 최소 중박 이상은 쳐주고 있다.

12월 30일 프리미어리그 20라운드 뉴캐슬전에서 선발출전하여 팀의 3번째 골을 멋지게 성공시키며 팀이 3:2로 달아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20라운드 현재까지만 봤을 때 포돌스키는 기복이 심한 선수 중 하나지만 (깁스가 돌아왔음에도 잠수타는 모습이 간간히 나왔다.) 잘 되는 날엔 어떻게든 한방을 터뜨리는 팀내 최고주급자의 위엄을 보여줬다.

1월 21일 리그 23라운드 첼시전에서는 부상으로 이탈하였다.

2월 3일 25라운드 스토크시티전에서 지루와 포돌스키, 월콧 공격 3각편대가 손발이 척척 맞으며 있는데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떡대 10백을 쓰는 스토크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을 뿐더러 골키퍼의 슈퍼세이브 또한 이어졌다. 그런데 포돌스키가 후반전에 다시 한번 전매특허 왼발을 이용해서 1골을 박아넣는데 성공했다. 갑자기 노골선언이 되었고 한동안 논란이 되다가 결국에는 골 선언. 사실 골 선언이 됐는데 오심논란이 일었고 스토크 선수들(특히 쇼크로스)은 뻔뻔하게 우겨댔다.

2월 20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뮌헨과의 홈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2: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10분에 포돌스키가 헤딩으로 만회골을 터뜨리며 반격했지만 끝내 3대 1로 패배하면서 8강 진출에는 또 다시 실패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4월 13일 리그 33라운드 노리치 시티전에서 후반 92분경에 크로스를 받은 시오 월콧이 밀어준공을 포돌스키가 턴하면서 왼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하며 스코어 3-1을 만들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거의 7분만에 0-1에서 3-1로 대역전을하며 승점 3점을 챙겨가며 3위에 입성했다!

리그 37라운드 현재 리그 스탯만 11골 9어시, 거기에 챔스에서만 5골을 박아넣는 준수한 스텟을 자랑한다. FA컵에서도 1골 1도움을 올렸다. 기복이 심해서 그렇지 스텟만 보면 정상급 윙어다. 거기에 같이 영입된 지루에 비해서 몰아넣은 적 없이 영양가도 만점인 골들이다.[5]

그리고 5월 20일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뉴캐슬전에서 로랑 코시엘니의 골을 도우며 어시스트 1개 추가, 이로서 첫시즌 리그 10-10(11골 10어시)을 달성하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지었다.

왼쪽 윙어로서는 카솔라에게 밀린 기분이지만, 그래도 출전시간이 꾸준히 보장되어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인 시즌이었다.

2.4.2. 2013-14 시즌

2번째 시즌인 13-14 시즌, 페네르바흐체와의 챔스 플레이오프에서 햄스트링에 큰 부상을 입었다. 아스날의 팀 닥터가 "내가 본 햄스트링 부상 중 가장 끔찍하다"라고 평할 정도로 재활부터 복귀까지 대략 3개월이 걸렸고, 복귀 후에도 폼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포돌스키는 끝없이 이적설에 휘둘렸다.

리그 후반부에 들어서 아스날이 주전급 줄부상[6]이 당하며 박싱데이 이후 2월까지 유지했던 순위가 4위권으로 폭망하자, 다시 한번 폼을 끌어올리며 아스날을 구원했다.

3월 26일 프리미어리그 31라운드 스완지 시티 전에서 1:0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교체되자마자 골을 박아넣고 지루의 골을 어시스트하였고[7], 바로 다음 경기인 32라운드 맨시티전에서는 좌측을 뚫고 올린 크로스가 플라미니의 발끝에 걸려 동점골 어시스트에 성공! 그 뒤 에버튼 전에선 부진하였으나 웨스트햄, 헐시티와의 경기에서 연속 멀티골을 쏘아올리며 복귀 이후 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시즌 초반 3개월이 넘는 장기 부상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 스텟은 벌써 12골 4어시스트.

멘탈도 좋아졌고 경험도 풍부한 선수인만큼, 이적설은 쏙 들어가고 스쿼드 플레이어로 안고가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는 중.

다만 2013-14 시즌 팀의 마지막 경기인 FA컵 결승전에서 다소 좋지 못한 모습으로 60분만에 교체되어 나갔다. 그래도 팀은 연장 후반 터진 아론 램지의 결승골로 3대2 승리를 거두어 우승을 거두었다!! 일찍 교체되어 앙금을 품은(?) 포돌이는 경기가 끝나고 샴페인으로 벵거를 목욕시켰다.

2.4.3. 2014-15 시즌

2014-15 시즌에는 나올 때마다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부상도 아닌데 못 나오고 있다. 갈라타사라이와의 조별리그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물론 이 경기 이후에도 벤치 신세.[8]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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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로의 이적설이 있었지만 로타어 마테우스의 비판과 포돌스키 본인의 이적설 부인, 그리고 벵거의 임대 거부로 인하여 무산될 것으로 보였다. 사우스햄튼과의 원정에서 부상으로 동행하지 않음으로써 이적설이 확산되고 벵거의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팀을 떠날 것으로 보였으나 본인은 미러의 기사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국 1월 3일 세리에A 인테르로 임대되었다. 이적 후엔 자신에게는 출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팀이 필요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유벤투스와의 이탈리안 더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후반전에 교체 출전하여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다.

이후 골을 기록하긴 하지만, 임대생으로서의 활약은 더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또다시 잊혀진 존재가 된다.

인테르의 만치니 감독이 원했던 모습은 함께 영입된 제르단 샤치리와 함께 마우로 이카르디, 마테오 코바치치 등 젊은 선수들과 융화되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리그 경기 절반 정도인 18경기를 출전하며 1골 1도움만을 기록, 버로우를 탄 채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로 아스날로 복귀한다. 복귀하며 자신의 인터 밀란 행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내용인데, 18경기 910분 가량을 뛰고 1골 1도움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걸 보면 단순히 만치니 감독 탓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6. 갈라타사라이 SK

2015년 7월 4일 갈라타사라이에 입단했다. 이적료 최대[9] 300만 유로에 연봉도 300만 유로이며, 계약기간은 3+1년이다. 2016년 5월 26일 튀르키에 쿠파스 결승전에서 라이벌 페네르바흐체 SK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우승에 일조한다.[10]

2.7. 비셀 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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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초 J1리그 비셀 고베와 연결 링크가 떴고 # 갈라타사라이 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 반대로 비셀 고베 측에서는 조만간 정식으로 오퍼를 넣을 뜻을 내비쳤다. #

결국 3월 2일 비셀 고베로 이적이 확정되었다. # 2017년 여름에 팀에 합류했다.

7월 29일 오미야를 상대로 데뷔전부터 멀티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부진했고 시즌 전체로 봐도 17경기 5골로 높은 연봉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9위로 추락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시미즈 S펄스와 리그 마지막 라운드 경기에서 다리 통증을 호소해 교체로 물러난 뒤 부상 치료를 이유로 독일로 돌아갔으나 팀에 연락도 없이 복귀하지 않고 천황배 준결승전에서도 불참하여 잠적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본인의 SNS로 잠적 논란을 해명했다. 하지만 부상이 1월 중순에 회복되어 내년 1월 1일에 열리는 천황배 결승전에도 불참하여 일본에서의 첫 시즌을 끝냈다.

2018시즌에는 팀의 공식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정우영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외국인 주장이다.

하지만 팀도 부진하고 포돌스키도 부진과 부상으로 최악의 폼을 보여줬다. 전반기가 끝날 때까지 공격포인트가 3골 2도움에 불과했다.

4월 21일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리그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나고야의 대형영입이었던 에게 클래스의 차이를 보여줬다. 그러나 갈수록 둘의 득점 횟수 차이가 심해졌고 시즌이 끝났을 때는 조는 24골로 득점왕에 오른 반면 포돌스키는 겨우 5골에 그쳤다.

2018년 5월 18일 비셀 고베 구단에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영입하며 한솥밥을 먹었다.

그러나 월드컵 전에 8주 부상으로 독일로 복귀해 팀을 이탈하였고 월드컵이 끝나고 훈련을 하다가 시즌 재개전에 또 6주의 부상을 입고 독일로 복귀했다. 2017시즌에 천황배 4강 직전 부상을 입었던 것도 그렇고 나이가 있는 선수는 맞지만 중요한 순간에 부상 관리가 전혀 안 됐다.

같은팀 동료 이니에스타와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포돌스키는 툭하면 부상을 핑계로 독일로 돌아갔었고 몸값을 증명하는 이니에스타에 비해서 경기력도 좋지 않다. 동료들에게 툭하면 짜증내는 모습도 많이 보여서 현지팬들 평가도 많이 안좋아졌다. 김승규는 1년을 먼저뛴 포돌스키보다 반년도 안뛴 이니에스타가 일본어를 더 잘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었다.

2019시즌 개막전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만나 비야, 이니에스타와 함께 출전했지만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0-1로 패하고 만다.

이후 경기 도중에 볼보이한테 독일어로 폭언을 퍼붓고, 인스타그램에 온천욕 사진을 올리고[11], 또한 팀 훈련에 여러차례 무단으로 불참하기까지 했다.

5월 18일 요코하마 원정에서 1:4로 완패당한 날에는 명단 제외되었는데, 이건 본인이 감기가 걸려서 결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날 본인의 SNS에 고베의 전통축제에 놀러간 것을 인증했다.

이후에도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날리고 부상 복귀 후에도 명단에도 들지 못하다가 29라운드 도쿄전에서 교체출전하면서 모습을 비췄다. 마지막 경기 주빌로 이와타전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SNS 논란들과 부상과 향수병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그러나 같은 국적의 토르스텐 핑크감독이 부임하면서 향수병에서 어느정도 해방되었고 폼 역시 살아나면서 팬들의 반응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덴노배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경험이 부족한 고베에게 첫 우승컵을 안겨주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포돌스키 또한 그동안 의욕이 없어보였던 모습들과 다르게 우승 후 고베 관련 사진들을 계속해서 올리면서 기쁨을 드러냈다.

2020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시카고 파이어 등의 팀으로의 이적설이 떴고, 결국 2020년 1월 19일 비셀 고베를 떠나는것이 확정되었다.

말레이시아 클럽 조호르 FC 이적설이 떴고 1월 15일 포돌스키가 조호르에 방문한 사진이 올라왔다.[12] 그러나 조호르로의 이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터키 팀들과의 이적설이 났다.

2.8. 안탈리아스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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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4일, 안탈리아스포르로 이적하며 3년만에 튀르키예로 컴백했다.

2.9. 구르니크 자브제

폴란드의 구르니크 자브제로의 이적이 확정됐다. 7월 9일 입단식을 진행했으며, 포돌스키는 이 팀이 자신의 마지막 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구르니크 자브제는 포돌스키가 태어난 동네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을 연고지로 삼고 있는 구단이다. 또 포돌스키 본인이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팀이라 커리어를 마무리할 곳으로 이 팀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2.10. 은퇴

2024년 10월 11일, 친정팀인 1. FC 쾰른과의 친선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1] 그 무렵 친 사고 중 가장 큰 것이 누리 사힌 3:0 드립 사건이었다. 도르트문트의 선수였던 누리 사힌과 태클 문제로 인해 시비가 붙자 면전에 대고 손가락으로 3과 0을 표시하며 독일 대표팀에게 3:0으로 패한 터키 대표팀을 조롱했다. (누리 사힌은 외질과는 달리 독일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터키 대표팀을 선택한 터키 국가대표 선수이다. 둘이 비교되는 바람에 당시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외질이 터키 국민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받게 만든 장본인.) 당시 경기 영상을 살펴보면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해당 숫자를 만들면서 drei, null(3, 0)이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잡힌다. 그리고 포돌스키가 이렇게 조롱을 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쾰른은 사힌에게 한 골을 내 주었다. 골을 넣은 직후 사힌이 포돌스키 바로 앞에서 골 세레머니를 하고 그 모습을 보며 뒷머리를 긁는 포돌스키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중계 카메라에 실렸다. [2] Ståle Solbakken. 스웨덴 출신 감독이다.(스탈레 솔바켄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으나 å는 아 보다는 오 발음에 가깝다.) 이전 소속팀 코펜하겐을 챔피언스리그 무대에까지 올려놓아 분데스리가로 스카우트 되었으며 지도 스타일은 엄격한 스칸디나비아식 스타일.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모든 선수를 공평하게 대하며 감독의 권한을 키우려 노력했다. 무슨 짓을 해도 예쁨받는 '쾰른의 아들' 포돌스키를 위시한 스타 플레이어 몇 명에게 무게추가 기울어있고 그날 그날 경기 때마다 해당 유명 선수들의 컨디션에 따른 분위기를 많이 타는 쾰른의 무게중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를 많이 했으며 포돌스키의 주장직 박탈은 이와도 무관하지 않다. [3] 수정 전에 험한 욕을 날린 쾰른 팬들도 다수였다고 적혀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프리시즌에 치러진 아스날과 쾰른의 친선경기에서도 쾰른 팬들은 페널티킥 상황을 제외하고는 포돌스키에게 전혀 야유를 하지 않았다. 이적 후에도 폴디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는 쾰른 팬들의 호의적인 리플들이 가득하다. [4] 거기다 2012년 1월에 아스날로부터 거액의 오퍼가 왔으나 포돌스키는 팀을 잔류시키기 위해 시즌 중인 겨울에 이적하는 걸 거절했다. [5]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서 결승골,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시즌 첫 골, 챔스 몽펠리에와의 경기에서 추격, 쐐기골, 바이에른과의 경기에서 골 등이 있다. [6] 메수트 외질, 아론 램지, 잭 윌셔, 시오 월콧등이 싹다 최소 2달 이상의 장기부상을 끊었다. 거기에 월콧은 아예 시즌아웃. [7] 다만 플라미니의 운없는 자책골로 비긴 아쉬운 경기였다. [8] 사실 여름 이적시장 막판에 떠날 가능성이 높았고 본인도 인스타그램에 이적을 암시하는 사진과 글을 올렸지만 올리비에 지루가 부상당하며 갑작스럽게 남게 된 감이 있었다. [9] 250만 유로를 일단 지불하고 50만 유로는 옵션조항이 붙어있다. [10] 참고로 아스날 팬들은 이 경기를 매우 통쾌하게 생각했는데 당시 페네르바흐체의 선발 공격수가 바로 구너들의 공공의 적 1호인 반통수 로빈 반 페르시였기 때문. 경기 후 전 세계의 구너들은 폴디를 칭찬함과 동시에 반통수를 조롱하였다고 한다. [11] 온천욕 사진 자체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필 포스팅 날짜가 경기 전날이라 자기가 경기에 안 나온다는걸 인증한 거라, 2018년에 이니에스타의 수족관 사건때문에 한바탕 난리난 걸 기억하는 고베로써는 이 일이 또 터져 골치아픈 상황이 됐다. 이니에스타는 이 사건으로 1달 근신처분을 받았다. [12] 덴노배에서 우승함으로써 고베가 2020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함에 따라 같은 조에 편성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경기를 위해 방한할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떠나버려서 이젠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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