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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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치디오 센티멘티 Lucidio Sentimenti |
출생 |
1920년
7월 1일 이탈리아 왕국 봄포르토 |
사망 |
2014년
11월 28일 (향년 94세) 이탈리아 토리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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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0cm | 체중 80kg |
주발 | 오른발 |
직업 |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
프로클럽 |
ASC 모데나 (1940~1942) 유벤투스 FC (1942~1949) SS 라치오 (1949~1954) LR 비첸차 (1954~1957) 체니시아 칼초 (1957~1960) → 토리노 FC (1959 / 임대) |
국가대표 | 9경기 ( 이탈리아 / 1945~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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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ASC 모데나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센티멘티는 처음에는 서브 골키퍼였지만 1942년에 주전으로 올라섰다. ASC 모데나는 1940-41 시즌에 세리에 B 준우승으로 세리에 A에 승격했고 센티멘티는 1942년 2월에 세리에 A 데뷔 경기를 치렀다.1942년 여름, 센티멘티는 유벤투스 FC로 이적했고 1949년까지 뛰었다. 그러나 당시는 그란데 토리노가 세리에 무대를 평정했던 시기였고 센티멘티가 있을 때의 유벤투스는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1949년, 7년간의 유벤투스 생활을 정리하고 SS 라치오로 건너간 센티멘티는 다소 그의 기량에 하락세가 왔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평가에 반박하듯 센티멘티는 라치오에서 5시즌간 170 경기에 출전,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1954년에 LR 비첸차로 이적한 센티멘티는 3년간 82경기에 출전했고 1954-55 시즌에 비첸차의 세리에 A 승격에 공헌했다.
2.1.2. 국가대표
센티멘티는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이 이탈리아 대표팀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이 아닌 몇 안되는 선수였다.센티멘티는 1950년 월드컵에서 페루초 노보 감독에 의해 주전 골키퍼로 낙점받았다. 하지만 그는 첫 경기에서 스웨덴에 3골을 먹히며 이탈리아가 2:3으로 패하자 주세페 모로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2.2. 이후
센티멘티는 선수 은퇴 이후 유벤투스 FC 등지에서 코치로 일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센티멘티는 공격수로 뛰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2] 발로 공을 다루는 것과 킥, 패스에 매우 능숙했다. 그래서 센티멘티는 가끔 페널티 킥 키커로 나서기도 했다.그는 매우 침착한 스타일의 골키퍼였으며 판단력, 스피드, 볼 처리 능력에 강점을 보였다. 센티멘티는 골키퍼로서 키가 작고 몸무게가 많이 나갔지만 좋은 운동 능력을 통해 슈팅을 처리했고 특히 발로 슈팅을 막아내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가끔 중거리 슈팅을 골로 내주는 경우가 있어 비난받았고 SS 라치오 시절에는 구단이 센티멘티에게 시력 검사를 시킨 적도 있었다.
4. 뒷이야기
- 센티멘티외에도 그의 형제 4명이 축구 선수로 활약했는데 루치디오는 그중 넷째였기 때문에 센티멘티 Ⅳ(콰토르)로도 불렸다. 이 5형제 중 루치디오만이 이탈리아 대표팀 경력이 있다.
- 센티멘티는 페널티 킥으로 총 3골을 넣었는데 골을 허용한 골키퍼 중에는 그의 형 아르날도 센티멘티도 있었다.
- 센티멘티는 수비진에서 공이 멀어지면 골 포스트 사이를 뛰어다니던 루틴이 있었다.
- 알리안츠 스타디움 개장을 기념해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에 헌액된 50인 중 센티멘티는 당시 91세로 최고령 생존자였고 알리안츠 스타디움에 방문했을 때 울트라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센티멘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손가락 골절로 골키퍼를 못 보게 되자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경기를 뛴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