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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 아버클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로스코 아버클
Roscoe Arbuckle
파일:330px-Roscoe_Arbuckle.jpg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출생 1887년 3월 4일
미국 스미스 센터 캔자스
사망 1933년 6월 29 (향년 46세)
미국 뉴욕
신장 178cm
직업 배우, 코미디언
활동 기간 1904년 ~ 1933년
1. 개요2. 생애3. 버지니아 라페 살인 무고 사건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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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 코미디언.

귀여운 뚱보 캐릭터로 1910년대에 최고의 코미디언 중 하나로 인기를 누린 최정상급 코미디언이다. 아버클은 헐리우드가 세워진 후 최초로 전국민에게 인기를 끈 코미디 스타였다.

로스코 아버클은 코미디 영화 배우들 중 최초로 개인 스튜디오를 만든 인물이자 한 때 헐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배우였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여배우의 살인사건에 억울하게 기소돼 1924년부터는 누명으로 이미지가 하락하여 영화계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윌리엄 굿리치(William Goodrich)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등 거의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2년 영화계에 복귀했으나 193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46세에 요절했다. 비운의 배우, 잊혀진 배우로 불리게 되었지만, 현재는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복권되었고, 초창기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표격 인물로 불리고 있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5.9Kg이라는 거구로 태어난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유달리 다른 체형으로 인해 부모들에게 학대[1]나 당하며 살았고, 부모들이 지원을 끊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호텔리어로 일하다가, 주변 동료의 권유로 아마추어 노래 장기자랑 무대를 나간 것을 시작으로,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극단에 합류해 보드빌 배우 가수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아버클은 1909년부터 드문드문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하다가 1913년 할리우드 최초의 코미디 전문 제작소인 멧 세넷(Mack Sennett)의 키스턴 프로덕션에 들어가면서부터 엄청난 덩치에 비해 비교적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뚱뚱이 아버클 (Fatty Arbuckle)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무성 코미디 영화배우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로스코 아버클은 여배우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1893 ~ 1930)[2]와 함께 키스턴 프로덕션의 간판 흥행 배우였다. 1914년에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Fatty's Debut를 직접 감독하면서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를 통틀어 가장 인기가 많은 할리우드 스타로 군림했던 로스코 아버클은 사촌 동생이자 롱 다리를 이용한 다리 찢기로 유명한 코미디언인 알 세인트 존(1892~1963)과 콤비로 활동하면서 코미디 영화의 단골 콤비인 <뚱뚱이와 홀쭉이> 컨셉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다만, 비대한 몸으로 바닥에 넘어지는 등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했기 때문에 자주 부상을 입었고 급기야 1916년 무렵에는 의사들이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낫겠다고 진단할 정도로 다리 상태가 안 좋아졌다. 결국, 다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버클은 1916년에는 별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아버클은 엄청난 통증을 모르핀을 맞으면서 견디며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1917년 아버클은 하드코어한 스케줄에 지쳐서 키스턴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직후 20세기 폭스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유명 영화 제작자인 조셉 스켕크(Joseph M. Schenck)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코미디언 최초로 Comique라는 이름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아버클은 영화사 설립과 동시에 보드빌에서 활동하던 배우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능력을 높이사서 키튼을 영화계에 입문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아버클은 직접 감독을 맡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버스터 키튼, 알 세인트 존 등과 함께 여러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였다. 비록, 키스턴 시절에 자신이 멘토링까지 해줬던 후배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떠돌이 (The Tramp)" 캐릭터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키스턴 시절처럼 코미디 영화계의 압도적인 1인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아버클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인기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후술할 사건 하나로 그의 명성은 한순간에 곤두박질 당했고, 무죄로 판결 났음에도 아버클은 결국 과거의 영광을 복구시키지 못한 채 대중들의 관심에서 잊혀지게 된다.

이후 영화 감독으로 복귀를 준비하려던 아버클은 1933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잠자던 중 사망하니, 향년 46세였다.

3. 버지니아 라페 살인 무고 사건

파일:Virginia_Rappe,_head-and-shoulders_portrait).jpg
버지니아 라페 (1891 – 1921)

1921년 9월 5일,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3]에서 배우들 간의 자그마한 파티의 주최자였던 로스코 아버클은 당시 여러 여성 배우들도 파티에 초청했는데, 그 날 참석자 중 배우 지망생이자 모델이었던 버지니아 라페 (Virginia Rappe)라는 여배우가 갑자기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사인은 방광 파열로 인한 복막염으로 밝혀졌다.

문제는 버지니아와 같이 대동하여 참석했던 동료 여배우 지망생 밤비나 델몬트(Bambina Maude Delmont)가 아버클이 버지니아를 강간했고, 그의 거대한 몸무게에 짓눌려 복막 파열로 사망한 것이라는 증언을 하면서 당시 만연하던 옐로우 저널리즘들에 의해 대중들이 로스코 아버클을 <뚱뚱하고 역겨운 강간마>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주지사 출마 계획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야심에 가득찼던 지방 검사 매튜 브래디가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했고 결국 버지니아 리페의 사망 사고는 1급 살인 범죄 사건으로 비화해 재판이 벌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건은 상술한대로 야심에 찬 매튜 브래디와 유명 배우 스캔들을 일으켜 인지도를 확 끌어올리려고 한 밤비나 델몬트에 의한 합작품으로, 실제로 밤비나가 주장했던 강간에 대한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후 몇몇 증인들이 매튜 브래디가 위증을 하라고 강요하며 그들을 협박했고, 메튜 브래디에게 뇌물도 받았다는 양심 선언을 했기 때문에 재판은 의외로 아버클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황색언론과 밤비나의 끊임없는 위증 및 호소[4] 등에 의해 당시 미국 배심원 제도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재판은 3차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아버클은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데 성공[5] 했으나 3차까지 치러진 재판 기간동안 로스코 아버클은 살인마라는 오명이 씌워져서 인기 영화배우로서의 명성이 한순간에 추락하고 아내와도 이혼하는 등 불운을 맞이하였고, 결국 그가 사망한 1933년까지 끝내 복귀에 실패[6]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4. 기타

  • 상술했듯이 코미디 영화의 원조 스타로 불린 만큼 당대의 무성영화 코미디 배우들의 멘토로도 활동했는데, 그런 멘티들 중 큰 성공을 거둔 사례가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이었다. 찰리 채플린의 페르소나인 떠돌이 캐릭터의 복장 중 통이 넓은 바지는 로스코 아버클의 의상을 빌려 입은 것이었고 보드빌에서 활동하던 버스터 키튼을 영화계에 스카웃한 장본인도 로스코 아버클이었다. 두 사람은 스캔들 당시 아버클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인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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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모와 그의 9형제 모두 날씬한 체형이었기 때문에, 부모는 아버클을 사생아 정도로 판단했고, 로스코라는 그의 이름도 악명높은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어서 부모들이 경멸하고 있던 당시 뉴욕 상원의원 Roscoe Conkling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2] 키스턴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로서 활동했던 배우로 찰리 채플린과 로스코 아버클 영화의 초기 여주인공이기도 했다. 1910년대 후반에는 키스턴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를 세웠을 정도로 잘나갔으나 1922년 남자친구이자 영화 감독인 윌리엄 데스먼드 테일러의 사망 사건에 연루된 것(메이블 노먼드는 심한 코카인 중독자였고 윌리엄은 그녀가 코카인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는데 코카인 공급책인 마피아들이 윌리엄 테일러로 인해 주요 고객인 메이블 노먼드를 잃게되자 앙심을 품고 윌리엄 테일러를 죽였다.)과 1924년에 석유 재벌 코틀런즈 다인즈가 총격을 당한 사건(메이블의 운전기사였던 그리어(Greer)라는 남자가 1924년에 석유 재벌 코틀런드 다인즈를 총으로 쐈다. 범행 사유는 그리어가 재판 출석을 거부함에 따라 끝내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리어가 메이블에 대해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고용주인 메이블은 이에 대해 부인했다.)으로 인해 순진한 재벌 남자들 적당히 꼬시고 놀려고 했던 여자로 손가락질 당하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26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30년, 결핵으로 3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3]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Westin St. Francis 호텔 [4] 실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동안 이 밤비나라는 여성은 헐리우드의 추악한 면을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정의의 사도인 양 포장되어 그녀가 원하던 일시적인 인지도 상승을 이루는데는 성공했었다. [5] 사실, 로스코 아버클을 아는 동료 지인들의 평에 의하면, 그는 평상시에 여자 앞에서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등 순박하기 그지없다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에, 로스코 아버클이 강간,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그에게 멘토링을 받았던 찰리 채플린 또한 그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6] 죽기 1년 전인 1932년 워너브로스사와 계약한 후, 영화 감독으로 짧게나마 복귀했지만, 1년만에 사망하면서 빛을 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