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이누드 3세 판 헬러 Reinoud III van Gel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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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33년 5월 13일 | |
헬러 공국 아른험 | ||
사망 | 1371년 12월 24일 (향년 38세) | |
헬러 공국 아른험 | ||
아버지 | 레이누드 2세 판 헬러 | |
어머니 | 잉글랜드의 엘레노어 | |
형제 | 에두아르트 | |
아내 | 마리 드 브라반트 | |
자녀 | 얀( 사생아) | |
직위 | 헬러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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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 공작. 형제 에두아르트에게 폐위된 뒤 10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에두아르트가 전사한 뒤 복위했지만 얼마 안가서 사망했다.2. 생애
1333년 5월 13일 헬러 공국 아른험에서 헬러 공작 레이누드 2세 판 헬러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의 딸인 잉글랜드의 엘레노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43년 10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당시 10살이었던 그가 헬러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소집된 의회는 그의 어머니 엘레노어와 그의 삼촌 더크 4세 판 발켄부르크를 수호자로 선임하고, 또다른 삼촌인 얀 판 발켄부르크를 스타트허우더(stadtholder: 궁내관)으로 선임했다. 1347년 7월 1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 드 브라반트의 딸인 마리 드 브라반트와 결혼했다. 부부는 지참금으로 투른하우트를 받았다.결혼식이 있은 지 며칠 후인 1347년 7월 21일, 레이누드 3세는 장인을 따라 아몽 전투에서 리에주 주교구 반란군과 대적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레이누드 2세는 부상을 입었고, 휴베르트 2세 판 쿨렘보르그, 로베르트 판 아르켈 등 여러 주요 인사들을 상실했다. 이후 백년전쟁을 치르는 외삼촌 에드워드 3세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1348~1350년 중세 흑사병 처리에 골몰했다. 1350년, 후크파와 대구파 사이의 분쟁에 직면했을 때 후크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구파는 그의 동생인 에두아르트를 지원했고, 이로 인해 형제는 후크파와 대구파의 수장으로서 내전을 벌였다.
1354년, 후크파의 일원이었다가 대구파로 전향한 에메릭 판 드루텐이 레이누드 3세 또는 그의 추종자가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분개한 대구파가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자, 그는 이에 대응해 벨루웨 농노들에게 자신을 위해 싸워준다면 '자유 농부'가 될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호응한 농부 2,000명이 에두아르트와 지지자들이 장악한 아른험으로 진격했지만, 브리옌베르그 전투에서 에두아르트와 수백 기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농부들은 언덕에서 진을 치고 첫번째 전투에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두번째로 돌격했을 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무장도 덜 되었던 농부들이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에두아르트의 기사 100명이 전사한 반면, 농부들은 수백 명이 죽었다.
이후에도 내전을 이어가던 레이누드 3세는 1361년 5월 티엘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해 에두아르트에게 생포된 뒤 처음에는 로젠달 성에 4년간 감금되었다가 니젠베크 성에 투옥되어 6년간 더 감금되었다. 그는 총 10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운동 부족과 폭식으로 인해 너무 뚱뚱해져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371년 8월 에두아르트가 바이스와일러 전투에서 전사한 뒤 해방된 후[1] 헬러 공작으로 선포되었으나 1371년 12월 24일 아른험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마리 드 브라반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사생아로 얀 판 하템이 있었다. 얀 판 하템은 위트레흐트에 있는 튜튼 기사단의 변호사가 되었으며, 티엘의 사령관을 맡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뒤 이복 누이인 메흐텔트와 마리아가 헬러 공작위를 놓고 격돌한 끝에 마리아가 승리했고, 율리히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가 마리아의 아들 자격으로 헬러 공작위를 세습했다.
[1]
전승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를 꺼내기 위해 벽을 부숴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