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7:59:19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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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1대 2대 3대 4대
이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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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980)
장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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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983)
조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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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장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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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86)
이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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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89)
<rowcolor=#ffffff> 4대 5대 6대 7대
감독 대행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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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89)
엥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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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베르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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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이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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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감독 대행
조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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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rowcolor=#ffffff> 8대 9대 10대 11대
조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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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4)
감독 대행
정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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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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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995)
셰큘라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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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이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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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999)
<rowcolor=#fff> 11대 12대
감독 대행
신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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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감독 대행
장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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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감독 대행
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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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김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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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2)
감독 대행
박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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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rowcolor=#fff> 13대 14대 15대
포터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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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6)
감독 대행
김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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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에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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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07)
감독 대행
김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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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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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감독 대행
김판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황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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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10)
안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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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2)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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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015)
감독 대행
이와무라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5)
<rowcolor=#fff> 19대 20대 21대 22대
최영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2016)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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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감독 대행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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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최윤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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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조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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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0)
<rowcolor=#fff> 22대 23대 24대 25대
감독 대행
이기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
페레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21~2022)
박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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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024)
감독 대행
유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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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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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는 감독 대행에게 감독직을 맡긴 후 복귀한 경우
: K리그1 우승 / : 코리아컵 우승 / : AFC 챔피언스 리그 엘리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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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前 축구감독
파일:드라고슬라브 셰큘라라츠.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Dragoslav Šekularac
Драгослав Шекуларац
출생 1937년 11월 8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슈티프
사망 2019년 1월 5일 (향년 81세)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국적
[[세르비아|]][[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55~1966)
카를스루에 SC(1966~1967)
세인트루이스 스타스(1967)
OFK 베오그라드 (1968)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1969~1971)
CA 부카라망가 (1972)
미요나리오스 FC (1973)
아메리카 데 칼리 (1974)
파리 FC (1975)
감독 세르비안 화이트이글스 (1975 / 선수 겸 감독)
뉴욕 이글스 (1978)
과테말라 대표팀 (1984~1985)
풋스크래이 JUST (1986~1987)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89~1990)
클루브 아메리카 (1990~1991)
알 나스르 FC (1992)
하이델버그 유나이티드 (1993)
CA 마르베야 (1994~1995)
부산 대우 로얄즈 (1996)
FK 나프레다크 크루셰바츠 (1997)
FK 오빌리치 (1999)
세르비안 화이트이글스 (2006)
국가대표 41경기 6골( 유고슬라비아 / 1956~1966)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
3.1. 한국행 이전3.2. 부산 대우 로얄즈3.3. K리그 이후
4. 여담

[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 축구선수 출신 감독.

현역시절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였으며 은퇴 이후에는 주로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감독 생활을 오래 한 축구인이었다. 2019년 1월 작고했다.

우리에게는 1996년 부산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써 알려진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1955년 3월, 17세의 나이에 프로선수로 데뷔했다. 그것도 유고슬라비아 최고 명문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팀의 선수로 데뷔한 것인데, 아예 1955-56 시즌부터는 팀의 주전급 선수가 되면서 7골을 넣는 등 비범한 모습을 보인다.

1956-57 시즌엔 전격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 선발되어 1956년 12월 열린 멜버른 올림픽 축구에 출전해 은메달을 수상했다. 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올라서며 리그와 유러피언 컵 대회를 병행했다.

1958-59 시즌 츠르베나의 시즌 더블을 이끌면서 유벤투스 FC 등의 이적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젊은 선수의 해외이적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성사되진 못했다. 그는 츠르베나에서 1966년까지 10시즌간 375경기 119골이란 기록을 남겼고, 1966-67 시즌이 되어서야 독일 분데스리가 카를스루에 SC로 이적해 뒤늦은 해외 리그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해서 1960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과 1958, 1962년 두 차례의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다.

전성기가 어느정도 지나가버린 후에 밟은 분데스리가에서 17경기 2골로 부진했고, 이후에는 잠깐 유고슬라비아 리그로 돌아갔다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콜롬비아 리그에서 뛰었다. 득점력은 이전만 못했지만 그는 콜롬비아에서 하얀 펠레라는 별칭을 얻으며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1975년 프랑스 파리 FC에서 반시즌을 소화한 뒤 캐나다로 넘어가 선수생활을 정리했다.

3. 감독 경력

3.1. 한국행 이전

캐나다 팀인 세르비안 화이트이글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뉴욕 이글스란 팀을 거쳐 1984년 과테말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오른다. 약 2년간 팀을 지휘했고, 이후 호주에서도 한 시즌 동안 프로팀을 맡아 지휘했다.

1989년 자신의 친정팀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감독으로 선임되어 유고슬라비아에 돌아갔다. 1989-90 시즌 리그와 컵 더블을 달성해 선수, 감독으로 모두 더블을 달성한 흔치 않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나 멕시코 리그의 클루브 아메리카 감독직을 맡았다.

이후 전 세계를 오가면서 여러 팀의 감독직을 맡는다. 1992년 사우디 리그의 알 나스르 FC, 1993년 호주 세미프로리그의 하이델버그 유나이티드, 1994년 스페인 세군다 리가의 CA 마르베야를 차례로 지도했고, 1994-95 시즌 이후 마르베야의 감독직에서 사임한다.

3.2. 부산 대우 로얄즈

1995년 10월, 대우 로얄즈의 기술고문으로 선임되어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1996년 1월, 정식 1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팀 역사상 3번째 외국인 감독이 되었다. 특히 당시 대우 로얄즈의 모기업인 대우그룹이 동유럽으로 사업 확장을 추진하던 시기였고, 유고슬라비아와도 여러 협약을 맺고 교류를 하고 있어 이 선임이 가능했다.

1년 계약이긴 했지만, 유럽 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었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다는 점이 팬들의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실제 당시 부산 대우에도 아미르 텔리고비치, 사샤 일리치, 라디보예 마니치, 사샤 드라쿨리치 등 외국인 선수들이 전원 유고슬라비아쪽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시즌 개막 후 전초전으로 열린 아디다스컵에서 3위를 기록해 그럭저럭 데뷔전을 잘 치렀지만, 본게임인 리그에서 전반기 9개 구단중 8위로 그야말로 망했다. 특히 시너지를 기대했던 외국인 선수들이 죄다 침묵하면서 팀의 성적이 곤두박질쳤고[1], 화려한 커리어에 반대되는 성적에 구단은 일찍 기대를 접고 반년만에 세쿨라라츠 감독을 경질한다.

3.3. K리그 이후

한국을 떠난 후 셰쿨라라츠 감독은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 1997년 하부리그의 나프레다크 감독과 1999년 FK 오빌리치 감독을 잠깐씩 맡은 뒤 사실상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2006년 잠시 캐나다의 세르비안 화이트이글스 감독으로 일선에 복귀했고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팀에 안긴 뒤 1년만에 사임했다.

2019년 1월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여담

  • 체스에 소질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2019년, 불과 사망 1주 전 유명 체스선수인 아나톨리 카르포프와 이벤트매치로 체스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 주로 사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한국에서도 어느 순간 사키 감독으로 불리곤 했다고.
  • 4개국어 구사자였다. 모어인 세르비아어와 함께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 능통했다. 특히 중남미 지역에서 오랜기간 선수, 감독 생활을 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 선수시절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연이 있다. 1962 FIFA 월드컵 칠레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유고슬라비아와 대한민국이 만났고,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주전 공격수였던 셰쿨라라츠는 대한민국과의 1차전 홈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했었다. 대한민국 원정 2차전에서도 출전해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35년 뒤 대한민국 땅에 감독으로 다시 돌아온 묘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 특히 사샤 드라쿨리치와는 선발 기용 문제 때문에 불화설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