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0:29:06

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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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벤구트 곶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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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신도심 일대와 등대

아랍어 دلس
베르베르어 ⴷⵍⵍⵙ
영어, 프랑스어 Dellys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근대
2.2.1. 델리스 좌초 사건2.2.2. 대프랑스 항쟁
2.3. 근현대
3. 갤러리
3.1. 벤구트 곶3.2. 카스바3.3. 유럽인 구역

1. 개요

알제리 북부의 도시. 수도 알제에서 동쪽으로 60km, 베자이아에서 서쪽으로 80km, 티지우주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3만 5천명으로, 카빌리 지역의 중심이 티지우주라면 그 외항이 바로 델리스이다. 시가지는 시디 수산 성채가 있는 중앙의 산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신도심, 동쪽의 구도심으로 나뉜다. 구도심의 오스만 제국 시기 카스바와 바다를 향해 뾰족히 튀어나온 벤구트 곶 등이 볼거리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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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로마 유적 위에 세워진 델리스 카스바의 고즈넉한 풍경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고, 인근 타크뎀트에선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그러다 페니키아의 무역 거점인 루수쿠루가 세워졌고, 그리스어로는 루수코루 (Ρουσουκκόρρου)로 불렸다. 카르타고, 누미디아, 마우레타니아 지배를 거쳐 아이데몬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 제국이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후 도시는 라틴식인 루수쿠룸 혹은 루순코라이로 개칭되어 무니키피움 (도시)이 되었다. 팍스 로마나 시기 루수쿠룸은 특별한 일 없이 안정을 유지하였다. 303년 카이사레아 ( 셰르셸)에서 순교한 성녀 마르키아나가 이곳 출신이다. 그무렵 기독교화된 루수쿠룸은 북아프리카의 다른 도시들처럼 주교구가 되었고, 484년 티파사와 카르텐나 ( 테네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통파 주교 메트쿰이 반달 왕국 국왕 후네릭에 의해 축출되었다.

2.1. 중세

이슬람 정복 후 작은 마을로 유지되다가 1100년경 테델레스로 기록되었다. 당시 알제리 북부를 지배하던 함마드 왕조는 반세기 가량 안달루스 알메리아를 다스리다가 1091년 무라비트 왕조에 의해 축출된 수마디흐 토후국[1]의 마지막 에미르 무이즈 앗 다울라가 망명해오자 그에게 일대를 봉토로 하사하였다. 이로써 안달루스 이주민들에 의해 재건된 도시는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하지만 13세기 들어 일대는 마린 왕조, 자얀 왕조, 하프스 왕조 간의 전장이 되었고, 특히 자얀-하프스 국경에 해당했기에 양측의 쟁탈전이 일었다.

그 결과 1285년부터 1373년까지 90여년간 델리스는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1398년에는 무어인 해적의 토레블랑카 ( 발렌시아 인근)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발렌시아- 마요르카 함대의 습격을 당하였다. 그러던 15세기 자얀 조가 쇠퇴하자 델리스는 알제와 함께 탈리바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가 1518년에는 그를 축출한 하이르 앗 딘에 의해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령의 동부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명목상 델리스는 알제 총독이 직접 지배하는 다르 엘 술탄에 속했지만, 카빌리 지방에 대한 지배력은 약하였기에 사실상 자치를 유지하였다. 한편 17세기 델리스에는 다른 마그레브 해안과 마찬가지로 안달루스에서 추방당한 모리스코들이 정착하였고, 이로써 카스바가 확장되었다.

2.2.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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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델리스 시가지 1847년에 세워진 엘 이슬라흐 모스크

2.2.1. 델리스 좌초 사건

1827년 일명 '파리채 사건' 이후 침공을 준비한 프랑스는 1830년 5월 15일에 함대를 남파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델리스 근해에서 집결하였는데, 그중 야밤 정찰에 나섰던 라벤투르 호와 레실레네 호가 풍랑으로 해안에 좌초하였다. 1명의 사망자 외에 하선한 병사들은 안개로 나머지 함대와 단절되었고 화약이 물에 젖었기에 방어 진지를 세우고 구조를 기다리는 대신 주알제 프랑스 영사의 협상으로 귀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행군하였다. (5월 16일) 하지만 그들은 이내 이브라힘 아가가 이끄는 카빌리 부족들의 공격을 받았고, 아랍어를 구사하는 한 병사가 영국군이라 둘러대어 학살을 모면하였다. 다만 의심이 가시지 않은 카빌리 인들은 병사들을 둘로 나누고 옷을 벗긴 후 각지로 끌고다녔다.

견디다 못한 소위 브루아가 가장 가까운 지도자에게 데려다 달라고 청하였고, 이에 델레스 총독에게 인계되었다. 후자는 소위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하며 해안에 나타났던 프랑스 함대의 진의를 캐물었다. 그러던 5월 18일 수색에 나선 프랑스 함대가 위협 포격을 가하고 돌아가자 분노한 카빌리 인들은 두 무리의 포로들 중 하나를 학살하였다. 브루아 소위를 포함한 나머지 무리 역시 정체에 대해 실토하지 않자 분노한 델레스 총독에 의해 일부 처형되었다. 그후 살아남은 이들은 5월 20일 알제로 인계되어 수감되었다. 그후 유럽 각국 영사들의 개입으로 포로들의 처우는 나아졌고, 그와중에 브루아 소위는 자신이 관찰한 알제리 군사 기밀을 적어 프랑스측에 보내었다. 결국 7월 5일 알제 함락 이후 포로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2.2.2. 대프랑스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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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 수산 성채와 카스바 일대

1830년 프랑스가 알제를 정복한 후 알제리 서부는 에미르 압델카데르와 무스타파 형제를 중심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1837년 봄에는 동부의 카빌리 지역 역시 그에 합세하였고, 같은해 5월 8일, 무스타파는 카빌리 동맹군과 함께 알제와 델리스 사이의 레가이아에 있던 프랑스측 농장을 습격하였다. 이에 5월 17일, 프랑스령 알제 총독 당레몽은 수륙 양면의 보복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카빌리 군 역시 25일 레가이아 부근 부두아우의 군사기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프랑스 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 2척의 함대를 델리스에 파견하였고 육군 역시 동진하여 이세르 전투에서 카빌리 군을 격파하였다. 28일 아침 프랑스 함대는 저항 없이 델리스 인근에 상륙한 후 카스바의 집들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이에 현지 유력자들이 항복 협상에 나섰고, 29일 프랑스 함대는 태수 엘 물루드 벤 핫지 알랄과 카디 시디 아흐메드 엘 무프티를 포함한 8인을 인질로 잡아 알제로 귀환하였다. 이어진 협상에서 대표단은 프랑스측 손실을 보상하고 휴전과 인질의 귀환을 대가로 델리스 항구에 프랑스측 상관과 공장의 설립에 합의하였다. 따라서 당시 인구 2천의 작은 어항이던 델리스에서 10개의 건물이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이후 체결된 타프나 조약으로 델리스는 공식적으로 압델 카데르의 영토가 되었고, 후자는 아흐메드 벤 살렘을 태수로 봉하였고, 1839년에는 동부 순행 중 친히 방문하기도 하여 주민들에게 성인들의 무덤에 의지하기 보다는 전투 준비에 나설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의 예언대로 같은해 프랑스 군은 공세를 재개하였다.

1842년까지 델리스 인근 세바우 강 서안을 평정한 프랑스 장군 뷔조는 1844년 4월, 일곱 카빌리 족장들을 소환하여 아흐마드 벤 살렘을 축출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침공하여 일대를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두 차례에 걸쳐 전하였다. 족장들은 주저했지만 여론에 떠밀려 전쟁을 택하였고, 뷔조는 8천 군대와 수륙 양면으로 진군하였다. 폭우로 인해 지연된 행군 끝에 5월 7일 프랑스 군은 델리스에 당도, 별 저항 없이 카스바를 장악하고 해군이 수송한 보급 물자를 지키기 위한 방어 시설을 구축하였다. 3일 후 뷔조 장군은 델리스에 140인의 수비대를 두고 내륙으로 진군, 타우르가 전투에서 카빌리 군을 격파하였다. 아흐메드 벤 살렘은 도주하였고, 21일 7대 카빌리 부족들 중 3개의 복속을 받은 뷔조는 델리스를 거쳐 27일 알제로 개선하였다. 한편 점령 직후 델리스의 대사원은 군사병원으로 개조되었고, 대신 근처에 새로운 사원을 세워 1847년 완공하였다.

프랑스령 알제리 하의 델리스의 카스바 남쪽에는 유럽인 구역이 형성되었고, 일대의 곡물을 알제로 운송하였다. 하지만 카빌리의 저항은 이후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1871년 셰이크 모크라니의 동부 알제리 반란 당시 델리스 주변의 베니 토우르와 베니 술라임 등이 동참하여 4월 22일 도시를 포위하였다. 프랑스 주둔군은 주변을 지나던 전함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고, 5월 18일 서쪽으로부터 랄레망의 원군이 당도하여 포위는 풀렸다. 반란을 진압한 후 프랑스 당국은 시디 다우드, 바길라 등 델리스 인근 농지를 몰수하여 프랑스 이주민들에게 주었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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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델리스에는 티지우주와 도로가 개통하였고, 1881년의 등대 설립을 거쳐 1925년에는 근대적인 항구가 세워졌다. 다만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에는 프랑스 당국의 고문 수용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독립 후에는 2003년 5월 지진을 겪어 카스바 등 도심 상당부가 파괴되었고, 2007년 0월 알카에다에는 항구의 해군 병영에 대한 마그렙 지부의 자살 차량 폭탄 테러로 30여명이 사망하였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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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에서 우로 각각 2004년, 2010년, 1881년에 세워진 등대. 각각 15, 28, 29m 높이를 자랑한다

3.1. 벤구트 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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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카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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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럽인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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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스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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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세기부터 사라고사 일대를 통치하던 투지브 왕가의 방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