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01:23:54

덕수궁 생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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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생양문
德壽宮 生陽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건축시기 1896년 (창건) / 2019년 (복원)
파일:덕수궁 생양문.png
<colbgcolor=#e3ba62> 생양문

1. 개요2. 역사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북쪽 궁문이다. 영국공사관(현재 주한영국대사관)과 마주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다가, 2019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2.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이었다. 그러다 1896년( 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1]

이 때 생양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 9월 17일[2]에 윤정구를 생양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 #

1906년( 광무 10년) 7월에 있었던 황태자비 초간택과 # 1907년(광무 11년) 3월에 있었던 영친왕 부인 초간택 때 궁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쓰였다. #

일제강점기 즈음에 헐린 듯 하나 철거 시기는 모른다. 2019년에 복원되었다.

[1]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 음력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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