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모토 다카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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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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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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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수상자 없음 | → |
니시모토 다카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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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벳푸 마나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9~198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호리우치 츠네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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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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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 마스미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9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키타벳푸 마나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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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 주니치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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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사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9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 |
1989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짐 라이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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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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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오 오사무 ( 세이부 라이온즈) |
보유 기록(NPB) | |
최다 골든글러브 투수부문 수상 | 8회 |
일본시리즈 최다 피안타 완봉 | 1981년 일본시리즈 5차전, 13피안타 완봉승 |
니시모토 다카시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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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8번}}} | ||||
오타케 켄지 (1970~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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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75~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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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노부유시 (1978~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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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6번}}} | |||||
나카지마 토시유키 (1975~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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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77~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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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타니 류지로 (1989~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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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25번}}} | |||||
토요다 세스케 (1979~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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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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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하시 코쥬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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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24번}}} | |||||
니시무라 히데츠구 (1988~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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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90~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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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히데키 (1993~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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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블루웨이브 등번호 52번 | |||||
타카하시 사토시 (1985~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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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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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발러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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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90번}}} | |||||
우치다 히로타카 (1991~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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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19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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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무라 켄이치로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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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71번 | |||||
야마와키 코지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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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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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니시 키요오키 (2004~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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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71번}}} | |||||
다이타 타케노리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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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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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모토 토시히데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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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81번}}} | |||||
나리모토 토시히데 (2008~2010) |
→ |
니시모토 다카시 (2011) |
→ |
나리모토 토시히데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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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71번}}} | |||||
나리모토 토시히데 (2011) |
→ |
니시모토 다카시 (2012) |
→ | 야마시타 노리히토(2014~2017) | |
{{{#fff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72번}}} | |||||
야마다 가츠히코 (2011~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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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다카시 (2013~2014) |
→ |
히라이 마사후미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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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87번}}} | |||||
강석천 (2005~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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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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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국 (2016~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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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타카시 [ruby(西本, ruby=にしもと)] [ruby(聖, ruby=たかし)] | Takashi Nishim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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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6년 6월 27일 ([age(1956-06-27)]세) |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에히메현립 마츠야마 상업 고교 (에히메) |
신체 | 176cm, 81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74년 드래프트 번외 입단 ( 요미우리)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5~1988) 주니치 드래곤즈 (1989~1992)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3)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4)[2] |
지도자 |
한신 타이거스 불펜코치 (2003) 치바 롯데 마린즈 투수 겸 배터리 치프코치 (2010)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투수코치 (2011) 치바 롯데 마린즈 투수코치 (2012) 오릭스 버팔로즈 1군 투수코치 (2013) 오릭스 버팔로즈 2군 육성 치프코치 (201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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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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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활약한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야구 지도자.
드래프트외 입단으로 입단한 투수로서는 최다인 통산 165승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에가와 스구루와 함께 팀의 에이스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70~80년대를 풍미한 투수였다. 왼발을 거의 머리 끝까지 뻗어올리는 역동적인 투구폼을 지니면서 역회전공인 슈트를 주무기로 했던 땅볼 투수로, 전성기에는 사와무라상을 받을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NPB 투수로서는 최다 기록 타이인 8개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3]로 발군의 수비력을 갖추었다.
은퇴 이후에는 해설자로 일을 하다가, 한신 타이거스, 치바 롯데 마린즈,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 이후 2015년에는 KBO의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도 부임하였다.
2. 선수 경력
2.1. 학창 시절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고고시마초에서 태어난 니시모토는 집안이 유복하지는 못해, 고시엔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형 니시모토 아키카즈가 와세다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6년 드래프트 2라운더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였다. 프로 선수로 가계를 지탱하며 다카시에게 히로시마에서 야구를 시키고 싶어했던 형과는 달리, 아버지는 고향인 에히메에서 야구를 하길 희망해 다카시는 마츠야마상고에 입학한다.[4]
그러나 다카시는 형 아키카즈와는 달리 고시엔 본선엔 결국 진출하지 못했는데, 모두 에히메현 예선에서 탈락했다.[5] 특히 니시모토에게 3학년(1974년) 예선은 더욱 각별했는데, 정월 당시 귀성하여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에게 술을 끊게 하려고 "내가 야구하는 걸 보러 올거면, 술 좀 마시지 마라!"라고 일갈한 뒤, 반드시 고시엔에 진출하겠다고 결심하고 훈련 이후 러닝으로 통학을 하는 등 악을 갖춘 상태로 임하기 시작했고, 2회전에선 비록 콜드게임이었지만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고시엔 본선 진출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8강에서 테이쿄제5고교에게 일격을 당하며 1:0 패배. 경기 과정은 더 안타까웠는데, 경기 내내 마츠야마상고가 테이쿄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며 찬스를 여러번 만들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던 상황에, 경기 중반 테이쿄의 선두타자가 2루 강습타로 출루한 이후, 2루 도루와 보내기 번트로 1사 3루의 상황. 스퀴즈 등에 대비하기 위해 내야가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니시모토는 슈트로 유격수 땅볼을 유도해냈다. 유격수가 3루 주자를 묶어놓고 1루로 송구를 했는데...
3루 주자가 뛰기 시작했다. 1루수가 공을 잡자 마자 홈으로 송구를 해서 타이밍은 아웃. 하지만 송구가 위로 떠버리며 포수가 주자 터치에 실패했다. 3루 주자의 영리한 주루플레이로 귀중한 1점을 따낸 테이쿄에게 마츠모토상고는 결국 점수를 내지 못하며 패배했고 팀의 에이스였던 니시모토는 마츠야마 시영구장에서 대성통곡하며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대회를 마쳐야 했다. 훗날 니시모토 본인은 이 눈물이 자신을 바꾸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이후 요미우리의 눈에 든 니시모토는 1974년 드래프트 번외 입단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입단 첫해엔 1군에 등판하지 못하고 배팅볼 투수로도 뛰는 등 많은 고생을 했지만 2군에서 노력을 거듭한 끝에 1976년 한신전에서 첫 1군 등판을 하게 되었는데, 8회 말에 등판하여 첫 상대 타자였던 마이크 라인백에게 바로 홈런을 맞는 등 한신 타선에 연타를 허용하며 1이닝 3실점으로 달갑지 않은 신고식을 치렀다. 1군에선 이 1경기에만 등판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2군에선 이스턴리그 최다승을 거뒀다.
다음해인 1977년에는 56경기에 등판하여 118이닝 8승 5패 4세이브 ERA 2.67의 성적을 기록하며 1군에 정착했고, 같은 해 신인왕 후보에도 올랐으나 141.1이닝 8승 9패 ERA 4.39로 규정이닝을 채운 타이요 훼일즈의 사이토 아키오에게 밀려 수상엔 실패했다.
차츰차츰 선발 등판 기회를 늘려가던 중 1979년, 드래프트 사건으로 일본을 뒤흔든 에가와 스구루가 입단해 함께 에이스로서 요미우리의 한 시대를 지탱해 가게 된다. 니시모토는 이 해 153이닝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규정 이닝을 돌파했고, 방어율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히라마츠 마사지의 뒤를 이어 2.76으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 흑역사라고도 볼 수 있는 해프닝도 겪었는데, 8월 1일에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당시 연속출장 기록을 이어가던 키누가사 사치오에게 몸에 맞는 공을 연이어 던지는 바람에 결국 키누가사가 왼쪽 어깨뼈 골절을 당해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며 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결국 니시모토 자신도 이 일로 투구 컨디션이 흔들려 결국 후반부에 연달아 점수를 내주며 6.2이닝 5실점으로 부진했고 팀도 7-1로 크게 앞서던 경기를 8-8 무승부로 마무리짓고 말았다. 니시모토는 훗날 그날 밤 숙소에서 나가시마 감독에게 거의 20발의 왕복 싸대기를 맞았다고 밝혔다.[6]
이후 1980년부터 전성기에 돌해 1980년부터 1985년까지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였다. 특히 1981년은 니시모토 본인으로서도, 그리고 일본 야구계로서도 잊지 못할 해가 되었는데, 18승을 거두면서 요미우리 시절 최다승을 기록하고[7] 일본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가치를 드높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사와무라 상의 선정 위원들과 기준이 대거 바뀌는 등의 일이 있었다.
1981년 시즌은 시작부터 다사다난했는데, 스프링캠프 도중 자신의 집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부인이 중상을 입었고 사고의 뒤처리 등으로 정신이 없던 탓에 에가와 스구루가 개막전 투수를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니시모토는 역경이 있을 때 강하다며 개막 투수로 니시모토를 지명했고, 니시모토는 후지타의 기대에 보답하듯 개막전에서 1실점 완투를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때 경기가 끝난 뒤 니시모토는 위닝볼을 들고 병원으로 가 부인을 간호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1981년 시즌에 니시모토는 34경기 14완투 257.2이닝 18승 12패 126탈삼진 ERA 2.58이라는 성적을 올리며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 중 한 명으로 맹활약을 했고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고, 이런 활약에 힘입어 1981년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사와무라상 수상은 상술했다시피 논란이 거셌는데, 우선 니시모토는 이닝 수를 제외하면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1981년에 아무런 타이틀도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니시모토가 좋은 기록을 세운 다승, 승률, 방어율, 탈삼진, 완봉 부문 1위는 운명의 장난인지 팀 동료인 에가와 스구루였는데, 에가와의 성적은 20승 6패 221탈삼진 방어율 2.29로써 이 해 투수 부문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하였고 심지어 시즌 MVP까지 수상한 이견의 여지가 없는 그 해의 원탑 투수였는데도 에가와가 아닌 니시모토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게 된 것.
이것은 당시의 사와무라상이 기자투표로 받게 되는 상이었다는 점이 큰데, 요미우리행을 고집한 나머지 드래프트 제도의 헛점을 악용해 요미우리로 들어간 입단 과정과 그 이후의 발언 등으로 밉상이 제대로 박혀버린 에가와를 미워한 기자들이 성실하고 이미지도 좋은 니시모토에게 표를 몰아줘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니시모토의 성적도 충분히 대단한 성적이고 부인이 중상을 당하는 사고를 겪으면서도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기에 다른 시즌이었다면 받을만할 자격이 있는 성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가와를 제쳐놓고 사와무라상을 받기에는 무리였던 성적이었기에 사와무라상의 선정주체를 OB투수 위원회로 바꾸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8][9] 니시모토 본인에게도 수상 자격에 대한 논란이 생긴 것은 물론 팀메이트들에게서 수상을 축하받은 건 입단 동기였던 사다오카 쇼지 단 1명에 그치는 등[10],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남긴 수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소동 끝에 맞이한 1981년 일본시리즈는 같은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연고 구장으로 하는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일본시리즈 역사상 유일한 더그아웃 시리즈였다. 1차전에 선발 등판한 에가와가 6이닝 4실점으로 부진하면서 1차전을 패한 뒤 2차전에서 니시모토가 선발로 등판했는데, 니시모토는 1회에 솔로홈런을 하나 내줬지만 그 이후엔 피안타를 1개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줬고, 팀도 니시모토의 호투에 역전으로 보답하며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그리고 5차전이 우천취소로 하루 연기되며 4일 휴식을 취한 후 등판하게 된 5차전에서 닛폰햄이 13안타를 몰아쳤지만 매 회마다 꾸역꾸역 위기를 넘겨 가면서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다 피안타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후 6차전을 요미우리가 승리하여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고, 니시모토는 2시합 18이닝, 2승 0패 평균자책점 0.50의 뛰어난 기록으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 1982년과 1983년 나란히 15승을 거두며 1983년에 다시 한 번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이번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3승 4패로 석패하며 일본시리즈 우승엔 실패했다. 니시모토는 2차전과 5차전에 등판해 각각 4피안타 완봉승과 1자책 완투승을 거두며 시리즈를 끝까지 끌고 갔으며 6차전에는 완투 이후 하루 휴식 후 구원등판까지 했지만 실점을 내주며 강판되었다.[11][12] 그리고 7차전까지 선발로 등판하며 6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으나, 니시모토가 완전히 힘이 빠진 7회 세이부 타자들이 니시모토를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3실점으로 역전을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이후 요미우리가 역전에 실패하며 세이부가 우승을 차지했고, 니시모토는 4경기 26이닝, 2승 1패 평균자책점 2.08의 성적으로 패전팀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시상하는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4년과 1985년에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는 등 에이스 투수로써의 활약을 계속 보여줬지만, 1986년에 22경기 7승 8패 104이닝으로 성적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당시 투수코치였던 미나가와 무츠오[13]와 불화가 생겼다. 미나가와는 요미우리에서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 쿠와타 마스미 쓰리펀치를 구축하는 성과를 보인 훌륭한 투수코치였지만, 이 과정에서 니시모토를 비롯한 고참 투수들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니시모토 본인도 이 시기부터 성적 부진을 겪게 되면서 등판 기회가 줄어들었고 이로 인한 기용 문제로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 이 때문에 구단에서는 합석 골프를 주선하는 등 양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누가 봐도 억지로 시킨 것인데다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지라 골프 중에 서로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 등 어색한 모습만 보여줬고, 역으로 언론으로부터 보여주기식 화해쇼를 벌인다는 악평만 받게 되었다.
1987년엔 롯데 오리온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해 온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센트럴리그 첫 맞상대가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니시모토는 오치아이에게 전 타석에서 모두 슈트만 던져 중전 안타 1개만 내준 채 4피안타 완봉승을 거뒀고, 경기가 끝난 뒤 " 퍼시픽리그에선 3관왕이라지만 이곳은 센트럴리그, 퍼시픽리그와는 다르다!"고 말하며 센트럴리그 투수로써의 자부심을 보여줬다. 당시 주니치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는 니시모토의 투구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언젠가 니시모토를 영입하기로 결심했고, 2년 후에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1987년엔 라이벌 에가와가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고 본인도 조금 반등하긴 했지만 26시합 130이닝 8승 8패 평균자책점 3.67이라는, 여전히 에이스라기에는 모자란 성적에 그쳤다. 다음해인 1988년엔 4승에 머무르며 팀 내 입지가 더욱 줄어들었고, 시즌 종료 후인 12월 5일에 나카오 타카요시와의 트레이드로 카모가와 시게하루와 함께 주니치로 이적하게 되며 길었던 요미우리 생활을 마무리짓게 된다.[14]
2.3. 주니치 드래곤즈 이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니시모토는 " 호시노 감독님의 통산 146승을 뛰어넘고 싶다. 나의 통산 승수(당시 126승)와 20승 가량 차이가 나는데, 올해 20승을 거둬 그 차이를 없애 보이겠다."라는 포부와 함께 1989시즌에 돌입했고, 이 해 30경기 246.2이닝 20승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하여 부활에 성공함과 동시에 개인 첫 타이틀인 다승왕을 기록[15], 4년 만에 다시 한번 8번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완벽한 언행일치를 보여줬다.
다음 해인 1990시즌에도 25시합 174.1이닝 11승 9패 평균자책점 3.25를 기록하며 통산 150승을 달성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1991년 허리 디스크로 6시합 39.2이닝 등판에 그쳤다. 수술을 받고 재차 1992년에 복귀했으나 본인의 노쇠화와 팀의 성적 침체까지 겹치며 16경기 1승 11패 ERA 4.88라는 극악의 승패를 기록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주니치에서 방출되었다.
주니치에서 방출된 후 이듬해인 1993년에 요미우리 시절 팀 선배였던 도이 쇼죠의 제안을 받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했고, 오릭스에선 13경기 65.1이닝 5승 5패 평균자책점 4.41를 기록하며 땜빵 선발급으로 어느 정도 뛰어줬으나 시즌 후 재계약이 결렬되어 팀을 나왔다. 이후 1994년에 데뷔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테스트를 거쳐 돌아왔으나, 이번엔 팀 대선배인 호리우치 츠네오 투수코치가 니시모토의 복귀를 맹렬히 반대했고 결국 시범경기에서 1차례 등판한 걸 제외하면 1군에서 기회를 받지 못한 채 2군에서만 머무르다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요미우리 측에선 그래도 7, 80년대를 빛내준 에이스를 위해 은퇴식을 치러주려 했으나, 하필이면 1994년에 순위 싸움이 워낙 치열한 나머지 최종전에서 리그 우승을 가릴 지경이었기에 결국 시즌 도중에 은퇴시합을 치르지 못했고 이듬해인 1995년 1월에 입단 동기였던 사다오카 쇼지[16]와 팀을 나눠 자신이 신인 시절 2군에서 실력을 키워온 타마가와 그라운드에서 은퇴시합을 개최하게 되었다. 은퇴 시합엔 니시모토가 뛰었던 요미우리, 주니치, 오릭스에서 함께 한 선수들이 모두 모여 경기를 치렀고,[17] 니시모토를 데려온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18]도 시구자로 나선 것은 물론 대타로 출전하여 니시모토의 마지막을 빛내주었다.
3. 플레이 스타일
현역시절의 투구 모습.
このシュートは天下一品のシュートだ。これだけで勝てる。
이 슈트는 천하일품의 슈트다. 이것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
ㅡ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니시모토의 슈트를 처음 보며
니시모토는 일본에서 역회전공을 칭하는 슈트[19]의 달인으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당시의 영상을 보면 비록 시대가 시대인지라 구속은 느리지만 무브먼트만큼은 매우 뛰어난 모습을 확인할수 있다. 또한 스윙 궤적을 벗어나는 투구에 능한
땅볼 투수였다. 초기에는 투심과 포심에 드물게 커브 정도를 던졌지만 구위가 떨어진 말년에는 투심이나 커브 말고도 슬라이더나 싱커 등 변화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젊은 시절 이상으로 땅볼을 유도하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이 슈트는 천하일품의 슈트다. 이것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
ㅡ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니시모토의 슈트를 처음 보며
격렬한 하이키킹 투구폼에도 불구하고 간결한 연결동작을 바탕으로 뛰어난 수비력을 갖추었다. 통산 센트럴리그 투수 골든 글러브를 8회 수상했으며 이는 요미우리 후배 쿠와타 마스미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포지션 최다 수상이다. 땅볼 투수였던 니시모토에게 있어 이러한 수비력은 그만큼 타구 처리에도 출중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투구 성적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코치로 한신 타이거즈를 포함한 여러 팀을 지도하였다. 한신의 2003년 센트럴 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나, 시즌 이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팀을 떠나며 같이 떠났고,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도 세스 그레이싱어와 같은 투수들을 지도해 선수들에게서 좋은 평을 얻었다. 오릭스에서도 최하위던 평균자책점을 리그 1위로 끌어올리는 등 좋은 지도력을 보여주었지만 2014년 역시 팀을 떠났다. 2015년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를 맡았고 시즌 종료 후 계약 연장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20]4.1. 한화 투수코치 시절
2015 시즌 한화 경기를 보면 정말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니시모토 투수코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다. 약간 다리를 절룩이며 마운드로 올라가는데,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올라가는 상황이 보통 수비팀에게 좋을 리가 없어서 이래저래 고생하고 있다. 2015년 8월에는 배영수에게 경기 전 불펜대기를 알리면서 다독이는 장면도 기사로 나왔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과는 사뭇 다른 야구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9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한 토막.
144경기를 치러야 하지 않나. 캐치볼을 많이 하면 결국 어깨에 피로가 쌓인다. 일본에서 한신, 치바 롯데, 오릭스 등에서 코치를 했다. 일본에서도 투수 어깨에 피로가 축적되는 걸 가장 꺼린다. 투수는 캐치볼 뿐만 아니라 불펜 피칭도 해야 한다. 특히 매일 등판하는 구원 투수는 투구 개수 관리가 중요하다. 베스트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올라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144경기를 치르는 스케줄이다. 캐치볼로 지친 근육을 3시간 뒤 불펜 피칭에서 다시 깨우는 건 피로가 쌓이는 일이다. 피로 축적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불필요한 훈련은 제외해야 한다.
2015년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건강 문제로 수술을 할 예정이었다고. 그런데 열혈 한화 팬으로 알려진 OSEN 이상학 기자의 관련 기사에 김성근 감독과 투수 운용을 두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21]
일본으로 돌아간뒤 본인의 1년간의 경험담을 문예춘추에 연재하였다. 인터넷에는 전문이 다 올라와 있지 않고 잡지분을 번역한 글이 웹에 있다. 한글 번역본 여기서는 김성근 감독의 투수 운용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야구친구 서영원 기자에 따르면, 한국 음식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5. 기타
과거 한국 언론에서 김명해(金明海)라는 이름의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지만, # 오보였으며 실제로는 순수 일본인이다. #쇼가쿠칸의 빅 코믹 스페리얼에서 니시모토와 그의 평생의 친구, 라이벌인 에가와 스구루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에가와와 니시모토(江川と西本)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연재되기도 했다. 작가는 모리타카 유지(스토리, 그라제니 원작자)/호시노 야스시(작화, 마작의 제왕 테쯔야 작화 담당). 그만큼 쿄진의 에이스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
6. 관련 문서
[1]
실제 이 번호를 달고 출장은 한 경기도 하지 못했다.
[2]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요미우리에 복귀했지만, 공식전은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3]
팀 후배인
쿠와타 마스미와 타이
[4]
사진은 마츠야마상고 3학년 시절 에히메현 예선 8강에서 패배한 모습을 찍은 것이다. 가운데가 니시모토.
[5]
1학년 당시에는 4강, 2학년과 3학년에는 8강에서 탈락했다.
[6]
이때
키누가사 사치오의 인성이 드러났는데,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자 사과하러 온 니시모토에게 "지금은 위험하니까 벤치로 들어가 있어"라며 오히려 그를 걱정해주었고, 경기 후 전화로 다치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자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라. 그것보다도 오늘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쳤으니, 네 손해가 크다"고 니시모토를 위로해주었으며, 심지어 부상을 당한 상태로 다음 경기에 대타로 출전해
에가와 스구루에게 삼진을 당했지만 기록을 이어가며 인터뷰에서 "첫 번째 공은 팬들을 위해서, 두 번째 공은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 공은 니시모토에게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휘둘렀다"라고 말하며 크나큰 감동을 주었고 니시모토는 이런 키누가사의 말들에 정말 감격했다고 한다.
[7]
본인 프로인생에서의 최다승은 주니치 시절인 1989년의 20승이다. 다승왕 타이틀도 이때 획득했다.
[8]
이 일로 에가와에 대한 동정심이 많이 모이면서 에가와는 드래프트 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사실상 모든 야구 팬들을 적으로 돌린 선수에서 그 이미지 때문에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도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이미지가 바뀌며 CF 계약 등을 따냈다.
[9]
하지만 결국 에가와는 사와무라상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전년도인 1980년에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으나 이 해엔 아예 사와무라상을 선정하지 않았고, 1982년에도 사와무라상의 7개 기준을 전부 충족하는 괴물같은 시즌을 보냈지만, 해당 시즌의 사와무라상은 역시 7개 기준을 모두 충족한 히로시마의
키타벳푸 마나부가 수상하면서 끝내 에가와는 은퇴할 때까지 단 1번도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10]
이것은 요미우리 시절 연습에만 치중하며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것도 컸다. 당시 언론에서도 고독한
늑대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었을 정도.
[11]
2시합 연속 완봉승은 일본시리즈 타이 기록이다.
[12]
5차전의 1자책은
타부치 코이치에게 허용한 홈런이었는데, 이 홈런을 맞기 전까지 2번의 완봉승으로 니시모토는 일본시리즈 2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이 때의 홈런은 니시모토를 공략하기 위해 타부치의 야구 인생 중 처음으로 방망이를 짧게 잡고 친 홈런으로, 타부치는 훗날 이에 대해 "니시모토를 공략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고 회고했다.
[13]
난카이 호크스에서
스기우라 타다시와 원투펀치를 이루며 통산 221승을 기록했고, 1968년엔 일본프로야구 사상 현재까지 최후의 단일시즌 30승을 기록한 언더핸드 투수였다. 은퇴 후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하며 실력파 투수들을 여러 육성했다. 2005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14]
같은 해 미나가와 무츠오도 코치직에서 해임되었다.
[15]
다승왕은
사이토 마사키와 공동 수상.
[16]
카고시마 실업 고등학교 시절 2년 연속
코시엔에 출전하며 고교야구 팬들의 인기를 끌었던 에이스 투수로 드래프트 번외로 입단한 니시모토와는 달리 요미우리가 직접 드래프트에서 1위로 지명할 만큼 많은 기대를 받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비교적 빨리 1군에 정착했던 니시모토와 달리 사다모토는 1군에서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하다 데뷔 6년차인 1980년에야 비로소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고, 이후 2년 연속 10승 및 1982년 15승을 거두며 팀내 에이스로 자리잡는 듯 했으나 데뷔 초창기부터 앓던
요통이 악화되어 성적이 악화되다가 결국 불펜으로 강등된 1985년 시즌 종료 후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 통보를 받았으나 본인이 이를 거절한 채
임의은퇴를 선택하면서 결국 29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 커리어를 마감했다. 은퇴 후엔 탤런트 및 야구해설가, 지도자로 활동 중.
[17]
니시모토 팀에 속한 선수론
쿠와타 마스미,
야마모토 마사 등이 있었다.
[18]
니시모토가 요미우리에 입단한 1975년에 막 정식 감독이 되어 1980년까지 니시모토와 함께 선수와 감독으로 뛰었고, 이후 1993년부터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19]
투심 패스트볼, 싱커의 재플리시.
[20]
건강상 문제로 수술, 이후 해설자를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
[21]
이때
고양 원더스 시절부터 함께한
쇼다 코우조 코치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인 코치 4명도 함께 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