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카부다라항 کبودراهنگ |
라잔 رزن |
파메닌 فامنين |
아사다바드 اسدآباد |
바하르 بهار |
하마단 همدان |
|
나하반드 نهاوند |
투이세르칸 تويسركان |
말라예르 ملایر |
}}}}}} |
1. 개요
페르시아어 :نهاوند영어 : Nahavand / Nahawand / Nihavend
이란 중서부 하마단 주의 도시. 하마단에서 남쪽으로 60km, 호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70km, 케르만샤에서 동쪽으로 90km 떨어져 있다. 자그로스 산맥 동부의 분지에 입지하였고, 인구는 약 80만명으로 대부분 쿠르드인이다. 니하반드, 니하완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도시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이라크)와 중부 이란 간의 주요 교통로 상에 위치한 덕에 고대부터 주목을 받았다.
2. 역사
아케메네스 제국의 샤한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정식으로 도시가 세워졌고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에는 '메디아의 라오디케아'로 지칭되었다. 파르티아 시기에는 후일의 아르타바누스 1세가 왕자 시절 나하반드를 영지로 다스렸다. 사산 제국 시절 7대 귀족 가문들 중 하나인 카렌 가문이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던 642년, 이란을 침공한 이슬람 제국군이 이곳에서 사산 제국군을 격파하며 이란의 이슬람화를 운명지었다. ( 나하반드 전투)[1] 다만 2년 후 나하반드 출신 페르시아 기독교인 피루즈가 칼리파 우마르를 암살하며 복수하였다. 한세기 후 3차 피트나 때에는 2차례에 걸친 끝에 압바스 혁명군이 우마이야 군을 격파하고 이라크로 진격, 압바스 왕조를 세우는 등 나하반드의 중요성은 이어졌다. 10세기의 아랍 여행가 아부 둘라프는 나하반드를 지나며 고대 페르시아의 유구가 즐비한 번영하는 도시라고 묘사하였다. 1092년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가 인근에서 암살당하였다.몽골의 파괴를 피한 도시는 14세기에도 과일 및 목화 등을 생산하는 농경지에 둘러싸인 중소도시로 유지되었고, 주민들은 열두이맘파 쉬아를 신봉하는 쿠르드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1590년대 사파비 제국의 쇠퇴를 틈타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 추후 원정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성채를 세웠다. 그러나 1602년 주민들의 반란으로 사파비 조의 지배가 회복되었고, 하마단 총독 하산 칸 우스타즐루는 성채를 파괴하였다. 1722년 오스만 제국은 재차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1730년 나디르 샤에게 축출되었다. 18세기 중반, 나디르 샤의 사후 나하반드는 루르 계열의 바크티아리 부족의 약탈에 시달렸다. 그러던 1752년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그 부족장 알리 마르단 칸을 부근에서 격파하며 안정이 회복되었다. 18세기 무렵 재건된 나하반드 성채는 19세기 중반 공사 도중 보물이 발견된 것에 고무된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앗 딘 샤에 의해 탐사를 위해 허물어졌다. 다만 더이상의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