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1:13:35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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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中臣 鎌子連)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 鎌足)

614년 ~ 669년 10월 16일

1. 개요2. 행적3. 명칭4. 가족관계5. 여담6. 백제인 설7. 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아스카 시대의 인물.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 중신 겸족)'라는 이름으로 가장 유명하며 나카토미 카마코노무라지(中臣 鎌子蓮)[1]라고도 한다.

을사의 변에 참여하여 헤이안 시대의 막강한 세도 귀족이었던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기에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 鎌足)'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는 후지와라씨를 생전에는 칭한 적 없고 사후에 덴지 덴노가 하사한 것이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표제어가 藤原鎌足로 등록되어 있다.

2. 행적

나카토미씨는 대대로 야마토 왕권 조정에서 섬긴 신들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신관 씨족으로 아메노코야네노미코토(天児屋根命)[2]라는 신의 후예로 여겨졌다. 아메노코야네노미코토는 불교에 편입된 뒤에는 카스가노카미(春日神)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카스가 묘진(春日明神) 또는 카스가권현(春日権現)이라고도 불렸다. 나라현에 있는 카스가대사(春日大社)가 카스가노카미를 모시는 신사로 바로 옆에 후지와라씨의 우지데라(氏寺, 씨족 사찰)였던 고후쿠지(興福寺)와 황실에서 세운 도다이지가 위치해 있다.

아버지 나카토미노 미카코(中臣御食子)는 쇼토쿠칸(小德冠)으로서 스이코 천황 사후 소가노 에미시 아베노 우치마로(阿倍内麻呂)와 함께 다무라노 미코(田村皇子)를 조메이 덴노로 추대했으며, 생전에 신지백(神祇伯)이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관직에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기재한 기록은 없지만 고쿄쿠 덴노 3년(644년) 아들 카마타리가 신지백에 취임하는 것을 사퇴한 것으로 보아 미카코도 생전에 그러한 관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카마타리가 히타치 국(常陸國)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카시마 신궁의 신관(神官)으로서 동쪽으로 부임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등씨가전》(藤氏家傳)에 의하면 카마타리는 야마토 국 다케치노고오리(高市郡)의 후지와라(藤原)(지금의 나라현 가시하라 시)에서 태어났으며, 후지와라라는 성씨도 그가 태어난 곳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했는데, 헤이안 시대 후기에 성립된 《오카가미》(大鏡)에는 오하라(大原)(지금의 나라현 아스카무라) 또는 히타치의 가시마(鹿島)(지금의 이바라키현 가시마시)라는 설도 전하고 있다.

그가 중국의 병법서인 《 육도》(六稻)를 암기하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으나 기록은 확실치 않다.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아래에서 소가노 이루카와 함께 유학을 배웠으며, 고교쿠(皇極) 3년(644년)에 나카토미 집안의 가업이었던 신지백을 맡으라는 요구를 사양하고( 일본서기) 셋쓰 국(攝津國)의 미시마(三島)에 있던 별저로 내려갔다. 《등씨가전》에는 오카모토노 스메라미코토(崗本天皇, 조메이 덴노)가 즉위한 때(629년)로 되어 있지만 《 일본서기》, 《등씨가전》 모두가 잘못 기록해서 노치노오카모토노 스메라미코토(後崗本天皇, 고쿄쿠 덴노)가 즉위한 때(642년)로 적었다는 설도 있다.

백제에서 처음 불교가 전해졌을 때, 비슷하게 국수파였던 모노노베씨의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 尾輿)와 함께 "우리 야마토 왕권이 대대로 섬겨온 천지사직의 180국신을 버리고 이제 와서 번신(번방의 신 즉 부처)을 섬겼다간 국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며 불교 도입을 반대하였다. 이에 카마타리는 644년 1월 1일 카무츠카사노카미(神祇伯)에 임명되었지만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에는 미시마에 거주했다. 그 당시의 덴노였던 고교쿠 덴노의 동생인 카루 황자와 이전부터 친해 그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자 이에 감격했다. 사람됨이 충성스러우면서 바르고 어지러운 것을 바르게 할 마음이 있었는데, 권신 소가노 이루카가 전횡을 일삼자 이에 분개해 황족들에게 접촉해 모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고교쿠 덴노의 아들인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접촉하려 했지만 그와는 소원했기에 마음 속의 생각을 토로할 기회가 없다가 호코지(法興寺)의 느티나무 밑에서 타국(打毱) 경기를 할 때 그 일행으로 참가하면서 나카노오에 황자의 가죽신이 제기공과 함께 벗겨져 땅에 떨어지자 이를 주워 두 손으로 들고 나아가 공손하게 바쳤다. 그러자 나카노오에 황자도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받았으며 이 일로 서로 친해져 마음 속의 뜻을 이야기했고[3] 두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의심할 것을 우려해 서책을 들고 미나부치노 쇼안(南淵 請安) 밑에서 함께 수학했다.

나카노오에 황자와 비밀리에 계획을 세워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변의 협조자를 얻기 위해 카마타리는 이루카의 사촌이지만 반대파였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 石川麻呂)의 장녀와 나카노오에 황자가 혼인을 맺고, 그 뒤에 사정을 밝혀 함께 일을 도모하자며 스스로 중매인이 되었다. 이시카와마로는 장녀를 맺어주려 했지만 약속한 밤에 일족에게 장녀를 빼앗겨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차녀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蘇我 遠智娘)가 자신이 있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자 기뻐하며 차녀를 맺어주었다. 그리고 카마타리는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타(葛城稚犬養連 網田) 등을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천거했다.

645년 6월 12일 마침내 나카노오에 황자를 비롯한 협조자들과 함께 을사의 변을 일으킨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고교쿠 덴노는 갑작스러운 정변에 화가 나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양위하고 퇴위하려 했으나 카마타리는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형인 후루히토노오에 황자(古人大兄 皇子)가 있고, 숙부인 카루 황자가 있는 상황에서 형을 제치고 황위에 오르면 아우가 형에게 공손해야 하는 마음에 어긋난다고 해 숙부인 카루 황자에게 양보하도록 진언했으며, 이에 카루 황자가 고토쿠 덴노로 즉위하여 나카노오에 황자를 황태자에 임명한다. 카마타리는 내신(內臣)에 임명되어 관사를 다스렸다.

647년 새로 정해진 관위제도하에서 다이킨칸(大錦冠)이 수여되었다. 그 뒤 다이카 개신(646)을 추진하는 나카노오에 황자의 측근으로서 보수파였던 좌대신(左大臣) 아베노 구라다마로(阿部倉梯麻呂), 우대신(右大臣)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와 대립했다. 2년 뒤인 649년 구라다마로와 이시카와마로가 각각 죽고 실각한 뒤 세력을 넓혀, 하쿠치(白稚) 5년(654년)경에는 다이시칸(大紫冠)으로 승격했다.

654년에 대신(大臣)의 직위를 받았고, 식봉에 약간 호를 더해 받았으며, 이후 나카노오에 황자는 덴지 덴노로 즉위한다.

668년 9월 26일, 당시 왜국에 와 있던 신라의 사신 급찬(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을 통해 신라의 대각간(大角干) 김유신에게 배 한 척을 선물하였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

《등씨가전》에는 《오미령》(近江令)의 편찬을 명받았다고 하지만 이를 의문시하는 연구자도 많다.

669년 여름 5월 5일에 덴지 덴노를 따라 야마시나노노(山科野)에 사냥을 나섰고, 이 해에 그의 집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는 병이 났고, 겨울 10월 10일에 덴지 덴노의 문병을 받았으며 16일에 56세로 사망했다.[4] 죽음 직전에 문병하러 찾아온 덴지 덴노에게 「살아서 군국에 보탬된 것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소가노 이루카가 귀신이 되어 사이메이 덴노와 그 주변 사람들을 죽인 것처럼[5] 그에게 벼락이라는 신벌을 내렸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여겼다.

덴지 덴노는 그가 죽자 대직관(大職冠)을 하사하고, 우치노 오오미(內大臣)로 추숭하였으며,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씨를 하사해 이후부터는 후지와라 내대신(藤原 內大臣)으로 부르게 했다. 이 성씨는 자기 차남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이어졌고, 그의 자손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엄밀히 말해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는 후지와라노 후히토다.

3. 명칭

보통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中臣 鎌子連),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 鎌足)의 세 가지 명칭으로 유명하다. 이름을 분석해보자면 나카토미(中臣)는 우지(氏), 무라지(連)는 카바네(姓), 카마타리(鎌足)/카마코(鎌子)가 이름에 해당한다.

일단 이름인 카마타리의 경우 원래 카마코였으나 후에 카마타리로 개명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외에도 원래 이름은 그냥 카마(鎌)이고, 코(子)나 타리(足)는 존칭으로 붙었다는 설이 있다.

카바네의 경우, 보통은 우지의 뒤에 붙으나 이름 뒤에 붙어 표기되는 경우도 많고, 카마코노 무라지의 무라지도 그 경우에 해당한다. 이를 우지 뒤에 붙는 보통의 방식으로 써보면 나카토미노 무라지 카마코(中臣連 鎌子) 혹은 나카토미노 무라지 카마타리(中臣連 鎌足)가 된다.

후지와라(藤原)씨의 경우는 죽은 뒤에 내려진 우지로써 생전에는 사용한 적이 없다. 고대 일본인의 인명에 대해서는 을사의 변 문서 참조.

4. 가족관계

아버지는 나카토미노 미케코, 어머니는 오토모노 지센노 이라스코로서 두 사람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지만, 카마타리의 자를 「둘째 아들」이라는 뜻의 「주로(仲郞)」라고 한 데서 사료에 이름이 빠진 형이 한 명 있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 물론 현대에는 그냥 이들 존재 자체가 조작이거나 양부모라는 설이 주류.
  • 본처 : 카가미노 오키미(鏡王女, ? ~ 683년) - 원래 덴지 덴노가 황자였을 적 비였다.
  • 아내 : 요시코노 이라스메(車持与志古娘)
    • 장남 : 조에(定惠, 644년~665년) - 승려로서 출가. 속명(俗名)은 나카토미노 마히토(中臣眞人).
  • 생모불명
    • 차남 :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 659년~720년) - 《손피빈먀쿠》(尊卑分脈)에는 요시코노 이라쓰메, 《고후쿠지 연기》(興福寺縁起)에는 카가미노 오키미 소생으로 되어 있다.
    • 딸: 히카미노 이라스메(氷上娘, ?~682년) - 《일본서기》 <덴무키>(天武紀)에 의해 다른 자매인 이오에노 이라쓰메(五百重娘)보다 언니임이 밝혀져 있다. 덴무 덴노의 부인으로 다지마노 히메미코(但馬皇女)를 낳음
    • 딸: 이오에노 이라스메五百重娘 - 덴무 덴노의 부인으로 황자 니이타베 친왕(新田部親王)의 어머니이며, 후에 이복형제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재가해 막내 아들인 후지와라노 마로(藤原麻呂)를 낳는다.
    • 딸: 미미모토지(耳面刀自) - 고분 덴노의 부인으로 이치시히메노 오키미(壹志姫王)를 낳음
    • 딸: 도메노 이라스메(斗売娘) - 나카토미노 오미마로(中臣意美麻呂)의 부인으로 나카토미노 아즈마히토(中臣東人)를 낳음

5. 여담

한국사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도다이지 쇼소인 소장 유물로 백제에서 제작된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은 원래 백제 의자왕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고 하며 《 일본서기》에는 668년 고구려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직후에 카마타리가 왜국에 온 신라의 사신 김동엄을 통해 문무왕 김유신에게 배 한 척씩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카마타리가 살았던 시대는 고교쿠/사이메이 덴노, 고토쿠 덴노, 덴지 덴노의 3대에 걸쳐 그야말로 열성적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와 관련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후지와라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인 《등씨가전(藤氏家傳)》에는 카마타리의 행적에 대해 나열했는데 재미있게도 천황이 당대의 호걸이라 일컬어진 대당 위징, 고려 개금, 백제 선중, 신라의 짐순(鴆淳)[6]과 견주는 대목이 있다.

또 후에 덴무 덴노가 되는 오아마 황자(大海人 皇子)가 연회에서 술에 몹시 취한 나머지 형인 덴지 덴노의 상에다 을 집어던졌고, 덴지 덴노가 빡쳐서 오아마 황자를 죽이려는 것을 카마타리가 나서서 가까스로 말렸다고 한다. 참고로 오아마 황자가 저렇게 무례한 행동을 벌인 건 덴지 덴노가 오아마 황자의 부인인 누카타노오키미(額田王)를 빼앗아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7] 그 이전에 덴무 덴노는 출생년도 문제 때문에 오아마 황자의 정체가 카츠라기의 이부형 아야 황자라는 가설이 있어서 이 설대로라면 애초에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생전에 덴지 덴노로부터 후궁이던 카가미노오키미(鏡王女)를 하사받아 본처로 맞았는데 이에 대해 카가미노오키미는 당시 임신 중이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이가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로 족보상으로는 카마타리의 아들이지만 혈통으로는 덴지 덴노의 친아들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1970년대 일본 최고의 게이샤로 유명했던 이와사키 미네코의 친가 쪽 조상이라고 한다.

6. 백제인 설

위에 나오는 기록들과 달리 《 일본서기》의 기록만 보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매우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을사의 변 때,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 다이코쿠덴에서 소가노 이루카가 검에 맞아 죽기 전 고교쿠 덴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에 카츠라기 황자는 그가 반역을 꾀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교쿠 덴노는 그 자리를 떠났고, 후루히토노오에 황자가 자택에 뛰어들어와
"이루카가 카라히토(韓人)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를 반도의 주변 정세를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했지만, 직역하면 삼한의 후예인 신라인이나 백제인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외교관계가 문제라면 후루히토노오에 황자가 굳이 '한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당시 상황을 보면 을사의 변 이후 사람들은 신정권을 매도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기 직전 그의 자택에 낙뢰가 내리쳤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소가노 이루카가 저주로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으며 헤이안 시대 《부량삭기》의 기록을 보면 사이메이 덴노가 죽기 직전에 나타났다는 귀신도 사람들이 소가노 이루카라고 단정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알려진 것과 달리 사람들이 오히려 소가씨를 지지했으며, 카마타리의 죽음을 꼴 좋다고 여겼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소가씨는 외교관계 다변화, 대왕가 직할령인 둔창의 설치와 확대로 인한 대왕권 강화와 호족 세력 약화, 나니와 천도 등등 오히려 대왕가를 적극적으로 도와 개혁을 주도했다.

나카토미 집안의 조상인 아마노코야네노미코토(天児室命)는 긴키 신화에도 등장한다. 나카토미씨가 신도와 관련된 일을 오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 고사기》에는 신화시대라면 모를까 그 뒤 나카토미씨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없다. 위에 나온 일화와 달리,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쓴 《 일본서기》에 한해서 보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고교쿠 덴노 치세인 644년, 갑자기 신지백(神祗伯)에 임명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백(伯)은 오등작 중 하나인 백작을 뜻하며, 지(祗)는 토지신을 뜻하는 말로, 갑툭튀한 사람을 대뜸 신도 제사의 정점이자 제후로 삼은 셈이다.

《일본서기》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쓴 것이라서 그는 자기 아버지인 카마타리를 열심히 찬양했다. 하지만 위에 나오는 기록들과 달리 《일본서기》에만 한해서 보면 카마타리의 양친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아마노코야네노미코토로부터 계속되는 계보도 없이 그냥 그렇다 카더라 한 마디만 한 뒤에 카마타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제일 의문스러운 점은 663년 백강 전투 때 카츠라기 황자( 덴지 덴노)가 인생 최대의 정치적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기록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 난이 다 끝난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후히토의 초기 행적이 백제인 망명 귀족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백제 도래인이었다는 가설에 힘이 실린다. 나카토미 가문은 모를까, 카마타리 자체는 백제인이었다는 것이다. 나카토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든 족보를 날조했든 방법은 많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임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카마타리'의 표기가 '鎌足'인데, 이 중에서 뒤의 '타리'가 ''[8]에 대응한다는 점, 일본어에서 다리이 어휘상 일반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 두 단어의 결합에서 뒤쪽 단어의 첫 음소가 유성음화(연탁)하지 않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카마타리가 옛 한국어 어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본래부터 이름의 뒤에 한국어 '다리'가 들어갔으나, 일본어에서 다리와 발이 어휘상 구별되지 않는 때가 일반적이므로 발을 뜻하는 '足'으로 표기되었다.[9] 그런데 일본어와 달리 한국어가 예로부터 기식음의 특성이 많았고[10], 유성음과 무성음의 대립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다리'가 당시 일본 사람들이 듣기에 'たり'로 들렸기에 이와 같이 불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저족현은(猪足) 오사회(烏斯回)로도 불렀는데 足과 돌(回)이 대응되므로 삼국시대에도 足을 다리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설에 따르면 적어도 백제 시절부터 '다리'는 그 형태가 변하지 않은 채 내려오는 셈이다.[11]

6.1. 부여풍

그런데 《 일본서기》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일본에서 활동한 시기가 묘하게 일치하는 백제인이 한 명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의자왕의 아들이자 백제부흥운동의 주인공인 부여풍이다.

부여풍은 왕자의 관례에 따라 일본에 왔다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부흥운동을 위해 반도로 돌아가 수장이 되었다. 이 때 야마토 왕조는 나라의 기둥을 뽑는 수준으로 전함들을 제조하고, 도래인들로 이루어진 28,000명의 군대를 백강 전투에 파견해 일대 격전을 치렀지만 백제부흥군과 야마토군이 대패하면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이후 부여풍은 당나라에 붙잡혀 유배된 뒤 중국과 삼국의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부여풍이 백제에서 야마토로 떠나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처음 등장한 시기와 카마타리가 실종된 동안 부여풍이 백제에 있었던 시기가 거의 겹치고 있다는 것이다.

6세기 야마토 조정은 백제와의 외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7세기 소가씨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수-당과 신라, 고구려와 직접 교역하는 등 외교관계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강 전투처럼 백제만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전개는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츠라기 황자와 카마타리가 을사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또 당대에 직관(職官)의 관위를 받은 사람이 카마타리와 부여풍뿐이라는 점에서도 접점이 생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나온 외교 관계의 뒤틀림이라는 것도 카마타리가 백제 왕자 부여풍이라고 전제했을 때, 한인이라는 후루히토노오에 황자의 말과 《일본서기》의 기술이 전부 맞아떨어지게 된다. 소가씨의 행보로 인해 백제와 외교적 마찰이 있던 건 소가노 우마코가 수나라에 견수사를 파견하자 백제가 외교문서를 도중에 강탈한 사건으로도 알 수 있다.

속일본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 의자왕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에게 도다이지의 서랍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만일 카마타리가 부여풍이라면 자기 아들이므로 선물을 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 등씨가전》에는 천황이 그를 연개소문, 성충, 김흠순(혹은 김유신) 등에 비유했는데, 카마타리가 부여풍이라면 성충은 그의 신하뻘 되는 인물이니 서로 격이 맞지 않아서 의문스럽다. 다만 등씨가전은 《일본서기》의 기록이 아닌 족보 행장 같은 부류의 책이기 때문에 정사 수준의 신뢰성을 가지진 않으며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되는 내용도 꽤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12]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부여풍 설이 다름아닌 일본에서 처음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사의 기록을 보면 부여풍은 유배간 이후의 행적이 불분명하므로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야마토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면 딱 들어맞는다.

카마타리가 부여풍이 맞다면 668년 문무왕 김유신에게 선물을 한 것도, 죽기 직전 덴지 덴노에게 남긴
'살아서 군국에 도움이 된 것이 없었다'
는 유언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가 부여풍이 아니라면 그저 겸양의 뜻이겠지만 그가 부여풍이 맞다면 살아서 백제를 부흥시키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탄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부여풍과 동일인물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
  • 부여풍의 형이자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은 615년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부여풍은 615년 이후 출생한 인물이 되는데,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614년이라는 명확한 출생 연도가 전해진다. 오히려 부여풍보다 나이가 많다.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부여풍이라면 왜 부여풍이 기존의 성씨와 출신을 숨기고 개명을 해야 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도래인 계통 귀족들이 출신과 신분을 개변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시기는 8세기 이후이다.
  • 부여풍의 동생 부여선광은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라는 성씨를 받았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부여풍이라면 쿠다라노코니키시씨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후손인 후지와라씨 사이에 동계의식이 보여야 할 텐데, 그런 정황이 전혀 없다.

7. 매체에서

파일:藤原鎌足.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한다.

그가 등장한 매체들을 보면 어째 한국이나 일본 창작물에서도 똑같이 백제계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카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 덴지 덴노의 사생아로 황별씨족(皇別氏族) 취급받는 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습. 참고로 공식적인 황별씨족은 미나모토씨(源氏), 타이라씨(平氏), 타치바나씨(橘氏) 셋이다.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삼국기에는 강달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가 카마타리가 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배우는 이화룡으로 유명한 안승훈. 참고로 삼국기는 소설 《고백신조》를 각색하여 드라마화한 것이라 한다.

대왕의 꿈에서는 일본 측의 주요 출연진 중 한 명으로서 삼국기에서와 같이 백제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배우는 추노에서 반짝이 아비로 나온 노승진. 덴지 덴노의 심복으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백강 전투에도 직접 참전한다.

쿠로스 키이치로의 작품인 《패왕 후히토》에서도 백제계로 나온다. 《고백신조》(삼국기)와 달리 여기미라는 이름의 공작원으로 나카토미 미케코의 양자로 들어가서 다이카 개신을 일으킨 후에 카마타리가 된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 후에는 갑작스러운 의문사(누군가 의도한 낙마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로 인해 박장령을 시행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곽무종이라는 인물이 도우봉에 묻게 되고 곽무종은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야마토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백제화원》이라는 소설에선 《패왕 후히토》와 달리 그냥 가족에게 아낌없는 평범한 가장이자 나카노오에 황자(후의 덴지 덴노)의 선생으로서 나오나 선생 자격을 실격하고 나서 역사와 같이 다이카 개신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소년 음양사》에서 목군의 대사로 스쳐지나가듯 언급된다. 당대의 권력자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불려간 마사히로가 처음 미치나가의 저택에 와서 저택의 으리으리함에 놀라는데 옆에서 "초대 카마타리는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살지는 않았었는데."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2005년에 NHK에서 방영된 2부작 <다이카 개신>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배역은 오카다 준이치.

일본의 만화가 나카무라 마리코(中村 真理子)가 그린 덴지 덴노 덴무 덴노를 주역으로 한 《덴지와 덴무-신설 일본서기-(天智と天武-新説・日本書紀-)》란 만화에서는 아예 부여풍과 동일인물로 묘사된다. 이 만화에서는 카마타리의 행적과 함께 부여풍의 행적을 합쳐서 묘사되며 죽기 직전에 후지와라 성씨를 덴지 덴노에게 하사받는다. 작중에서도 자기 아버지인 의자왕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1] '무라지(連)'는 '카바네(姓)'라고 해서 당시 대왕가에서 유력 씨족에게 하사한 일종의 칭호다. 사실 이런 식의 표현은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른다. [2] 축사와 출세의 신으로, 니니기의 천손강림 당시 동행한 신이다. [3] 재미있게도 신라 김유신 김춘추에게 접근한 방식 역시 축국을 통해서였다. [4] 해당 문서의 생년도 사망 당시의 나이를 기준으로 역산한 것이다. [5] 사이메이는 죽기 직전에 귀신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그 귀신이 이루카의 원령이라고 믿었다. [6] 발음으로 볼 때 김흠순인 것 같은데 압도적으로 유명한 친형 김유신을 놔두고 굳이 흠순을 논한 것이 이상하다는 말도 있다. 마침 같은 책에서 김유신은 신라 상경(上卿) '짐신(鴆信)'이라는 표기로 나타난다('짐신'이란 사람에게 배를 한 척 선물했다는 서술이 《등씨가전》에 나오는데, 상술한 대로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왜 조정에서 배 한 척씩 선물했다는 것과 교차검증이 되기에 '짐신'은 김유신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굳이 다른 표기로 적어놨다는 것에서 '짐순'과 '짐신'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차피 일본인 입장에서야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도 표기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니 속단하기는 어렵다. [7] 불새/태양 편에서도 이 일화가 등장한다. 일단 정사에서의 누카타노오키미는 덴무 덴노의 빈(嬪)으로 기재되어 있고, 덴지 덴노가 누카타노오키미를 빼앗았다는 확실한 물증은 없다. [8] 足은 '타라시'나 '타리시'(多利思)라고도 한다. [9] 한자 표기로는 일본어에서도 신체의 다리를 '脚'로 표기하기는 하나, 가나로 표기하면 'あし'로 같은 단어가 된다. [10] 한글 창제 이전의, 한자를 통한 차자 표기를 연구한 여러 결과에서 한국어는 이미 고대 시절부터 유성-무성의 대립을 하지 않는 언어였음이 나타난다. [11] 15세기 중세 한국어 때도 신체의 다리는 현대와 같은 '다리'였다. [12] 사족으로 《일본서기》에서는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 불렀는데 《등씨가전》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비교하는 문장에서 연개소문을 '개금'(蓋金)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