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蘇我 入鹿610[1]/611년[2] ~ 645년
아스카 시대의 권신으로 당시 일본 정국을 휘어잡던 대가문 소가씨의 마지막 불꽃. 소가노 에미시의 아들. 하야시노 오오미(林大臣), 구라쓰쿠리노 다로(鞍作大郎)와 蘇我大郞林臣鞍作라는 별칭이 있었다.
2. 생애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인 소가노 에미시가 586년 무렵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600년~610년 무렵으로 추정한다.청년 시절에는 승려 민(旻)에게서 학문을 배워 수재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 에미시가 오오미(大臣)가 된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에 천황의 즉위와 함께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23일에 종자(従者)가 흰 참새 새끼를 손에 넣었는데, 참새는 할아버지인 소가노 우마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고교쿠 2년(643년) 10월 6일에 이루카는 아버지로부터 독단적으로 오오미를 넘겨받았다. 이로서 명실상부한 소가씨 가독(家督)을 이어받았지만, 이 무렵 쇼토쿠 태자 이후 왕실 주위에는 국정을 오키미(大王) 중심으로 개혁하려는 기운이 나날이 강해져가고 있었고, 이루카는 이러한 움직임을 억누르며, 소가씨와 혈연이 강한 후루히토노 오에(古人大兄)를 오키미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리고 걸림돌이었던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 오에(山背大兄) 황자를 위시한 우에노미야 왕가(上宮王家) 사람들을 모조리 자결로 몰아간다. 오오미를 넘겨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상순의 일이었는데, 다만 우에노미야 왕가 토벌에 대해서는 고교쿠 덴노의 즉위와 관련해 야마시로 황자가 모반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다른 왕족들이 저지른 암살이었다(즉 이루카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사건은 아니었다)는, 《 일본서기》와는 모순되는 기술이 《 등씨가전》(藤氏家伝)에 있다.
고교쿠 3년(644년) 11월에는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에 저택을 짓고 이들을 각기 「우에노 미카도(上の宮門)」, 「다니노 미카도(谷の宮門)」라 이름붙였으며, 자신의 자녀들을 미코(皇子)라 불렀다. 또한 우네비산(畝傍山)에 요새를 짓고 왕실 행사를 멋대로 대행했다. 이로서 이루카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굳혔고, 그의 치세에는 사람들이 크게 경외하여 길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소가노 이루카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후루히토노오에의 이복동생으로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가즈라키 황자(葛城皇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등이 주도한 이른바 을사의 변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아스카 이타부키 궁(飛鳥板蓋宮)의 대극전(大極殿)에서 이루카는 고교쿠 덴노가 보는 앞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사촌 형제인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가 표문을 읽어내려가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는데, 나카노오에와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에게 베였다. 상처를 입고 죽어가면서 천황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3] 이루카의 시신은 비가 내리는 바깥에 내던져지고, 이루카의 아버지 에미시도 살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하여, 이로써 소가씨 본종가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루카 사후에도 사촌형제 이시카와마로나 그 동생인 아카에(赤兄)가 오오미를 맡기도 했지만, 아카에가 임신의 난으로 유배에 처해진 뒤 소가씨(이시카와씨石川氏)는 납언(納言)・산기(参議)에 오르는 게 고작일 정도의 신분으로 떨어졌고, 헤이안 시대 초기가 되면 구교(公卿)도 배출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아예 이름이 지워지고 마는 비극을 맞이한다.
3. 기타
소가노 이루카라는 이름은 훗날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는 나카노오에(中大兄)와, 그에게서 후지와라 씨를 사성받게 되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에 의해 그때까지의 이름이 사료상에서 지워지고, 비하하는 이름으로서 짐승의 이름을 갖다붙이게 되었다는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등의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가토 겐키치(加藤謙吉) 등의 반증도 시도되었다. 한편으로 메이지 학원(明治学院)의 대학교수 다케미쓰 마코토(武光誠)는, 당시의 시대는 정령 숭배 사상을 토대로 동물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던 풍조가 있었고 이루카(入鹿)라는 이름도 해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돌고래(이루카)의 이름을 붙였다는 견해도 있다. 흥미롭게도 아버지의 이름은 또다른 바다생물인 새우와 연관이 있다.4. 가설
4.1. 누명 설
소가노 이루카가 죽였다는 야마시로 황자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야마시로 황자와 쇼토쿠 태자가 부자라는 건 헤이안 시대에 들어와서 나온 말이며 야마시로 황자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을 때의 묘사도 이상한데 이루카에게 습격당하자 우선 이코마산으로 도망친 뒤 병력을 모으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 일족과 함께 이카루가로 돌아와 모두 죽었으며 야마시로 황자의 일족이 멸망했을 때 하늘에서 천녀들이 춤을 췄다고 한다. 그런데 수십 명이 되는 일족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하물며 고대부터 이어진 원령 숭배 사상을 고려할 때 원령으로 숭배되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런 게 없다. 즉 야마시로 황자의 존재 자체가 조작이라는 것.《 일본서기》는 이루카의 사적을 소가씨의 월권행위로 무리하게 후루히토노오에를 오키미로 추대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고 비판하지만, 소가씨는 원래 우마코의 대부터 대륙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데 힘썼던 개혁파 선두로서 당나라나 백제 등 당시의 국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우에노 미카도」니 「다니노 미카도」라 여겨지는 장소에는 무기 창고의 흔적이나 무기 유물이 발굴되기도 한다. 또한 견당사도 자주 파견되어 당의 일본으로의 파병을 소가 씨가 경계하고 그것을 염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실 직할령인 둔창의 설치와 확대에도 적극적이었고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중국, 신라, 고구려 등 여러 나라들과 직접 교류하는 것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꾀했다. 소가노 이루카의 암살은 그것이 소가씨 본종가 멸망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개혁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다툼에서 소가씨와 대립하던 왕족, 반(反)소가씨의 확집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4.2. 나니와 천도
을사의 변 이후 고교쿠 덴노가 사상 처음의 퇴위를 하자 가즈라키 황자가 왕위를 이어받고자 했지만,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반대하자 숙부인 가루 황자를 고토쿠 덴노로 즉위시킨다. 명분 때문에 그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카를 죽이고서도 정계에 완전한 권력을 잡지 못해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건이 끝나자마자 나니와로 천도했지만 막지 못한 건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나니와 천도는 고토쿠 덴노가 독자적으로 주도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니와는 야마토 분지 서쪽에 연이어지는 산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야마토 분지와 나니와의 사이에는 천연의 산인 이코마산과 가쓰라기산의 봉우리들이 옆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니와에서 야마토로의 공격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진무 덴노의 동진이나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지하야성으로도 알 수 있다. 나라 시대 이전까지 야마토 정권이 야마토 분지를 벗어나지 않은 건 이런 견고한 지형 때문이다.
쿠데타가 벌어지고 불안정한 정국에서 소가의 잔당이 많은 야마토 분지를 방치하고 나니와로 옮긴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만약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가노 이루카 때 이미 나니와 천도가 계획되어 고토쿠 덴노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나니와로 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을사의 변 직후 야마토의 쥐들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것이 나니와 천도의 조짐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루카가 살아있을 때의 조짐이므로 이미 이루카 때 나니와 천도가 계획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즈라키 황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나니와로 천도하자 소가노 구라야마다이시카와노마로 일족에게 가쓰라기 황자의 죽음을 꾀한다는 참소를 올려 멸망시키고 시체를 조각조각 잘라버린 뒤, 가쓰라기 황자는 마로의 유해를 소금에 절여 그 머리를 자기 아내이자 마로의 딸인 오치노 이라쓰메에게 보여줘 미쳐죽게 만든다. 고토쿠 덴노의 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주살당했고 결국 수도는 아스카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때문에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오히려 기존의 개혁파를 억압하고 수포로 돌렸다는 추측이 있다.
4.3. 저주설
소가노 이루카는 일본서기와 부상략기의 기록에 따르면 사후 귀신의 형상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주변을 놀라게 했고, 사이메이 천황의 주위를 둘러싼 근신들을 변사시킨 뒤 사이메이는 이루카의 귀신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고교쿠 덴노 때 을사의 변으로 소가노 이루카가 죽는 걸 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루카가 원한을 품어 사이메이 천황을 죽였다고 본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그냥 귀신으로만 나오지만, 부상략기에서는 이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라고 기술했다.부상략기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 쓰여진 사서로 불교와 관련된 기술이 많은데, 이는 이루카가 헤이안 시대 때 저주를 내리는 귀신이라는 전설이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또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를 섬기는 단잔 신사(談山神社)의 에마키에는 가즈라키 황자의 일파에게 잘려나가는 소가노 이루카의 머리가 원한에 맺힌 표정으로 사이메이 천황에게 날아가는 그림이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이루카의 저주로 사이메이 천황이 죽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도 이루카의 저주를 암시하는 일화가 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저택에 낙뢰가 있었는데, 낙뢰가 일어나고 얼마 후에 카마타리는 급사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고대에 낙뢰라는 건 신벌이라는 뜻이 있었다. 정사에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카마타리의 죽음이 이루카의 저주와 연관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카마타리와 이루카의 관계는 무서우리만치 후지와라 씨족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관계와 유사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소가노 이루카를 저주를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워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