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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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포화에 이르게 된 하네다 공항 |
1960년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으로 항공교통 수요가 문자 그대로 폭발하면서 하네다 공항의 혼잡도는 극심한 수준이었고, 이에 일본 정부는 하네다 공항의 확장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도쿄만, 그것도 타마가와 하구에 바로 위치한 연약지반 때문에, 공사상의 난점[1] 및 기존 항만 시설의 개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요코다 공역[2]이 존재하여 하네다의 이착륙이 매우 제한되었기에, 확장하더라도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와 보잉 2707의 개발이 추진 및 검토되기 시작했고, 당시 국영 항공사였던 일본항공도 발주한 상태였다. 초음속 여객기가 미래 국제선의 주류가 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장대화된 활주로를 충분히 갖춘 대규모의 신공항 건설이 불가피했다.[3]
2. 부지 선정
<rowcolor=white> 도미사토시 후보지 당시 최초 계획도 | 나리타시로 후보지 변경 이후 계획도 |
따라서 1962년 일본 정부는 신공항 건설을 결정하고, 여러 후보지의 검토 끝에 1965년 치바현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에 활주로 5개, 2,300 헥타르 규모의 신공항 건설을 발표했다.[4] 그러나 방대한 신공항 부지는 도미사토시(당시 도미사토촌) 면적의 절반에 맞먹었으며, 공항 주변까지 개발되면 마을의 소멸이 예상되었다. 사전 설명도 없었던 발표에 해당 지역 주민들은 이와 같은 이유로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사유지를 최소화한 대체 후보지를 찾기 시작했고, 도쿄에서 조금 멀지만 적당히 접근성이 있고, 궁내성 관할의 목장이 있어서 토지 보상이 쉬울 것으로 보이는, 도쿄의 위성도시 중 하나인 치바현 나리타시에 신공항을 짓기로 1966년에 결정하였다.[5]
후보지를 나리타시로 변경하면서, 신공항 규모는 활주로 3개, 1065 헥타르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궁내청 관할의 목장을 비롯한 국공유지는 공항 부지의 약 40%(395 헥타르)에 불과했으며, 사유지는 약 60%(670헥타르)에 용지 협상 대상자는 천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71년까지 A활주로와 1터미널을 개항하고, 나머지 시설(B, C활주로, 2터미널)을 1973년까지 완공할 계획이었다. 신공항 후보지 최초 결정과 변경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폭증하는 항공 수요의 해소와 신공항의 빠른 개항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며, 토지 보상 문제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정부의 안일한 결정은 나리타시 후보지 주민들을 전투종족으로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
3. 히키아게샤의 반발과 투쟁
<rowcolor=white> 1971 당시의 현장 영상 | 1985년 나리타 반대 가투[6] |
전투종족이 된 나리타시 후보지 주민들의 정체는 바로 히키아게샤 농민들이었다. 게다가 이 농민 대다수는 과거 일본 제국 시대에 정부의 말만 믿고 만주와 조선등으로 이주했으나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거의 무일푼으로 쫓겨나듯 귀국해 겨우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이었는데, 자신들을 개고생시킨 일본 정부에서 이번엔 사전 설명도 없이 강제로 또 다시 땅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당연히 곱게 비켜줄 리가 만무했다. 이처럼, 히키아게샤 농민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반발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애초부터 보상이라도 많이 해줬다면 모를까, 일본 정부에서는 쥐꼬리만한 돈으로 보상을 해주려고 했으니 정말로 갈 곳도 없었고, 자신들이 힘들게 정착한 땅에 애착도 있는데다 이제와서 다른 직업을 구할 수도 없으니 농민으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하는데 재산권을 침해당하고 있으니 생계가 걸려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일본 정부는 히키아게샤 농민들이 경제력이 없으니까 사유지 토지 보상이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이렇게 억울하게 땅을 뺏기게 된 상황에 대해 분노한 히키아게샤 농민들은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항의하다가 끝내 전투종족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1970년대 당시는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고도성장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주의 운동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는데[7] 때마침 이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미 전투종족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까지 가세했고 나리타 공항 부지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나리타 국제공항은 1966년에 건설 발표 후 1971년에 개항, 1973년까지 최종적으로 완공하기 위해[8] 행정대집행을 동원해 알박기들을 다 치워버릴 심산이었다. 자세히 말하면, 일단 공무원들이 경찰들과 함께 동원되어 시위대가 앞길을 가로막으면 모조리 공무집행방해죄로 잡아 들이고 이후 행정대집행으로 깔끔하게 만드는 획기적인지 엽기적인지 모를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행정법 관련책자에는 행정대집행 관련해서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급되는 유명 사건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로 이 방법은 쓰이지 않는다.
어렵사리 부지를 확보한 이후로도 이 전투종족들은 부지 옆에 철탑을 설치, 항공기의 운행을 방해하며 저항을 이어 나갔고[9] 여론도 일본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이 대두됨에 따라 개항은 1978년으로 연기되었다.
4. 완공 직후
<rowcolor=white> 공항 관제탑을 점거한 시위대 | [10] |
예정 개항일 4일 전인 1978년 3월 26일, 시위대가 공항 관제탑에 침입해 시설물을 사보타주하면서 개항이 5월 20일로 미루어졌다. 미루어진 개항일 전후에도 공항 시설 자체와 나리타 공항철도인 케이세이 전철에 대한 테러가 일어났다.[11]
개항당일 나리타 국제공항의 첫 아웃바운드 항공편은 일본항공 947편 이었고, 나리타 국제공항 첫 인바운드 항공편은 대한항공 701편 이었다.
개항 5일 후인 5월 25일 밤에는 나리타 국제공항 인근 맨션에 과격파가 불을 질렀는데 이곳은 대한항공을 비롯한 일부 외국 항공사가 숙소로 쓰는 곳이었다. 심지어 개항 두 달 후에는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G7 정상회담차 서독의 수도 본으로 출국할 때 국책 홍보 차원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가려 했으나, 경호상 문제가 많다는 수행원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결국 하네다를 통해 출국했을 정도. 당시 기사
이곳의 지명을 따 산리즈카(三里塚) 투쟁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물론 2010년대 들어서는 투쟁의 강도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만화 나츠코의 술 작가가 시위주민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만화도 있다. 심지어(?) 정발도 되었다!
오가와 신스케의 산리즈카 7부작은 이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상당히 유명하다.
5. 터미널 신설과 B 활주로
1986년 11월, 공항 측은 건설 2단계에 들어가 두번째 터미널과 신설 활주로 착공에 들어갔다. 뼈저린 교훈을 얻은 일본 정부 측은 공항 개항 때와 같은 강제집행은 없고 주민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정부에 대한 신뢰가 모두 깨져버린 주민들은 계속 반대했다.1992년 12월 4일 2터미널이 개장했다. 그러나 기존 터미널의 반대편에 지어져 이착륙을 위한 택싱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이착륙 소요시간보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사태가 빈번해졌다.
B활주로(16L/34R)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맞춰 2002년 4월 17일 개통되었다. 하지만 상술한 시위대와 부지 문제로 활주로는 계획보다 더 짧은 7,152피트(2,180m)의 길이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사유지를 피하기 위해 유도로가 굽어지면서 B 활주로를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에는 제약이 걸렸다. 특히 2009년 3월 A활주로에서 페덱스 익스프레스 80편 착륙 사고가 벌어지자 대형기와 화물기들은 하네다로 회항하거나 결항되기까지 하면서 B활주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동년 10월 B활주로를 북쪽 방면으로 총 2,500m로 연장하는 공사를 완료했다.
2015년 8월에는 저비용 항공사 전용 터미널인 3터미널이 개장했다.
6. 시설 개선과 C 활주로
항공기의 발착 횟수를 지금의 1.5배 이상에 해당하는 연간 50만회로 늘리기 위해 현재 2개 있는 활주로를 1개 늘려 3번째 C활주로를 신설함과 동시에, B활주로를 현재의 2500m에서 3500m로 연장할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2029년 3월 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7. 관련 문서
[1]
말이 좋아 난점이지, 당시는 1960년대이다. 1980년대에도 힘들게 확장했는데 쉬울 리 없다.
[2]
주일미군이 직접 통제하는 공역인데 수도권을 크게 둘러싸고 있다.
[3]
비슷하게
인천국제공항도 같은 이유로 미래 초음속기 취항을 대비하여 건설되었다.
1992년 대한뉴스
[4]
초음속기용 4,000m 활주로 2개, 국내선용 2,500m 활주로 2개, 측풍 대비용 3,600m 활주로 1개로 총 5개의 활주로가 계획되었다. 당시 350 헥타르에 불과했던 하네다 공항은 물론이고,
히스로 공항(1,100 헥타르),
파리 오를리 공항(1,600 헥타르),
JFK 국제공항(2,000 헥타르) 등 세계 유수의 국제공항들보다도 거대한 규모였다!
[5]
공항 건설 이후 궁내성 목장은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근교로 이전했고, 원 공항 후보지였던 도미사토 지역에는 나리타시 남부와 연담화된 신도시가 들어섰다.
[6]
일명
10.20 나리타 현지 투쟁.
중핵파가 주축이 되었다. 둘 다 거의 전쟁급의 치열함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이 공항에 대한 반대가 거셌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른쪽 영상은 대놓고 연령 제한까지 걸려 있다.
[7]
딱히 사회주의 계열이 아니라고 해도 당시의 일본 국민들이 이미 전투종족이었다고도 생각되는데, 그 증거가 바로
일본국철의
아게오 사건과
수도권 국전 폭동이다.
[8]
21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는 어처구니없이 압축된 스케줄이다. 고도성장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 참고로 육상에 가장 최근에 건설된 사례인
시즈오카 공항은 산지를 메우는 형태로 비교적 저항이 적은 방식이었음에도, 정부 인가 후 개항까지 13년 걸렸다. 이 쪽도 반대파들의 나무 심기로 2년여를 까먹은 건 덤이다.
[9]
시위의 규모도 대단해서, 철탑 철거 와중에 시위대 중 최루탄 맞고 죽은 사람도 있다.
[10]
1985년에도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의 수많은 과격파 분파들 중 하나인
중핵파 활동가들이 우루루 쳐들어가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이 있다. [11] 이 때 케이세이 스카이라이너로 운행 예정이었던 케이세이 AE형 전동차의 1량이 반대파의 방화로 전소되는 사건도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중핵파 활동가들이 우루루 쳐들어가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이 있다. [11] 이 때 케이세이 스카이라이너로 운행 예정이었던 케이세이 AE형 전동차의 1량이 반대파의 방화로 전소되는 사건도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