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68년 5월 27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면 송내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1] 591번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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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7월 4일[3] (향년 66세) |
경상북도 봉화군 | |
초명 | 김정림(金正林) |
자 | 태시(太始) |
호 | 운당(雲塘) |
가족 | 배우자 최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2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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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양자 김창신 또한 독립유공자이다.2. 생애
1868년 5월 27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면 송내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 591번지)에서 아버지 강재(剛齋) 김덕영(金悳永, 1848 ~ 1907.11.24.)[4]과 어머니 진성 이씨 이중룡(李中龍, 1846 ~ 1892.12.21.)[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덕영은 1891년( 고종 28) 증광 생원시에 3등 40위로 입격하였고, 조부 좌해(左海) 김매수(金邁銖, 1809 ~ 1856.6.7.)[6] 또한 1843년( 헌종 9) 식년 생원시에 2등 8위로 입격하였다. 증조부 나헌(懦軒) 김재공(金在恭, 1782 ~ 1837.9.11.)[7] 또한 1822년( 순조 22) 식년 생원시에 3등 8위로 입격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까지 올랐다. 고조부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 1760 ~ 1830.11.26.)[8]는 1789( 정조 13) 식년 생원시에 3등 58위로 입격하고 1795년(정조 19) 식년 문과에 을과 6위로 급제한 뒤 순조 때 사간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5대조 김시동(金始東, 1731 ~ 1811.3.9.)[9]은 순조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다. 또한 외조부 신암(新巖) 이만기(李晩耆, 1825 ~ 1888.6.29.)는 이황의 11대손으로, 1852년( 철종 3) 식년 문과에 병과 13위로 급제하여 고종 때 사간원 대사간 및 승정원 우승지에까지 올랐다.일찍이 서산(西山) 김흥락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01년(광무 5) 주차미국공사관 서기생(駐箚美國公使館書記生)[10], 1902년(광무 6) 혜민원 주사(主事)[11], 1906년(광무 10) 효창원 참봉[12], 1910년(융희 4) 예산군 주사[13] 등 대한제국기에 관료로 재직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정[14] 52번지로 이주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러허특별구(熱河特別區) 또는 차하얼특별구(察哈爾特別區)의 미개간지 및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둔병식(屯兵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 뒤 간도 지역에 체류하는 조선인들을 집결하여 개간사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등 10년간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군자금 20만 엔을 경상북도 일원에서 모금할 생각이었다.
이에 1925년 8월 17일 김창숙이 중화민국에서 경기도 경성부로 밀입국한 뒤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15] 곽종석의 문집인 『면우문집(俛宇文集)』의 간행소를 거점으로 확보하였고, 이곳에서 1923년 2월에 미리 귀국한 정수기· 손후익 등 영남지방 유림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25년 8월 말 직접 경상북도 대구부로 내려가 김화식(金華植)에게 스스로 작성한 취지문을 제시하고 계획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경성부 왜성대정[16] 남산공원에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손후익· 이재락(李在洛)· 이동흠(李棟欽)· 김동진(金東鎭) 등과 수 차례 만났다.
그러던 1925년 12월, 김창숙의 지시를 받아 경상북도 지역 담당자로 파견된 정수기를 만나 김창숙의 군자금 모집 계획을 들었고, 이에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말에 김창숙을 만나 활동 목표와 지침을 들었다. 1926년 1월에는 봉화군의 부호 권상경에게서 군자금 1,000엔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5월 중순까지 대부분의 관련자가 잡힐 때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9개월간 복역한 뒤 1926년 12월 1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구류취소 및 출감 처분을 받았고[17],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18]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강도죄 등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아[19] 곧 출옥하였다.
1934년 7월 4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사망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06년 10월 12일 배우자 전주 최씨 최기(1870 ~ ?)[20]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의성 김씨 개암공파(開巖公派)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뇌식·
김덕기·
김중문·
김창신도 이 마을 출신이다.
[2]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기준.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는 691번지로 기재되어 있다.
1910년대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당시 해저리 691번지는 김헌식 본인의 소유였다.
[3]
음력 5월 23일
[4]
초년기에는 한자이름을 金德永으로 썼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김진영(金眞永)으로 적혀 있다. 자는 중일(重一).
[5]
이황의 12대손으로, 신암(新巖) 이만기(李晩耆, 1825 ~ 1888.6.29.)의 딸이다.
[6]
자는 진오(進吾).
[7]
초명은 김진원(金振遠), 자는 대긍(大兢).
[8]
자는 성사(聖思), 공목(公穆).
[9]
자는 계원(啓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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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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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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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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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15]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6]
현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17]
1926년 12월 1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8]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
[19]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20]
1882년(
고종 19) 증광 생원시에 3등 60위로
입격한 동려(東黎) 최병섭(崔炳燮, 1852.10.11. ~ 1930.6.6.)의 장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