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2:03:02

김택수(탁구)

<colbgcolor=#131230><colcolor=#eee156> 김택수
金擇洙|Kim Taek-soo
파일:김택수.jpg
출생 1970년 5월 25일 ([age(1970-05-25)]세)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양산리 양곡마을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양산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광산 김씨 (光山 金氏)[1]
학력 광주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무진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졸업)
경원대학교 (체육학 / 학사)
용인대학교 체육과학대학 (사회체육학 / 학사)[2]
신체 175cm, 72kg
직업 탁구 선수 (오른손 펜홀더 드라이브 / 은퇴)
탁구 감독
기업인
소속 대우증권-한국담배인삼공사-KT&G 탁구단 (1988~2004)[3]
김택수 탁구클럽&아카데미 이사장 (?~ )
미래에셋증권 탁구단 감독 (2007.05.~ )[4]
가족 배우자 김조순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여담6.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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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탁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고등학생이던 1987년 국가대표로 처음 발탁된다. 이땐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 지냈지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주목받기 시작한 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턴 명실상부한 국대의 에이스가 된다.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기대했으나, 당시 세계를 씹어먹던 탁구계의 전설 얀오베 발드네르(발트너)에게 패해 아쉽게도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5]

이후에도 최고의 펜홀더 중 한 명으로서 오랜 기간 세계 최상위권의 기량을 유지했다. 실제 20세기 한국 대표 탁구 선수 중에선 가장 긴 전성기를 보여줬는데, 1990년대부터 10년 이상 세계탁구 랭킹 10위권을 유지했고 최고 랭킹은 3위였다. 최전성기 시절 김택수는 올스타 서킷에서 당시 중국의 실력자 마원거, 왕타오, 류궈량, 쿵링후이, 유럽의 실력자 발트너, 페르손, 가티엥, 세이브 등을 대부분 꺾은 바 있었다.

김택수 커리어 최대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단식 결승전에서 류궈량과 벌인 32구 랠리는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이미 4강전에서 당시 세계 랭킹 3위였던 쿵링후이를 이기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선 중국 1인자격이던 류궈량을 이기며 우승했다. 2020년대까지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와 더불어 유이한 아시안게임 단식 국내 금메달리스트이다. 자주 붙은 류궈량 감독의 선수 시절, 로빙 방어에서 역습으로 드라이브를 꽂아넣는 영상도 유명했다.

2000년대 들어선 중국식 펜홀더의 이면타법이 점점 완성되고, 마린 등의 사기급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결국 2004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6] 그리고 후술되어있듯 그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코칭한 유승민은 천적인 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다.

3. 플레이 스타일

빠른 풋워크와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 스매시 등 일본식 펜홀더로서의 강점 뿐만 아니라, 전형상 고질적 약점인 백핸드마저 상당히 안정적인 백핸드 드라이브와 빠른 쇼트로 커버했을 정도로 많은 강점을 보유했던 선수였다. 오히려 안정감 면에서는 유승민보다 한 수 위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유승민도 백핸드 방어와 역습이 없지 않았고, 미라클 워커라고 불릴 만큼 인상적인 풋워크도 선보였으나, 백핸드의 완성도와 전체적인 테크닉은 김택수가 한 수 위였다. 다만 기술적으로 뛰어났던 김택수와 달리 유승민은 당대 최고 수준의 파워를 보유했다.[7]

중화권 위키에서도 김택수의 기술 완성도를 칭찬하며 그가 천하제일펜홀더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갖고 있다고 평했고, 유승민 선수의 문서에선 '그의 보법(풋워크)은 김택수와 비할 바는 아니나'라는 언급이 있다. 유승민처럼 올림픽 단식 금메달 같은 킬러 타이틀은 보유하지 못했으나[8] 10년을 롱런하며 최정상급에서 꾸준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 그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4. 은퇴 이후

  • 은퇴 이후 김택수의 가장 큰 공은 아무래도 유승민을 지도해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 금메달을 일구어낸 점일 것이다. 올림픽 개막을 몇 달 앞두고, 당시 탁구대표팀 선수단 구성의 문제로 코치진과 선수들 사이에 마찰이 생겨 결국 선수단 중 일부가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국가대표 선발전 1위로 가장 먼저 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김택수는 돌연 태극 마크를 반납했다.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본인이 중국 대표팀 선수들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으니, 메달권 진입 가능성이 더 큰 후배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 본인이 직접 밝힌 이유였다.[9] 직후 코치로 보직을 변경해 유승민을 전담 지도했으며[10], 왕하오를 결승에서 만날 것임을 미리 예측하고 최적의 전략[11]을 구상했다. 이때 실업팀 선수들 중 이면타법을 구사했던 이정삼을 선수촌으로 불러와 유승민의 전담 파트너로 붙여 하루에 평균 10000개의 볼을 치게 했으며[12], 김택수 본인도 이면타법을 연구하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는[13]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 올림픽이 열리자 스웨덴의 레전드 노장[14] 얀오베 발드네르가 유승민의 또 다른 천적이였던 당시 세계랭킹 2위 마린과 독일의 최강자 티모 볼을 각각 16강과 8강에서 잡아주고 올라와 준결승에선 유승민에게 패하는[15] 등 금메달까지의 여정에서 유승민이 중국 선수를 결승전에서 만난 왕하오 빼곤 만나지 않는 대진운도 좀 따랐고[16][17], 결승에서 드디어 마주친 왕하오에게, 유승민은 김택수가 구상한 전략을 번개와 같은 풋워크를 이용해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실제 김택수의 예상은 적중해,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요하게 공략하려는 왕하오의 이면드라이브를 백푸쉬 하나만으로 무력화시켰으며 힘과 힘의 맞대결인 포핸드 맞드라이브 싸움에서 왕하오는 유승민을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결과는 금메달. 주니어 시절 이겨보고 성인 무대 데뷔 이후엔 0승 6패로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었던 왕하오를 처음으로 꺾은 것이었다. 또한 유승민은 같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굳이 김택수를 졸라 김택수의 라켓을 들고 올림픽 경기에 임했다.[18] 대단한 실력자였음에도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던 스승의 한을 제자가 풀어준 셈이다. 실로 대단한 사제관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랭킹도 김택수, 유남규, 유승민이 3위로 타이였는데 유승민이 2위로 청출어람에 성공했다.
  • 2007년부턴 미래에셋대우의 감독을 맡고 있으며, 제자 중엔 정영식 선수 등을 길러냈다. 정영식은 국가대표로도 선출되어 리우 올림픽에서 마룽을 맞아 초반 2세트를 선취해 마룽을 패배 직전까지 몰았으며, 비록 역전당해 패배했으나 이때의 경기력으로 중국 탁구 코치진에게 인정받아 중국 슈퍼 리그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다.
  • 10세 시절 신유빈과 방송에서 이벤트성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영상.
  • 2017년 8월, 본인의 이름을 내건 '김택수 탁구클럽'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 오픈하였다. 생활체육 동호인들 위주로 운영되는 타 탁구장들과 다르게 유소년 선수반도 같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탁구단 감독으로 재직 중이기 때문에 김택수가 탁구장에 상주하진 않지만[19] 후기 보면 평이 나름 괜찮은 모양.
  • 대한탁구협회에서도 일하고 있는데, 2022년 기존 전무이사에서 실무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대한탁구협회장이 후배 겸 제자인 유승민인게 개그 포인트. 유승민 왈 본인에겐 스승님이자 롤모델인데 사석에서도 자기한테 회장님이라고 해서 어색해 미치겠다고.

5. 여담

  • KTS라고 본인 이름을 딴 국산 탁구 용품 브랜드가 있다. 첨엔 원래 회사 이름인 티마운트(T-Mount)를 브랜드 명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KTS(김택수)를 주된 브랜드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 젊은 시절 스웨덴 탁구 유학을 떠난 적이 있다.
  • 2024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탁구선수 전지희 왈, 자신이 힘들때 큰 힘이 되어준 감독이라고 한다. 2022년 무릎 부상과 전성기가 지났다고 여겨지는 나잇대로 전 소속팀과 계약 문제가 있을 당시 현역 은퇴도 고려했는데, 미래에셋 김택수 감독이 연락해와 콜하면서 할 수 있다고 파이팅을 불어넣어준 모양.
  • 행정이나 경영 쪽에도 관심이 많은지, 2021년 인터뷰에서 한국 탁구가 실력 대비 프로화가 안되어있다며, 본인도 프로화를 이끌어 여러 시스템적 개선을 이뤄내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실제 2022년 한국프로탁구리그가 창설되었다.

6. 수상 기록

올림픽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남자 복식
동메달 1992 바르셀로나 단식
세계선수권
동메달 1991 지바 단식
동메달 1993 예테보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95 톈진 단체전
동메달 1997 맨체스터 단체전
동메달 1999 아인트호벤 남자 복식
동메달 2001 오사카 단체전
동메달 2001 오사카 남자 복식
동메달 2003 파리 남자 복식
동메달 2004 도하 단체전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금메달 1998 방콕 단식
은메달 1994 히로시마 남자 복식
은메달 1998 방콕 단체전
은메달 2002 부산 단체전
은메달 2002 부산 남자 복식
동메달 1994 히로시마 단식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6 칼랑 단체전
은메달 1990 쿠알라룸푸르 혼합 복식
은메달 1996 칼라 남자 복식
은메달 1998 오사카 단체전
은메달 2000 도하 단체전
은메달 2000 도하 혼합 복식
동메달 1990 쿠알라룸푸르 단식
동메달 1996 칼랑 혼합 복식
동메달 1996 칼랑 단식
동메달 1998 오사카 남자 복식
월드컵(단식)
은메달 1998 산터우 단식
동메달 1992 호치민 단식
월드컵(복식)
금메달 1990 서울 남자 복식
금메달 1992 라스베가스 남자 복식
월드컵(단체전)
금메달 1995 애틀랜타 단체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86 나고야 단체전
금메달 1986 나고야 남자 복식
은메달 1987 케디리 단체전
동메달 1987 케디리 남자 복식
동메달 1987 케디리 단식


[1] 문숙공후(文肅公后)-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 36세 영(永)○ 항렬. 족보명은 영택(永擇). 다른 광산 김씨들에 비해 항렬이 높다. [2] # [3] 2001년 대우증권이 탁구단을 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에 매각했다. [4] 기사 [5] 이때 발트너 선수는 금메달을 따기까지 단 한 세트만 패배하는 괴력을 보였다. 당시 발트너는 중국의 1, 2인자 마원거, 왕타오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탁구 황제였다. 참고로 김택수는 발트너와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극심한 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사실 김택수는 현역 시절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긴 했다. 어찌보면 불운한 거고 어찌보면 그것도 실력. [6]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지만 후술되어있듯 본인이 국가대표를 반납하고 코치로 전환했다. [7] 둘 모두가 선수였던 시절 상대전적은 5승 2패로 김택수의 우위. [8] 이는 김택수의 컨디션 문제이기도 한데, 김택수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으레 무릎, 담석 등의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고 체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었기 때문에 정상 컨디션으로 주요 경기에 임한 경우가 드물었다. 다만 김택수는 1992년~1996년에 있었던 올스타 서킷대회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이는 올스타 서킷이 최대 3경기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택수는 전체 대회에서 1/4을 우승으로 장식하였다. 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은 상대편의 질로 보면(1996, 2000 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 류궈량, 쿵링후이를 모두 제압한다) 사실상 올림픽 금메달과 큰 차이도 없었다. [9]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니라, 마지막 올림픽인데다 메달 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에 일주일 이상 고민하다 후배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주세혁이 대표권을 양도받는다. [10] 묘하게도 이때 왕하오의 국대 감독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김택수에게 금메달을 내준 류궈량이었다. [11] 왕하오는 이면드라이브로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중 공략할 것이므로 이는 백핸드 푸쉬로 대응하고, 쇼트와 푸쉬를 제외한 다른 백핸드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포핸드 파워드라이브의 공격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어떻게 보면 가장 펜홀더 전형 탁구의 기본에 충실한 전략이기도 하다. [12] 덕분에 왕하오는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이면타법 쓰면 제대로 받지도 못하던 유승민이 갑자기 받는데다 그 날 따라 기존 강점이던 포핸드까지 더 기가 막히게 들어오니 당황한 게 표정에서도 보인다. 사실 왕하오는 주니어 때까지만 해도 이면타법을 구사하지 못하던 선수라 유승민한테도 진 선수였는데, 성인이 되면서 이면타법을 구사하기 시작하자 승승장구한다. [13] 본래 펜홀더 라켓은 손가락 3개만을 이용하여 잡기 때문에 굉장히 가벼운데, 이면타법을 구사하려면 백사이드에 러버를 하나 더 붙여야 하므로 라켓 무게가 1.5배 가량 늘어난다. 즉, 손목에 무리가 굉장히 많이 가는 타법이다. [14] 당시 1965년생인 발드네르 나이가 한국식으로 하면 무려 40세였다. [15] 참고로 발드네르는 마찬가지로 준결승전에서 왕하오에게 패한 당시 세계랭킹 1위 왕리친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해 메달은 따지 못한다. [16] 그렇다고 유승민이 무조건 언더독이었다고만 볼 순 없는 게, 당시 유승민의 세계랭킹은 올림픽 직전 기존 4,5위에서 (천적 왕하오를 제끼고) 3위까지 뛰어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나름 괜찮은 시드도 배정 받을 수 있었던 것. 올림픽 우승 직후엔 2위까지 올라간다. 이때 유승민의 기세는 최고조라서, 준결승에서 발트너를 잡은 뒤 유승민은 김택수에게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이거 결승에서 무조건 이깁니다. 정말 무조건 제가 이길 게임입니다. 근거도 없이 본인이 금메달을 딸 것임을 확신하는 이 발언을 들은 뒤 김택수는 유승민의 기세가 최고조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17]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유승민은 "왕하오 선수에게 이긴 적이 없어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하고 작전이 잘 먹혀 들어가 어느 정도 기대를 했다. 왕하오와의 경기에서 선제공격을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훗날 인터뷰에선 성인 무대에 올라온 이후엔 올림픽 전 6전 6패였지만 어느 정도의 희망, 자신은 가졌던 게, 첨엔 구질 파악이 안 돼서 4:0 깔끔하게 졌는데 이후 4:1, 4:2, 4:3 식으로 경기 내용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하오를 최대한 팠다고 한다. 반면 왕하오는 계속 이기고 있던 상대라 약간의 방심도 했지 않나 추정했다. 이후엔 방심을 안해서 다시 이긴듯. [18] 사실 유승민이 중학생일 때부터 라켓 손질을 김택수가 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김택수 라켓과 유승민 라켓은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어느 날 김택수 라켓이 더 좋게 보여 라켓을 이용했고, 이후 메달 운이라도 들어온다고 생각했는지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도 집에 잘 모셔놓고 있다고. 한번 가져가면 제꺼 아닌가요? [19] 이효심 관장 아래 여러 코치들이 수업을 한다. 김택수 감독은 종종 회원들과 이벤트성 탁구 시합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