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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18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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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6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VI | |
성명 | 기오르기-말라키아 아바시제(გიორგი-მალაქია აბაშიძე) | |
가족 |
파아타 아바시제(아버지) 파아타 아바시제(형) 파아타 아바시제(장남) 레반 아바시제(차남) 엘레나(장녀) 타마르(차녀) 안니카(삼녀) 마리암(사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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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미상 ~ 1722년 | |
재위 기간 | 1702년 ~ 17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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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18대 군주.2. 생애
아르그베티 공국의 수장 파아타 아바시제의 아들이다. 본명은 말라키아 아바시제로, 일찍이 수도자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1684년 형 파아타가 사망하자 '기오르기'라는 이름을 취하고 아그르베티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전처[1]와 결혼했다. 1690년, 아르칠리를 새 이메레티 왕으로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함께 카르틀리로 망명한 전 군주 알렉산드레 4세를 옹립했다.1691년 투르크군의 도움으로 아르칠리를 몰아내고 알렉산드레 4세를 복위시켰다. 딸 타마르를 알렉산드레 4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레 4세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왕권 강화에 힘을 기울이자 위협을 느끼고 1695년 귀족들과 함께 알렉산드레 4세를 시해하고 기오르기 5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타마르를 기오르기 5세와 재혼시시키고 전권을 손웨 쥐었다. 1698년, 딸 타마르가 "저런 용렬한 자를 왕으로 따를 수 없다"며 내쫓아달라고 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기오르기 5세를 시해한 뒤 전 왕 아르칠리를 이메레티의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아르칠리를 타마르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아할치헤의 셀림 파샤가 오스만 술탄 무스타파 2세의 명을 받들어 알렉산드레 4세의 아들인 시몬을 복위시키기 위해 이메레티로 쳐들어오자, 그는 즉시 시몬의 편을 들어 아르칠리를 러시아로 쫓아냈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시몬은 그의 딸 아니카와 결혼했다. 그러나 타마르는 시몬과 자신의 여동생 아니카가 권력을 쥐고 자신은 실각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여러 귀족을 선동하여 왕을 압박했다. 시몬은 카르틀리로 피신했고, 그는 섭정 자격으로서 이메레티를 통치했다. 그는 레흐후미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에게 병력을 빌려줘서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며, 타마르를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와 결혼시켜서 동맹 관계를 돈독히 했다. 또한 자신에게 도전한 라차 지역에 대한 정벌을 단행해 그곳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여러 마을을 파괴했다.
1701년, 구리아 공작 마미아 구리엘리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시몬을 왕위에 되돌려놓기로 했다. 마미아는 시몬에게 아니카와 이혼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마미아가 투르크군의 원조를 받고 쿠타이시를 도모할 기미를 보이자, 그는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와 함께 사칠라오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맞설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투르크군과 연합한 구리아군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그는 마미아에게 "시몬을 죽이고 당신이 왕이 되라"라고 제안했다. 시몬은 이 제안에 혹해 자객을 보내 시몬을 죽였다. 이후 그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마미아 구리엘리는 그가 재정 관리를 통제하는 바람에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구리아 영민들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1702년, 그는 정변을 일으켜 마미아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가 관장하는 밍그렐리아 공국이 압하지야인들의 침략으로 큰 타격을 입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압하지야를 공격했다. 그는 압하지야 일대를 황페화시키고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후 압하지야 공작 로스톰 셰르바시제와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를 화해시키고 압하지야 공작에게서 에그레시 강 유역의 땅을 빼앗고 인질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할치헤의 이사크 파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걸 중단했고, 이사크 파샤는 이에 분노하여 이스탄불에 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술탄 무스타파 2세는 에르주룸의 셀림 파샤에게 이메레티 왕국을 정벌하고 시몬의 동생인 기오르기 7세를 왕위에 올리라고 명령했다.
투르크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 구리아와 밍그렐리아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산길을 틀어막아 적의 진군을 최대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그에게 밀려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마미아 구리엘리는 그를 배신하고 기오르기 7세의 편에 섰다. 오스만 제국군은 아르그베티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쿠타이시를 압박했으나,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아흐메트 3세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쇼라피니 요새를 파괴하고 인질과 선물을 에르주룸에 넘겼다. 또한 기오르기 7세를 입양하고 이메레티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1703년 투르크군이 철수하자 태도를 바꿔 병사들에게 적을 추격해 섬멸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많은 투르크군이 전사하고 아할치헤의 이사크 술탄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그들에게 내줬던 전리품을 모조리 회수했다. 기오르기 7세는 그를 두려워하여 쿠타이시 요새로 피신했고, 그는 이메레티 왕을 계속 자처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메레티 대귀족인 기오르기 미켈라제는 기오르기 7세에게 충성하고 기오르기 7세가 전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의 딸인 로담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이에 그와 기오르기 미켈라제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그는 구리아 공작과 밍그렐리아 공작의 지원을 받아 미켈라제를 공격해 크게 이겼고, 미켈라제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한편, 카르틀리의 왕 바크탕 6세는 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하며 그의 아들 레반을 카르틀리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 동의했지만, 레반이 카르틀리 왕에 의해 사파비 제국으로 보내질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거부하기로 했다. 이후 바크탕 6세는 기오르기 7세를 돕기로 했다. 1707년,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의 지원과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의 왕으로 등극했다. 기오르기 7세는 그에게 모든 왕실 영지를 포기하고 영지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는 총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기오르기 7세와 협상하려 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자 밍그렐리아 공작이자 우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원군을 보내줬고, 그는 바케 마을 인근에서 기오르기 7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09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의 아들들과 그의 조카들은 기오르기 7세의 편으로 넘어갔다. 기오르기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쿠타이시에서 출발하여 그가 있는 마츠키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장남 파아타 아바시제에게 요새 수비를 맡긴 뒤 포위망을 뚫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합세하려 했다. 기오르기 7세는 이들이 합류하는 걸 막기로 하고 야간에 리파르티아니의 진영을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베리 요새로 피신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츠키 요새로 돌아와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파아타 아바시제는 곧 항복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츠키를 점령한 뒤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고 뒤이어 스베리 요새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적의 공세를 격퇴한 뒤 바크탕 6세의 초청에 따라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1711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기오르기 7세를 몰아내고 마미아 구리엘리를 복위시켰다. 마미아는 아내이자 그의 딸인 엘레나와 이혼하고 에리스타브 라친스키의 누이인 타마르와 결혼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한 뒤 바크탕 6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때 기오르기 7세는 바크탕 6세에게 여전히 카르틀리 왕국에 머물고 있는 그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크탕 6세는 거절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이후 그는 이메레티로 돌아갔고, 정계를 은퇴한 뒤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1722년 바크탕 6세의 궁정으로 갔다가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1]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