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regorio de Cespedes(1551 또는 1552 ~ 1611)
카스티아 왕국 출신의 신부.
2. 생애
카스티야 연합 왕국(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1569년에 살라망카의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알레한드로 발리그나노를 따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건너갔다가 1577년에 일본에 도착해 오오무라, 미야코, 코키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585년에는 오사카에서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문을 받았으며, 1587년에는 히라도, 시마하라 주변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그러나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령을 발표하자 고생을 했다. 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공격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스페데스는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종군[1]해 나가사키에서 출발하고 대마도를 거쳤다가 조선으로 갔는데, 풍랑으로 되돌아가서 2번째 출항으로 1593년 말에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했다.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갔을 때, 조선은 전략상으로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성들의 주변을 완전히 파괴하고 공터로 만들어 놓았다. 때문에 세스페데스는 조선의 주민들과 접촉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다.
이후 비밀리 조선에 간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처벌받을 뻔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2]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이후 시마하라, 고쿠라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에 사망했다.
그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남긴 편지 4통의 내용은 <선교사들의 역사>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조선을 꼬레이(Coray)라고 표기했다.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가톨릭 성직자가 바로 세스페데스다.[3] 성직자가 아닌 유럽인으로 따지면 1582년에 일본으로 가던 길에 조난을 당하여 표류했던 포르투갈인 선원이 최초로, 이 사람은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명령에 의해 명나라를 거쳐서 모국인 포르투갈로 돌려보내졌다. 유럽인이 아닌 백인으로 범위를 확장하면 소그드인이 고구려를 방문한 사례도 있다.
3. 여담
전남 대흥사에서 보관 중이던 서산대사의 유물 중에 황금 십자가가 있는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문제의 황금 십자가는 70년대 도난을 당했다. 범인은 잡았지만, 유물은 이미 목포금방에서 불에 녹아서 유실되었다. 현재 복원 사업이 추진 중이다.조선인과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창원시 진해구 웅천왜성 앞에 그를 기리는 세스페데스 공원이 만들어졌다.
[1]
물론 올린
미사가 일본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축성한 웅천남산왜성에서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미사라는 굉장히 복잡한 사연이 있기 때문에 논란거리이다.
[2]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
신부가 되었다.
[3]
고려 시대에
교황
요한 22세가
선교사를 통해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충숙왕에게 전달한 친서가 현재
바티칸 비밀 문서고에 남아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나 중국 측의 사료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고, 바티칸에서도 원나라(초기 몽골 제국)에 친서를 보낸 적은 있지만 고려에까지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 친서라는 것이 좋은 내용이 아니라, 몽골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침략했던 것(실제로는 당시 우구데이칸이 죽는 바람에 유럽에 쳐들어간 장군이 오스트리아 초입에서 그만두고 귀국했다.)에 대해 교황이 항의와 경고를 하는 편지를 몽골에 보냈고, 그러자 몽골 황제(대칸)가 역으로 "니가 사신 보내서 내게 사죄 안하면 니네 곧 다 죽을거"라는 식의 협박편지를 주고받은 것이다. 로마와 유럽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몽골 대칸이 얼마못가 급사로 죽는 바람에 몽골의 서유럽 침공은 다 취소되어 이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