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8:49

영한합작

寧漢合作
Nanjing-Wuhan Integration

1. 개요2. 배경
2.1. 4.12 상하이 쿠데타와 영한결렬(영한분열)2.2. 국공결렬과 장제스의 하야
3. 전개
3.1. 통합을 위한 협상3.2. 특위의 구성3.3. 특위의 활동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4.12 상하이 쿠데타로 분리된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다시 합작을 한 사건을 말한다. 영(寧)은 난징의 별칭이고[1] 한(漢)은 우한의 약칭이다. 여기에 서산회의 이후 분열된 상하이 당중앙 역시 합류하였다. 시기상 1차 북벌과 2차 북벌의 중간에 위치해있으며, 이것으로 국민당의 분열은 일단락되고 국민당은 다시 북벌에 나서게 된다. 또한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은 적대 관계에 돌입하였다.

2. 배경

2.1. 4.12 상하이 쿠데타와 영한결렬(영한분열)

1927년, 국민당 내부에서 승승가도를 걷고 있던 장제스와 중산함 사건을 통해 장제스가 친공 세력이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된 국민당 좌파 및 공산당의 알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의 초기까지만 해도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 주도의 체제에 잠시 숨죽이고 있었으나 우한 함락 등으로 새로운 기반이 마련되고 좌파에 포섭된 군사력이 확보되면서 다시 장제스와 정치적으로 충돌을 빚었다. 국민당 좌파는 천리푸를 비롯한 친장 인물들을 견제하는 한편 장제스의 경쟁자인 탕성즈에 대한 지원을 개시하고 중산함 사건 이후로 정치에서 손을 떼고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 복귀를 추진(영왕운동)하는 등 맹벽히 장제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장제스도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반장파의 세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양측의 충돌은 천도 문제를 통해 두드러졌고 이 천도 논쟁에서 장제스는 처음에는 우한 천도를, 나중에 난창 천도를 주장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국민정부는 우한으로 천도했고 장제스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한을 방문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군사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탈하여 우한에 잔류하는 등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양측의 정치적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1927년 2월 중순 이후엔 원색적 비난만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국민당 중집위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직은 유지했으나 권력을 대폭 축소시켰고 4월에 들어서는 아예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에서 면직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여러 복잡한 상황이 겹쳐져서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란 극단적인 해법을 도출하게 된다.

4월 17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에 대한 출당 조치와 체포령 및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장제스는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수립을 선포함에 따라 국민당은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의 해당 단락 참조.

2.2. 국공결렬과 장제스의 하야

영한 결렬로 두개의 국민정부가 생겼으며, 여기에 장쭤린의 베이징 정부까지 이미 존속하고 있던 상황으로 중국에는 3개의 정부가 대립하는 마치 삼국지와도 같은 상황이 열리게 되었는데 세 정부 모두 상황이 열악한 면이 있어[2]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급격한 상황 변화는 없었다. 결국 분열된 두 국민정부는 각각 북벌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의 북벌 재개 단락 참조.

하지만 우한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농촌과 도시의 폭동으로 내부 분열이 심각해졌으며 경제 위기가 닥쳐와 정부의 운용 자체가 불가능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우익 장교들이 마일사변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고 설상가상으로 공산당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해 국민당을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키며 우한의 장교들을 숙청하라는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5월 지시'가 내려오고 소련이 우한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데에 이어 펑위샹까지 장제스의 편에 서게 되자 7월 15일 공산당과 결렬하는 분공조치를 취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국공결렬 문서 참조.

장풍 합작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6월 말, 탕성즈가 장제스의 병력이 산동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난징 국민정부를 상대로 동정을 실시했다. 이에 맞물려 북방의 쑨촨팡이 역습을 가해 난징이 위험해지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장제스는 우한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우한에서는 완강하게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탕성즈는 8월 8일 반장 선언을 전국에 타전하였다. 왕징웨이에게 포섭이 된 리쭝런을 비롯한 광서파는 우한과 통합을 위해 장제스의 하야를 종용하였고 8월 12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된 장제스가 사직서를 제출, 8월 13일에 하야 선언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국민당의 1차 북벌의 해당 단락 참조.

3. 전개

3.1. 통합을 위한 협상

장제스 하야와 더불어 난징 국민정부, 우한 국민정부, 거기에 상하이 당중앙을 이끌던 서산회의파까지 3갈래로 갈라져 있던 국민당을 통일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당시 난징의 새로운 주도 세력을 떠오른 광서파는 반공 외의 정치적 문제는 타협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우한-난징의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기에 반공을 위한 청당을 외치던 서산회의파 역시 난징과 우한이 모두 청당에 나서자 이들의 당무협정에 호응하여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우한은 장제스가 없어진 이상 난징을 접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여겼다. 8월 19일 우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25차 확대회의는 왕징웨이의 제안에 따라 장제스,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리지선 등에 대한 당적 박탈 조치를 취소하였다. 8월 22일 리쭝런, 왕징웨이, 탄옌카이, 쑨커, 천궁보, 청첸, 탕성즈 등이 구강에서 회담을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했고 9월 3일 이전 우한정부를 난징으로 천도하여 9월 15일부터 난징에서 4중전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도 공산당도 없어졌다곤 하지만 입장 차가 커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우선 탕성즈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점령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으며 계속 동진하여 계계군벌의 분노를 샀고 계계군벌의 정지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우한에서 개최된 삼중전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난징 측에서는 반 왕징웨이 입장을 드러내며 왕징웨이 측 인사들을 공격했고 친장파들은 왕징웨이를 장제스 하야의 원흉으로 규정하여 왕징웨이의 동반 사퇴 역시 요구했다. 앞서 말했듯이 후한민을 비롯한 반우한파 인사들 역시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떠나는 등 우한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탄옌카이, 쑨커가 상하이로 파견되어 9월 15일로 예정된 4중전회에 참석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후한민은 이전에 시행된 3중전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4중전회 소집 절대불가라는 입장을 천명하여 참석을 거부했다. 또한 우한이 주도적인 4중전회 참석 자체가 우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역으로 왕징웨이는 정통성 인정을 위해 4중전회 소집에 사력을 걸었다. 그는 여러 차례 4중전회만 소집된다면 자신도 하야하고 정치에서 은퇴하겠다고 이들을 회유하러 했다.

한편 왕징웨이는 자신이 이렇게 난타를 당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친 서산회의파 인물인 쉬충즈를 이용하여 서산회의파를 회유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 했다. 자신들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영향력이 증가하게 된 것을 안 서산회의파는 즉각 목소리를 높여 국민당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영한의 정통성 시비를 중단하고 왕징웨이는 내외의 신망을 잃었으니 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 우한과 왕징웨이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반면 난징과는 6월 이후로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었으므로 서산회의파는 우한과 거리를 두면서 소위 말하는 '몸값 올리기'에 들어갔다. 서산회의파는 정부의 통일이 아닌 '당무의 통일'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여론의 주목을 받으려 했다. 우호세력이 아쉬웠던 왕징웨이는 서산파와 끝내 회동하여 자신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 당무통일을 위한 예비회의 소집에 합의했다.

그러던 중 8월 25일 쑨촨팡 부대가 난징을 기습공격하기 위해 장강을 도하하던 중 리쭝런, 바이충시, 허잉친의 반격에 섬멸되어 8월 30일 퇴각길에 올랐다. 쑨촨팡의 기습공격에 난징 측은 큰 충격을 받고 역시 회의에 참가할 것을 표명하여 3자의 대표가 모두 참석하는 담화회 개최가 합의되었다. 서산파는 정통성 시비는 접어두고 중앙집행위원회와 감찰위원회의 직권을 대행하는 특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난징과 우한 모두 호응, 구체적인 방법 토의를 위해 상하이 회의 소집이 결정되었다.

3.2. 특위의 구성

9월 11일부터 9월 13일까지 열린 상하이 회의에서 우한은 일관되게 4중전회의 개최와 우한 측의 정통성 인정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가 직접 상하이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상하이 중앙은 물론, 기존에 중전회 소집에 동의했던 리쭝런과 난징마저 반대로 돌아서서 회의 초반부터 분위기가 험악했다. 난징 대표 차이위안페이는 왕징웨이와 우한 측에 대한 강력한 추궁과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왕징웨이는 9월 13일 이전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겠으며 방공 조치가 늦은 것에 대해 처벌을 요청한다는 공개 통전을 보내고 우한으로 잠적해버렸고 천궁보 등 개조파 인사들도 차례로 우한이나 광저우로 떠나버렸다. 왕징웨이가 빠지자 나머지 우한 대표들은 협상 결렬의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계속 출석했으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3자의 대표들은 당무통일을 위해 특위를 성립할 것에 최종적으로 합의하고 특위 위원에 대한 인선과 구성, 직책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을 내렸다. 특별위원으로 왕징웨이, 탕성즈 등 10명이 공동추대되었고 놀랍게도 통합을 위한 모든 과정의 기초작업 책임자로 왕징웨이가 추천되었는데 이는 통합 노력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나 상하이 회의가 전제조건으로 내걸은 모든 중앙집행위원회의 취소는 삼중전회에 기초한 우한 국민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이었고 때문에 우한 측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완전히 상실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왕징웨이가 행방불명된 상황이고 일각에서는 이 행방불명이 왕징웨이가 사퇴 약속을 지킨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까지 하여 우한 측 역시 대세에 따라 특위 성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한, 난징, 상하이의 대표들은 3개월 이내에 3전대회를 소집하고 기존의 3개의 중앙장부를 모두 취소하며 이를 대신하여 각 방면의 대표가 모두 참석하는 특별위원회를 임시 최고집행기관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우한, 난징, 상하이가 각각 위원 6명, 후보위원 3명을 추천하고 공동으로 14명의 위원을 추천하여 32명의 위원과 9명의 후보위원을 선출했다. 이들 위원진에는 3방면의 요인들과 군사실력가들이 망라한 '당시 국민혁명 진영의 당정군 수뇌의 총집합'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이 특위는 그만큼 구성이 복잡하고 성향이 충돌하는 인물들이 많았는데다가 특위에 활동하기 어려운 사람, 특위에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난항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탕성즈는 동진을 계속하여 9월 8일 난징의 안휘성정부와 성당부가 무효라고 선포하며 안휘성에서 난장판을 벌였다.(...)

1927년 9월 15일 난징과 우한의 특위위원들이 중앙당부에서 중앙집행, 감찰위원회 임시회의를 소집하였고 상하이 위원들이 쑨원의 묘소 앞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상하이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발표, 저녁의 총예비회의를 소집하여 다음날 정식회의에 상정할 의안과 회의장소를 토론했다. 다음날인 9월 16일 특위가 성립되었으며 3전대회 소집 전까지 집행, 감찰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하고 지방당부 통합 등의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왕징웨이, 차이위안페이, 셰츠가 상무위원에, 후한민, 왕징웨이, 차이위안페이, 탄옌카이, 리례쥔이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장제스 등 67명이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통일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이었다. 우선, 우한의 왕징웨이는 명목상의 직책만 받았을 뿐 특위에서의 권력이 전무하단 사실에 큰 불만을 터트렸으며 특위가 자신의 우한 정부가 정통임을 부정하자 이에 분노했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특위 성립 직전 사직하고 추종자들을 거느려 몰래 상하이로 떠났다. 왕징웨이의 추종자들은 왕징웨이와 협의 후, 탕성즈와 연합하여 9월 21일 우한정치분회를 성립하고 재정위원회를 별도로 성립하여 재원을 확보하였고 특위를 불법기관으로 비난하며 반특위 활동을 전개했다. 9월 27일 탕성즈는 허젠을 대리주석으로 삼아 안휘성 정부를 성립시켰다. 여기에 장제스와 후한민을 비롯한 난징 측의 친장파 요인들이 이미 불참한 상황이라 특위의 난항은 거의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3. 특위의 활동

특위 제1차 회의는 중앙특별위원회성립선언을 발표, 국민당의 분열이 용공과 반공의 태도 차이에서 기인했으며 국민당의 최종 목표가 북벌을 통해 중국을 최단기간에 통일하고 삼민주의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서산파는 반공의 선구자들로 높이 평가되면서 당내 입지가 강화되었다. 또한 특위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개조, 조직부, 선전부, 농인부, 상인부, 공인부, 청년부, 부녀부, 해외부 등을 창설하고 기존의 군인부는 폐지하였는데 이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육해공을 통수하는 기존의 지휘체계를 공고히 하여 군사 부문의 최적임자로 여겨지는 장제스의 지휘계통을 보장하자는 계파를 초월하는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사 부문을 건드려 복귀 가능성이 점쳐져지는 장제스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 역시 중요한 정치적 이유였다.

특위는 위원 중 5명을 상무위원으로 추대하고 국민정부 산하에는 내정부, 재정부, 외교부, 사법부, 농공부, 교통부, 대학원을 두며 군사위원회 산하에도 일부 위원을 동원해 주석단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개인에게 권력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과두정 설립을 꾀한 것이었다. 이후 정부와 중앙당의 인선이 각 계파에 고루 안배되어 완료되었으나 여러 당파들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실제 업무는 광서파와 서산파에 독점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군사위원회에 가담했던 군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와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전횡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등 혼란이 가중되어 정국의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장제스의 사퇴 이후 재정 타격이 극심해져서 정부의 활동 역시 크게 제약을 받았고 북벌 역시 재개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형식적으로나마 통일한 중앙과 달리 지방에서는 그것조차 없어서 특파원을 보내 지방당부 개조를 독촉해야 했다. 하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각 지방에서 반특위 활동만 성장했다. 절강성, 강소성, 난징에서는 친장파들이 특위에 저항했고 탕성즈도 자신의 세력권에서 당원들을 핍박하여 쫓아내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각 지방의 정치분회들은 10월 1일까지 취소하기로 한 중앙의 결정을 무시하고 천궁보 등이 정치분회를 신설하여 독자적 당, 정, 군사업무를 관장했으며 광저우에서는 취소를 거부하고 군사위원회 분회 증설을 역으로 요구, 10월 11일에 관철시켰다. 이런 혼란상 때문에 3전대회 대표 선출조차 어려웠다.

이 와중에 조직부는 3전대회 소집을 위해 주비위원회를 설치, 3전대회의 주비사무를 맡게 했는데 지방당무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 특위위원 중에서 11명을 주비위원으로 선출하여 3전대회 개회 이전까지 활동하게 하였다. 이 주비위원회는 주비위원회 조직법과 선거법을 마련하여 중앙특위 위원과 후보위원은 모두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함으로 서산파의 3전대회 출석을 인정했는데 이 때문에 서산파의 정통성 주장을 공박하던 우한파가 반발하여 맹공을 퍼부었고 3전대회가 아니라 4중전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쉬충즈 등이 왕징웨이를 찾아가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성과가 없어 우한으로 가서 탕성즈 설득에 나섰다. 10월 11일 왕징웨이, 탕성즈, 쑨커, 쉬충즈 등은 3전대회 소집을 포기하고 우한의 주장대로 4중전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이 결정에 탄옌카이, 리쭝런, 허잉친 등이 연명으로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 동의를 표하며 11월 1일에 4중전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 때문에 3전대회 선거법 전문 발표가 연기되었고 결국 기존에 약속된 1928년 1월 1일 이전에 3전대회를 개최한다는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되었다.

4. 결과

이로써 상하이 당중앙, 우한 국민정부, 난징 국민정부로 갈라졌전 중국국민당은 1925년 11월 서산회의 개최 이래 표면적으로는 약 2년 만에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에서 탕성즈를 비롯한 군사적 야심가와 왕징웨이 개조파, 서산회의파, 리쭝런, 바이충시의 광서파, 후한민, 리지선, 구잉펀 등의 광동파 등이 여러 파벌이 복잡한 이해 관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제스가 관직은 버렸으되 영향력 면에서 건재했기 때문에 분열은 사실 통합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합당했다.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당의 2차 북벌 문서 참조.

5. 참고문헌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혁명



[1] 청대 난징을 강녕(江寧: 장닝)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 [2] 우한은 경제 파탄이 심했으며 난징은 가용 병력이 부족했다. 봉천은 펑위샹, 옌시산 등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우한과 난징 모두가 적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