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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마산성 子馬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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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 | |
구포왜성 [ruby(龜, ruby=く)][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Gupo Japanese Fortress |
|
<colbgcolor=#BE0529> 이칭 |
감동포성(甘同浦城) 구법곡성(仇法谷城) 의성대(義城臺) 카도카이성(カードカイ城) |
형태 | 왜성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5인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추정)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산 93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37,739㎡ |
지정연도 | 1972년 6월 26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clearfix]
1. 개요
1593년에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일대의 금정산 자락 끝 구릉지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왜장 5명이 쌓은 윤곽식 산성.2. 역사
그리고 경상좌도의 적세는
서생포 ·
임랑포 ·
두모포 ·
기장과
동래 지방의 성황당(城隍堂) 및
수영 ·
부산포와 양산(梁山) 지방의 구법곡(仇法谷) 등지에 전처럼 진을 치고 웅거하여 적선이 수시로 오가고 있으며, 경상우도는
김해 · 죽도(竹島) · 덕교(德橋) ·
웅천 ·
웅포(熊浦) ·
안골포 · 제포(薺浦) · 천성(天城) ·
가덕 ·
거제 등지에 역시 전처럼 웅거하여 적선이 항상 드나든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0일자 기사 中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0일자 기사 中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에 5천,
임랑포에 3천,
기장에 3천,
동래에 1천,
부산포에 1만, 양산(梁山)의 구법곡(仇法谷)에 3천,
좌수영에 3백, 김해(金海)에 1만 8천,
안골포에 2천, 가덕(加德)에 7백,
웅천·제포에 4천,
거제에 7천여 명인데 (...)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8일자 기사 中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8일자 기사 中
이제 김응서와 고언백의 장계를 보건대, 2월 14일에 김응서 등이 구법곡(仇法谷)에서 나오는 적을 공격하여 38명을 참수하였다 했고, 13일에는 고언백의 군사가 역시 구법곡으로 가서 여러 날을 엿보다가 역시 10여 명을 참하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같은 시기에 같이 동일한 진(陣)의 적을 공격하면서도 마치 서로 듣지도 알지도 못한 듯하여 매우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8일자 기사 中
『 조선왕조실록』1594년(선조 27) 3월 18일자 기사 中
13일 조반 후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지나면서 바라보니 감동포(甘同浦) · 천성포(天城浦) ·
안골포 등처에 모두 왜적의 진영을 설치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았으나 성지(城池)의 견고함과 옥우(屋宇)의 주밀함은 대부분 서로 같았습니다.
『 조선왕조실록』1595년(선조 28) 2월 10일자 기사 中
『 조선왕조실록』1595년(선조 28) 2월 10일자 기사 中
관백(關白)의 병이 중태라니 이미 죽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너무나도 허탄하기에 상께 보고하기 어려워 알리지 않았습니다. 대개 구법곡(仇法谷)의 적이
서생포로 옮겨간 것은 매우 확실한데, 기타 곡식을 베고 말을 기르며 짐을 배에 적재했다는 등의 일도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니, 그들에게 변화가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 조선왕조실록』1598년(선조 31) 8월 23일자 기사 中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서장(書狀)을 통해 1593년 7월 상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최고 책임자로 두고 그 동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包),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 치쿠시 히로카도(筑紫廣門) 등 5명의 왜장이 협력하여 축성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2달 반 후인 9월 25일경에는 완공한 것으로 본다.『 조선왕조실록』1598년(선조 31) 8월 23일자 기사 中
1595년 6월 말에 강화 회담의 진전에 따라 일본군은 경상도 일대의 왜성을 폐성시키고 철수를 시작했는데, 8월경 가토 기요마사가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양산 구법곡에 진영을 옮기고 명나라 사신을 기다려 모두 바다를 건너갈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구포왜성도 이때 폐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양산왜성을 쌓아 부산포 방어선을 더 북쪽으로 전진시켰지만, 임진왜란 초반과는 달리 공세종말점에 일찍 도달해 도리어 울산왜성, 양산왜성, 순천왜성 등의 최전방 기지를 지탱하는 것이 곤란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양산왜성은 내륙 지방에 있는데 부산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해서, 후방의 바다로 연결이 가능했던 순천왜성이나 울산왜성보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수비하기 곤란했다. 모리 히데모토 등이 구포왜성의 수축 공사를 담당해 1598년 3월 하순경 완공했고, 양산왜성에 있던 쿠로다 나가마사가 구포왜성으로 진을 물렸다. 이때의 공사로 현재 남아있는 구포왜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술한 『선조실록』 1598년 8월 23일 기사에 쿠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구법곡의 일본군이 서생포왜성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어, 1598년 8월 이전에 이미 폐성된 것으로 본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의성대(義城臺)[1]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낙동강변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승경지가 되었다.
3. 위치 및 구조
|
|
부산실내빙상장 내부 박물관에 전시된 구포왜성 모형 | 구포왜성 위치도 #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산 78-1, 산 78-2, 산 79, 산 84, 산 88-1, 산 89-1, 산 92, 산 93, 산 94, 산 95, 산 97-1, 434, 445, 444-15, 508, 510, 511
현재 구포동과 덕천동 일대는 본래 양산에 속하던 지역으로, 감동포(甘同浦), 구법진(仇法津), 구복포(龜伏浦) 등으로 불리던 큰 나루터가 있었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가장 큰 포구로서, 동래현 지역에서 김해 및 양산 방향으로 진출하는 길은
만덕고개가 유일했기 때문에[2] 고개를 넘어와 낙동강에 이르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특히 부산포왜관을 설치한 뒤 통교하는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일종의 검문소인 구법곡기찰(仇法谷譏察)을 세웠던 곳이다. 조선후기에는 세곡미(稅穀米)를 보관하고 실어 나르는 감동창(甘同倉)이 들어서는 등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도 편리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본진인
부산포왜성에서
동래왜성을 거쳐 북쪽으로 진격하는 진출기지로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보다 서쪽의 김해 방면에 죽도왜성을 쌓으면서 연결성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양산 방면으로 호포왜성과 양산왜성을 쌓으면서 다시 연결성이 되었으며, 최전방인 양산왜성을 보조하고 유사시 후퇴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기능했다.크게 북쪽의 본성과 남쪽의 데지로(出城)로 나뉘며, 본성은 주곽부(主郭部)와 외곽부(外郭部)로 나눌 수 있다. 본성의 주곽부는 해발 75.7m 의성산(義城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제1곽을 설치했는데, 곽의 정상부의 삭평 상태는 매우 불량해서 평평한 부분이 거의 없다. 다만 남측에 살짝 솟아 있는 부분을 천수 기단으로 상정하고, 동북측으로 매우 크게 돌출시킨 망루 기단이 제2곽으로 진입하는 고구치를 함께 이루고 있다. 제1곽을 둘러싼 큰 부곽을 서북측과 동남측의 제2곽과 제3곽으로 나누어 사이에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로 이었으며, 제2곽의 출입구는 동북측에 ㄷ자로 꺾어지는 마스가타로, 제3곽의 출입구는 서남측에 평문(平入り)으로 두었다. 제2곽 출입구로 나가면 비교적 넓은 제4곽이 있고, 서북측의 노보리이시가키로 이어지는 사카코구치(坂虎口)와 동측으로 나가는 마스가타 고구치가 있다. 제4곽 동측으로는 산비탈을 타고 긴 출입로가 나 있으며, 제3곽의 동측 모서리 부분에 이르면 거의 토축만 남은 성문지가 있고 이곳을 구포왜성의 정문(大手口)으로 상정한다. 오오테구치 앞에는 제3곽에서 수직 토루(竪土塁)를 따라 이어지는 작은 부곽들을 상정할 수 있고, 정문을 호위하기 위한 용도로 추측할 수 있다.
구포왜성 본성은 다른 왜성에 비해 성의 테두리를 두르는 해자가 많이 설치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대신에 수직 방향으로 뻗어 등성로를 제한하는 해자가 다수 분포한다.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는 해자는 제4곽의 동북쪽에 설치된 능선절단형 해자(堀切り)이고, 규모는 너비와 깊이가 약 5m 정도이다. 이 해자는 수월암 뒤편 제4곽의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그 안쪽에 밭이랑형 해자(畝状竪堀)가 약 7개소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제4곽의 서쪽 석축의 외곽에도 능선절단형 해자로 보이는 골짜기가 있고, 본성의 동남측에도 수직 해자가 5개소 존재한다. 구포왜성의 본성에서 일반적인 해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북쪽 금정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의 일부를 차단하면 독립된 지형이 되고 전망이 용이한 남쪽으로는 낙동강변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곽부의 평면 배치 형식은 제1곽을 중심으로 제2곽과 제3곽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윤곽식(輪郭式) 산성으로 분류하지만, 외곽부는 주곽부 동남쪽 석축과 인접하여 서쪽으로 제5곽 ~ 제9곽을 연결하고 있어 제곽식(梯郭式)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성에는 두 형식이 공존하는 복합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성산의 남쪽 해발 36.5 구릉지의 정상부에는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2002년 2월 26일 ~ 2022년 8월 24일 사이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 해자, 토루, 그 내 · 외부에서 각종 굴립주(掘立柱) 건물지와 출입구, 화장실로 추정되는 수혈 유구, 능선절단형 해자 등이 확인되었다. 이중의 마른 해자가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데지로를 둘러싸고 있고, 해자의 남쪽으로 출입구가 확인되었는데 지형상 본성의 주요 진입로가 있는 서측으로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데지로의 동 · 남 · 서쪽으로는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부곽의 상정이 어려운 실정이므로 윤곽식 산성으로 볼 수 있다.
조사된 해자는 비교적 경사가 급한 서쪽에 1줄이, 경사가 완만한 남쪽과 동쪽 사면에서는 같은 간격의 2줄이 확인되었는데 원래 2줄의 이중 구조로 보인다. 해자의 잔존 규모는 너비 240cm, 깊이 110cm 정도이며, 단면은 V 모양이다. 동남쪽 외곽의 해자는 흙다리(土橋)로 단절되어 있어 출입구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한다. 출입구의 남동쪽 외곽에는 정상부 해자의 진행 방향과 수직 방향의 해자가 확인되는데 적의 수평 이동을 차단하는 용도로 보인다. 따라서 데지로의 동남측은 출입구나 수직 해자가 존재하고 구릉 하단부의 굴립주 건물지와 연결되어 있어 성 정상부에서 선착장으로 출입하는 통로로 추정한다.
한편, 수직 해자 안쪽 상부에는 흙을 판처럼 얇게 다졌으며, 동남측 모서리에서는 잔돌로 뒤를 채운 석축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초축 당시의 수직 해자가 폐기한 후 메우고 석축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굴립주 건물지의 경우, 데지로 서편 낙동강 측 수직 해자의 외곽 사면 아래에서 대규모로 확인되었다. 앞면 8칸, 옆면 1칸 규모이며, 기둥 간 간격은 정면 200cm 내외이다. 정상부의 경우 해자 내측에서 9동이 확인되었는데 4동의 유구가 서로 중복되어 있어서, 몇 차례 건물을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해자 유구에서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편, 조선시대 분청사기편, 지석편, 기와편, 스리바치(擂鉢)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조리 용기인 스리바치는 일본 쇼쿠호 시대(織豊時代)의 세토 · 미노요(瀨戶ㆍ美濃窯) 도자기와 닮았다. 스리바치는 기장왜성과 서생포왜성 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일본군의 식생활 용기로서 주목된다. 한편, 기사년(己巳年)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수키와가 수습되었는데 동래왜성의 본성 구역이었던 동장대 정상부에서 수습된 것과 같은 것이어서, 일본군이 조선의 기와편도 왜성 내 건물 조영에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데지로 구역에는 현재 구포빙상장이 들어서 있어 성곽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4. 과거 모습 및 현황
|
부산 북구 구포 왜성[3]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
|
부산 북구 구포 왜성 이환과 북면 석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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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북구 구포 왜성 본환과 이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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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북구 출성에서 본 구포 왜성 전경[6] |
|
제3곽 서측의 수직 토루[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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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의 동측 석축 |
제1곽의 서측 석축 |
|
제1곽 우각부의 산가지쌓기(算木積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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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과 제3곽을 잇는 마스가타 고구치 |
|
제2곽 동북측의 ㄷ자 마스가타 고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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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남측 어긋문 동북측 망루 기단 |
|
제4곽 서북측의 사카고구치[8] |
5. 교통
구포왜성은 남쪽 구포빙상장(부산북구문화예술회관) 방면에서 육교를 통해 진입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2호선 덕천역에 내려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부산북구문화빙상센터 정류장에서 내린 다음 걸어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 육교가 나온다. 육교를 건너가면 구룡사가 나오는데, 구룡사 반대편으로 난 산길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구룡사에 딸린 석탑과 불상이 있는 대지가 나오고 그 귀퉁이의 등산로[9]로 올라가면 구포왜성의 제3곽에 진입할 수 있다.
6. 여담
- 왜성은 물론 의성산 전체를 무덤이 말 그대로 뒤덮고 있다. 지금까지 북구청에서 확인한 묘만 90기 이상인데, 대부분이 무연고자의 묘라 함부로 이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10] 심지어는 왜성 가장 꼭대기의 제1곽 위, 즉 천수 기단이 있는 곳까지 무덤이 침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의성산을 돌다 보면 곳곳에 파묘·이장 전문업체들이 걸어 놓은 플랜카드를 볼 수 있다.
- 부산광역시 지역에 남아있는 왜성 중에서는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고 하지만, 불법 경작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당하는 수난을 겪고 있다. 제2곽 내부는 사유지가 되어 전체가 개인의 밭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때문에 북구청과의 갈등이 오랜 시간 이어져 왔지만 2025년 현재까지도 도무지 개선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이는 정상부가 사유지가 되어 출입이 금지되었고 기장군과 법적 공방을 벌인 바 있는 기장왜성과 유사하다. 게다가 의성산 기슭에 있는 구룡사 측에서 왜성 가장 하단에 있었던 부곽의 석축을 불법으로 성토하는 바람에 잘 남아있던 성벽이 유실되는 일도 있었다. # #
- 부산광역시 측은 구포왜성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이 일대를 민간공원으로 만들려는 특례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계속 난항을 겪어 중단과 지연을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왜성이라는 문화재의 특성과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문화재위원회와 건설사 측이 갈등을 빚어 2023년에는 형사 고발로까지 이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공원 조성 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아서, 가장 최근인 2024년 11월에 부산광역시가 구포왜성 주변에 아파트 건설을 조건부 허가하자 지역 학회 3곳이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7. 외부 링크
8.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일본장수 고바야가와가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쌓은 왜성으로 낙동강변을 끼고 그 아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시 일본군 나베시마의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방어했는데 부산지역에 있는 11개의 왜성 가운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편에 속하며, 성 상단부의 석축지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왜성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성벽은 나사모양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좁히면서 올려 쌓았다.
9. 관련 문서
[1]
신라시대 황룡(黃龍)이라는 장수가 왜구와 싸울 때 쌓은 성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직까지 신라시대의 성곽 유적은 발굴된 바가 없다. 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주둔해서 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승도 있다.
[2]
그보다 더 남쪽에 트여 있는 냉정고개나 대치고개를 넘어 다다르는 감동포(甘東浦, 구포의 이칭인 감동포와 한자가 다르다)나 장림포는 낙동강의 폭이 너무 넓어 강을 건넌다기보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조금 상류에 있으면서 포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포가 다른 고을로 건너가는 나룻터로 자주 이용되었다.
[3]
동북에서 서남으로 바라본 모습. 제1곽에서 크게 돌출된 망루 기단이 확연히 보인다.
[4]
제2곽의 북쪽 가에서 북동측을 바라본 모습.
[5]
제1곽의 서남측 석축을 서북측에서 바라본 모습.
[6]
구포왜성 본성의 동남측 사면을 바라본 모습.
[7]
토루 위로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어 구포왜성 주곽부로 오를 수 있다. 이 토루가 등산로를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 왜성 당시의 것인지는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8]
언덕(坂)과 출입구(虎口)의 합성어로, 출입구로 통하는 진입로가 측면에 붙은 경사로로 난 형태의 고구치를 말한다.
[9]
상술한, 왜성의 수직 토루에 해당한다.
[10]
20세기 중반에는 이렇게 마을 뒷산을 거의 뒤덮듯이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지금도 북한 지역을 위성사진으로 돌려 보면 개성, 안주, 정주 등의 대도시 인근 야산 정상까지도 빽빽하게 묘지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환공포증이 올 수도 있으니 주의